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대가로 표를 얻으려고 하는 그와 같은 정치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 책을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못지않은 수준미달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는 현 시점의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고, 교회 또한 이런 타자에 대한 외면에서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해 준다.
저자는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타자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자’란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완전한 타자,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저자는 기독교의 설교의 목표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위협적인 ‘타자’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대로 그들을 바라볼 것을 권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자를 경계한다. 그건 우리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던가. 저자는 교회가 “두려움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라고 말한다. 교회는 우리 안에 깊이 박힌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극복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보게 만든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저자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문제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온간 종류의 헛똑똑이들이 내놓는 통계와 사회 면 뉴스들이 증거로 제안된다. 그러나 온전히 개인의 삶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온 결과가 무엇인가. 각자도생의 정글과 같은 사회, 부익부빈익빈이 고착화되어 가고, 힘이 있는 소수의 특권을 위해 사회 전체가 봉사하는 계급사회로의 회귀이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