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속임수인 이유는, 판결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도달하는 방법 때문이다.
……
법은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반드시 사야 한다.
그리고 사야 하는 것인 이상,
법은 그것을 비싸게 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 프레드 로델,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중에서
총신대학교의 교수 네 명이 AI라는 주제를 주고 각자의 전공에 관한 글들을 하나씩 써 모았다. 가장 먼저는 컴퓨터과학교육 전공인 김수환 교수는 AI의 발달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이어서 내 은사이기도 하신 신국원 교수는 AI에 대한 신학적, 기독교 철학적 분석을, 구약학 교수인 김희석 교수는 설교에 AI를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지에 관해, 그리고 기독교교육학의 함영주 교수는 교회 교육에 AI를 사용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과 경계해야 할 부분 등을 짚는다.
전반적인 기조는 AI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은 부인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그 안에 담긴 문제점을 경계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식이다.
역시 국내 문화연구의 대가인 신국원 교수의 글이 인상적이다(사실 체크해 둔 밑줄이 거의 다 신 교수님의 글이다).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소외 문제를 지적하고, AI 역시 인간이 만든 문화적 도구 중 하나이기에, 그것을 만든 인간의 부패한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설교에 AI를 이용할 수 있는 범위에 관해 고찰하는 김희석 교수의 글도 흥미롭다. 그는 우선 설교문을 작성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본 뒤, AI는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는데는 분명 도움이 되지만 그것의 깊은 적용에 관해서는 결국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바른 신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정도로 깊은 고민과 연구를 통한 적절한 분석과 적용을 할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부분이지만.
AI가 교회 교육에(단지 어린이나 청소년만이 아닌 교인 전반을 위한)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건 그냥 세상이 만들어 주는 뭔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빠르게 적응하고 그에 대응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을 만들 때야 그렇다는 것인데, 이 부분을 제대로 하려면 결국 자본이 필요하고, 그걸 만드는 데 사용되는 특정한 신학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은근 신학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이 많아 흥미롭다. AI는 결국 이제까지 만들어 놓은 다양한 자료들을 학습하는 식으로 대답을 해 주는데, 여기에 당연히 그 자료를 만든 사람들의 신학적 전제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 물론 오늘날 신학이 실종된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범위를 넘어서는 엉뚱한 할루시네이션이 생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근데 이건 이제까지 등장한 수많은 이단들에서 열심히 하던 일이라 아주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단,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는 있어 보이지만, 애초에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시대는 빠르게 AI를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발걸음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사실 여기에서 제시되는 논제들은 이미 진작 논의했어야 하는 것들인데, 이제야 이런 책이 나오는 것도 좀.... 책에도 소개되지만 전국의 크고 작은 목회자들을 위한 모임들에서 AI를 어떻게 목회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거기에 참여한 이들이 정말로 AI를 제대로 이해하고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그래도 인간들의(신학자와 목회자) 역할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보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변화가 있을 것 같긴 하다. 우리는 이 파도를 잘 건너갈 수 있을까?
첫 출생으로 우리는 발길질을 하고 악을 쓰면서
세상의 빛 속으로 나옵니다.
두 번째 출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그분을 찬양하고 믿게 됩니다.
우리 이전의 사랑의 행위에 의해,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보고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고 존재하는 방식이 됩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중에서
강남 도서관의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한 장기 휴관을 앞두고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다녀왔다.
반납하면서 사서님에게 그럼 공사 기간에는 책을 못 빌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그런데!
대신 1인당 100권까지(!) 공사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 넉넉하게 대출을 해 준단다.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니
한 번에 가져가지 않고 나눠서 대출해도 된다고 친절히 안내를..ㅋ
내 옆에는 어떤 아저씨가 시장 볼 때 가지고 다니는 캐리어를 들고
책을 한 무더기 대출해 가신다... 이 독서 양극화의 나라..
그런데 계산을 해 보면,
내년 3월 말까지 5개월 여.
100권을 대출해 가면 한 달에 20권씩은 봐야 한다는 건데,
몇 명이나 그걸 다 읽을까. ㅎㅎ
어차피 50권을 대출해 가는 사람도 적으니
100권이라고 팍 질러놔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대출 기간이 늘어나면 분실이나 훼손도 늘지 않을까 살짝 염려.
그냥 반납하고 갈까 하다가..
오늘 빌리면 내년 3월에나 반납하면 된다길래
미리 강남도서관에서 빌릴 책 목록에 넣어두었던 책들을 몇 권 집어 왔다.
요샌 책표지가 다들 불그죽죽하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