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합리주의는 관념들이 대체로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상으로부터 진화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사실상 관념들은 흔히 삶으로부터 솟아나오며

항상 삶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교리들이 주로 신학적인 논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교회가 오랫동안 그 예배에서 경험하고

선포해 온 바에 대한 표현들인 것이다.


- 후스토 곤잘레스, 『간추린 기독교 교리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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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비아 만나다 시리즈
마크 래리모어 지음, 강성윤 옮김 / 비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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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끌고 있는 성경읽기 모임에서 욥기를 읽을 차례가 되었다. 워낙에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하고 해서, 관련 책을 한 권 읽어보기로 결심하고 눈에 띤 게 이 책이었다. 만나다 시리즈로 계속 무게감 있는 책들을 내오고 있는 비아의 책이다.


사실 이 시리즈가 다분히 비평적 관점으로 진행된 연구를 주로 담고 있는지라, 종종 선을 넘기도 한다는 느낌을 주기도하는 데, 사실 그런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느냐와는 별개로 연구의 결과물 자체를 역사적인 연구사로 본다면 읽어볼 만은 하다.


시리즈마다 약간 강조점이 다르긴 한데, 해석사를 차분하게 설명해 가는데 중점을 둔 책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신학(대개 고등비평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해당 성경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둔 책도 있다. 이 책은 전자 쪽에 가깝다. 조금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





서론에서 간략히 이 복잡하고 해석이 어려운 책을 둘러싼 오랜 의견 충돌을 언급한 저자는, 곧 고대의 해석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로 넘어간다. 흥미로운 건 고대에는 욥기의 내용과 비슷한 “욥의 유언”이라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 당연히 욥기의 내용과 다른 점도 있었는데, 주인공의 이름은 “요밥”으로 이집트의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오래 전 유대교와 기독교 학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욥기를 바라보았는데, 욥기에 내재한 난해함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가 있으며, 이를 찾기 위한 영적 해석을 시도했다는 것. 크게 보면 이런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방식이다.


중세에는 교회에서 욥기의 일부를 성무일도서에 넣어 정기적으로 낭독하기도 했고, 그와는 별개로 민간에서도 욥에 관한 이야기는 또 널리 사랑받았는데, 욥은 나병 환자와 음악가, 공처가, 심지어 매독환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욥의 인내”라는 이름의 대중공연까지 만들어져 오랫동안 수없이 무대에 올려졌다고.





계몽주의의 망치질이 모든 것을 깨부수던 근대에는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인간이 그분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었다면,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정말로 활동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활동한다고 해도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욥기는 다시 한 번 난해하고, 불가해한 책으로, 인간은 신의 눈치를 보거나 호의를 기대하지 말고 이성과 자유를 지닌 존재로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재정의된 시기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욥기는 조각조각 찢긴다. 이른바 성서비평의 영향력으로 특별히 구약성경은 최소 서넛에서 때로 수십 명의 저자들이 쓴 책으로, 아니 그냥 그런 문서들을 얼기설기 긁어모은 스크랩북 정도로 평가 절하된다. 무신론의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욥기를 읽어냈고, 이제 욥기는 우정의 실패를, 나아가 하나님의 실패를 묘사하는 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 매우 실용적으로 욥기를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고.



한 권의 책에 관한 방대한 해석사를 읽는 것은 (그 책에 애정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꽤나 흥분되는 일이다. 책은 이 역사를 종으로 횡단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작 욥기의 내용에 관한 상세한 분석 같은 건 부족했다는(물론 대략적인 뉘앙스은 언급되지만) 점. 물론 그건 책의 방향성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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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절 집단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자들,

그리고 수천 명의 힘없는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이익을 본 집단수용소의 사업가들은

오늘날 그들에게 희생을 당한 사람들보다

더 쉽게 과거의 죄를 부인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자녀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었다.

반면에 이들의 희생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으로는 가능하다.

전범자들은 자신의 정체가 발각 나서

판결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만 해결 하면 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전범자들은 범죄행위 안에서 자아를 실현했다.

반면에 희생자들은 전범자들의 행위로 자아실현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겼다.

참으로 우습고 모순되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쪽보다 부작용이 휠씬 적다.

노르베르트 레버르트, 슈테판 레버르트, 『나치의 자식들』 중에서








문득... 아마도 윤석렬 부역자들도

이후에도 조금도 뉘우치지 않으며

끝까지 현실 부정의 망상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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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3 - 7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7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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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대단원이다. 이게 일곱 번째 시리즈이고, 각 시리즈마다 3권씩으로 되어 있으니 총 21권, 그리고 여기에 가이드북까지 더하면 모두 22권이었다. 첫 권을 2020년 1월에 보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5년 만에 완결까지 이르렀다. 마지막 리뷰는 시리즈 전체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해 볼까 한다.


먼저 각 시리즈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1) 로마의 일인자 - 호민관 드루수스(小 드루수스), 마리우스

2) 풀잎관 - 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3) 포르투나의 선택 - 코르넬리우스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

4) 카이사르의 여자들 - 율리우스 카이사르

5) 카이사르 - 율리우스 카이사르

6) 시월의 말 - 율리우스 카이사르

7) 안토니우스의 클레오파트라 -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카이사르가 중심인물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의 시작 시점은 BC 1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전하고 로마가 지중해 서부의 패자로 발돋움한 시기, 하지만 여전히 로마라는 작은 도시(그리고 그 도시를 주도하는 원로원)만이 모든 힘을 독점해야 한다고 여기는 소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득권 세력들에게 저항하며 최소한 이탈리아 반도 안의 동맹시에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 호민관 드루수스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암살로 계획은 실패했고, 이에 절망한 동맹시민들은 결국 내전을 선택한다.


카이사르 역시 한편으로 드루수스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더 이상 작은 도시 중심의 국가가 아니고 제국의 길로 나아갔으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층에게만 로마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은 아닌 듯하다. 작가는 바로 그 드루수스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카이피오를 등장시켜 서로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던 그들의 관계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카이피오가 드루수스의 동생 리비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카이사르의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브루투스의 어머니다!)였고, 카이피오와 이혼 후 재혼을 한 리비아가 낳은 아들이 소 카토(카이사르의 정적)과 포르키아(브루투스의 아내)였다. 그리고 아들이 없이 죽은 드루수스의 양자가 낳은 딸이 옥타비아누스의 아내가 된 리비아이고. 물론 고대 로마 귀족들의 결혼이라는 것이 유력한 가문들 사이의 연합이었기에, 유명한 사람들은 대충 다 인척관계로 이어지는 면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가는 한 인물만이 아닌 좀 더 큰 맥락에서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세밀하게 인물들을 배치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는 한 인물, 한 인물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인물이 그리 유명하지 않은데도 그에 관한 개인적인 서술이 길게 나오면, 그는 반드시 뒤에서 떤 중요한 결정이나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인물이 되는 식이다. 아무래도 역사 소설이다보니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인물들을 사용할 수 있지 않았나 싶은데, 단순히 역사 기록으로만 남은 건조한 문장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큰 바람을 일으키게 만드는 능력은 확실히 탁월한 글솜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마지막 권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최후의 결전을 다룬다. 앞서 두 권에 걸쳐서 이들이 제2차 삼두정치를 시작한 후 각각 서로를 견제하며 어떻게 준비해왔는지를 길게 다루었던 저자는, 마침내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을 연출하지만 그 모습이 영 지리멸렬하다. 가장 주된 원인은 이미 이 시기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결과로 안토니우스의 심신은 피폐해져있었고, 그 틈을 파고든 클레오파트라가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투에 관해선 문외한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설치면서 안토니우스 주변의 인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결국 첫 대결 이후 대거 이탈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을 클레오파트라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거듭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면 고대 로마에서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비공식적으로) 서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있어도, 군사 지휘에 나선 적은 없으니 그렇게 봄직도 하다. 물론 그녀의 군사적, 정치적 식견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오직 아들(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을 전 세계의 통치자로 세우겠다는 단견밖에 갖지 못했던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이 실패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상대하고자 했던 로마는, 벌써 수백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무엇이 최선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때로는 무력을 동원한) 토론의 결과로 나온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오히려 망상에 가까웠다. 얼마 전 있었던 계엄처럼.






좋은 작품이었다. 흡입력이 대단하고, 스물한 권의 대적임에도 전체를 두고 봐도 구성이나 설정이 크게 무너지는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공화정 말기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봐둬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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