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0여 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저자는 환자들의 치료를 돕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영성챙김”이라는 방식을 발견했다. 이 용어가 좀 생소하다. 영어로는 Spiritfulness라고 표기하는데, 어떻게 봐도 신조어인데, 비슷한 느낌의 단어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요새 여기저기서 들리긴 한다.
사실 이 두 개념은 거의 비슷한데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사실 기존의 정신과 치료의 주된 방향성은 정신적 고통을 회피하거나 억제하는 데 있었다면, 마음챙김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주의, 알아차림, 수용이라는 단계는 현재의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대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다분히 종교적 태도에 가깝다. 실제로 이 마음챙김은 불교적 수련법의 하나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영성챙김’도 사실 비슷한 방법론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마음챙김이 가져다주는 정신, 심리치료적 효과를 유사하기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자신을 살피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복원하고, 영적인 회복을 꾀한다는 면에서 차별점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차별점에 대한 강조가 자주 보인다. 다만 이건 “영성챙김”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방법론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논리처럼 느껴진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이런 시도를 이교와의 혼합주의라고 경계 내지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
그런데 사실 이런 접근은 애초에 자기모순적이다. 기독교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 얼마나 될까? 인류 역사만 해도 문자 기록이 남지 않은 선사시대를 제외해도 5~6천 년은 된다. 기독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은 게 몇 개나 있을까. 실제로 기독교 예배 가운데도 이미 근원을 따져보면 상당히 멀리서 온 요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명백히 이교적 영향이 남아있는 것들이라면, 효과가 좋으니 무조건 받아들이자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책에서 반복해 입증하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시간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신앙의 방식 중 하나다. 이른바 “영성챙김”이란 누구나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이 방식을, 몇 가지 도구를 통해서 도와주려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관건은 ‘익숙지 않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서유럽의 가톨릭 신앙의 결을 이어받은 주류 개신교 신학은 처음부터 조금은 이지적인 측면에 기운 상황이다. 나도 여기에 익숙해 있기에,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열세 가지의 영성챙김(기독교적 명상?)의 실제 예를 보면서 어색함을 느꼈다. 그런데 현대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정교회에서는 이와 비슷한 방식의 영적 수련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는 걸 보면, 함부로 폄훼하는 것도 “기독교적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익히고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에는 이 책에서 제안되고 있는 방법론이 나름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신비주의자의 항해가 언제나 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다는 C. S. 루이스의 경고도 항상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적절한 지도(신학)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이 부분에서는 이른바 영성챙김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 우월함 같은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이 책의 저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목회적 상담을 하다보면,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삶에 하나님을 짙게 경험할 수 있는 훈련법들이 아울러 제시된다면 분명 기독교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해당하는 서남아시아는 과거 몽골제국의 영역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훌라구가 군대를 몰고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일 칸국이다(훌라구 울루스라고도 불린다). 몽골 제국 시기 워낙에 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교통과 통신 수단으로는 직할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각 지역을 ‘울루스’라는 이름으로 칭기즈칸의 일족들이 나누어서 지배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각 울루스들의 독자성이 강화된다.
그 중 하나인 훌라구 울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수의 정복왕조 세력이 다수의 현지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일종의 문화적 공작이 필요하다. 자신의 왕조에 정통성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그리고 이 때 역사가 꽤 중요하게 사용된다. 라시드 앗 딘이 쓴 “집사”는 바로 그런 일환으로 쓰인 책이다. 훌라구 울루스의 일곱 번째 카안인 가잔 시대에 재상으로 활동했던 학자 라시드 앗 딘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모아 이 책을 썼다.(흥미롭게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 책은 “집사”의 요약본이다. 원래의 “집사”도 같은 역자인 김호동 교수에 의해 다섯 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워낙에 방대한 책인지라 이렇게 보통 사람들을 위한 조금은 다이제스트한 느낌의 책을 따로 냈나 보다.
사실 나쁘지 않은 기획 의도였는데, 책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기대를 하며 손에 들었을까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집사” 같은 책을 보려고 하는 건, 단순히 몽골제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그건 요약적으로 잘 정리해 둔 인터넷 자료가 널려 있다) 그것을 다루는 12~13세기 저자의 독특한 관점을 읽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요약을 해 버리면, 그런 특징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오히려 서술에서 조금은 올드한 느낌까지지 들기도 하고. 역자인 김호동 교수의 내공을 알기에, 차라리 역자의 눈과 입을 통해서 몽골제국사를 정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쪽이 좀 더 흥미롭게 와 닿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 저자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면서도 쓸 수 없었던 내용들을 현대의 학자들이 분석해 본 내용들을 더했더라면 좀 더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듯하다.
기획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페르시아어 사본과 러시아어, 영어 번역본을 두루 참고해서 이런 책을 번역해 낸 역자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다시 그 웅장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덧. 293쪽 본문 첫 번째 줄에 오타가 하나 보인다. “쿠빌라이”를 “쿠빌리아”라고 적었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았다는 한 가지 징후는
성공이 가져다주는 거짓된 안전감이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층은 고생을 그러려니 하며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냉혹하고 덧없다’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역경에 훨씬 더 충격을 받고 아연실색한다.
- 팀 켈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성경의 중요성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수 억 명의 사람들이 경험한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 “말씀” 위에 세워진 신앙이었다. 기독교의 역사는 누가 그 “말씀”을 더 올바르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투쟁해 온 발자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성경을 읽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 공예배 시간에 펴는 것이 전부인 경우도 많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따로 성경을 읽는 습관을 익히지 않는다. 물론 식자율 99.9%인 나라에서 글씨를 몰라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일부는 먹고 살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마트폰 같은 좀 더 재미있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거나, 그저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이건 기독교의 기반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다.
요컨대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것도 잘 읽어야 한다. 차를 타고 가까운 풍경을 보듯 스치며 읽는 대신, 차에서 내려 직접 풀을 밟고, 꽃향기를 음미하며, 잠시 머물러야 한다. 그런데 이건 수십 초 마다 관심사를 바꿔주는 쇼츠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몇 년 전 한 교회의 교육부서 총괄로 일할 때, 전 부서에 같은 큐티책 라인업으로 말씀 묵상을 도입해보자는 제안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부서의 부장이 강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무산이 되었다. 이유인즉, 교사들이 말씀묵상에 익숙하지 않은데 이런 걸 도입하면, 당장에 그만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주일학교 교사도 말씀묵상을 못하겠다고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은 아주 기초부터 말씀묵상이 무엇인지, 말씀묵상을 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까지 차근차근 알려준다. 중간 중간 실려 있는 저자의 경험과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들도 생뚱맞지 않아서 좋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읽어온 저자의 내공이 엿보인다.
책은 단순한 이론을 정리한 게 아니다. 후반부에는 실제로 어떻게 본문을 읽고, 접근하고, 어떤 생각의 도구들을 사용하면 좋을지, 실제 틀을 보여준다. 물론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예시의 높은 퀄리티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위축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처음부터, 혹은 누구나 이 정도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말씀묵상에 관해 아주 좋은 안내서이다. 지금까지는 오래 전에 읽었던 탁 목사님의 책을 추천하곤 했는데, 이젠 새로 나온 이 책을 권해 봐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