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9할이 미움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법이다.


- C. S. 루이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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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과 사상은 계속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생각이라는 것은 계속 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일관된 모습 못지않게 변화하는 모습도 자랑스럽습니다.


- 파울루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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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타자 혐오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환대에 관하여
윌리엄 윌리몬 지음, 송동민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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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대가로 표를 얻으려고 하는 그와 같은 정치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 책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못지않은 수준미달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는 현 시점의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고, 교회 또한 이런 타자에 대한 외면에서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해 준다.



저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타자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자’란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완전한 타자,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저자는 기독교의 설교의 목표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위협적인 ‘타자’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대로 그들을 바라볼 것을 권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자를 경계한다. 그건 우리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던가. 저자는 교회가 “두려움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라고 말한다. 교회는 우리 안에 깊이 박힌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극복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보게 만든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저자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문제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온간 종류의 헛똑똑이들이 내놓는 통계와 사회 면 뉴스들이 증거로 제안된다. 그러나 온전히 개인의 삶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온 결과가 무엇인가. 각자도생의 정글과 같은 사회, 부익부빈익빈이 고착화되어 가고, 힘이 있는 소수의 특권을 위해 사회 전체가 봉사하는 계급사회로의 회귀이지 않았던가.





책은 미국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상황과도 자주 오버랩 된다. 물론 개인윤리 차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친절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하지만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이미 철저하게 개인주의화 되어 있다. 온갖 선동적이고 혐오가 담긴 구호들이 선거 때마다 넘쳐나고, 오직 내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만이 선거에서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결단인 양 선동을 한다. 장로니, 목사니 하는 사람들의 성적 비위나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강조하던 헌금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은혜롭게” 넘어갈 방법을 찾기 바쁘면서,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몇몇 전직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이 시대의 보수적인 교회의 전형이니 말 다했다.


무엇보다 이런 시대의 교회 사역자들은 안전한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이런 관행에 날카로운 경고를 날린다. 어떤 목회자가 기존의 교회 성도만 돌보고 위로하면서 그들의 심부름꾼으로 시는 데 만족한다면, 그는 교회 지도자의 직분을 그저 ‘집 지키기’ 정도로 격하시키는 셈이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교회가 실은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그들’을 환대할 여지가 없음을 드러낼 뿐일 수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령의 한 가운데 새겨진 명령이다. 저자는 이를 단순히 선교의 명령으로만 읽는 경향에 도전해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 동족들과만 어울리지 말아라.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라. 가서 모든 이를 제자로 삼아라!”라는 타자 환대의 명령으로 읽는다.


무엇보다 책 말미에 소개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새로운 해석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라는 메시지를 읽지만, 저자는 이야기 속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분은 당대의 주류로부터 타자로, 외부인으로 정죄되었다. 그런 그분이 죽어가는 이를 살리셨다. 이야기는 이렇게 수미쌍관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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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과 버림받은 사람들과 편안히 잘 지내시는 모습에 놀란다.

‘죄인’과도 함께 지내보고 소위 ‘성도’와도 함께 지내 본 나로서는

예수님이 전자의 무리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신 이유를 알 것 같다.

죄인과 같이 있는 게 더 좋으셨던 것은 아닐까.

죄인들은 자신에 대해 정직하고 전혀 가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상대하실 수 있었다.

반면 성도들은 잘난 척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도덕의 덫으로 걸고넘어지려 했다.

결국 예수님을 체포한 것은 죄인들이 아닌 성도들이었다.


필립 얀시,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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