지성주의와 신비주의는 상대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나치게 어려운 지적 문제를 다루는 데만 집중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카이퍼는 “회중은 강단 위의 공증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일인 공증인과 설교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 신비주의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태도다. 단순히 감상적인 것을 넘어, 교회(와 성경)를 건너뛰고 바로 성령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 두 태도가 어떻게 교회에 해를 끼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하다. 전자는 교인들에게서 기운을 빼버리고, 후자는 교인들의 길을 잃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여우인 실천주의다. 카이퍼는 여기에 크게 세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는데, 해외선교, 주일학교, 병자간호가 그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고, 어느 것 하나 비판하기가 쉽지 않는 대상들이다. 카이퍼의 비판 지점은 비슷하다. 이 세 가지가 각각 어떤 좋은 열정에서 시작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교회와 상관없는 기관과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러 선교단체들은 어느 새 교회와 경쟁하는 기관이 되거나 돈과 명예가 얽히면서 내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의 소식이 적잖이 들려오기도 한다. 주일학교의 경우 신앙교육을 단지 ‘학교’에서 배우는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국민교육이라는 당대의 세속적인 목표에 부합하는, 세속 프로젝트화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병자 간호는 간호라는 일의 외주화를 초래하게 되어 간호와 죽음이라는 일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치와 분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