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정상이라 생각하며 안주하고 있다.

삶은 본래 이런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이가 가난에 허덕이지만

현대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소비재가 넘쳐나는 것도 정상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 경제성장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

주말을 위해 사는 것, 쓰고 버리는 사회,

탐욕으로 인한 급속한 자원 고갈도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 브라이언 왈쉬,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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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투자 은행(이라고 쓰고 ‘투기자본’이라고 읽는다)에서 일하던 에릭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통보를 받는다. 짐을 싸 나가면서 아무래도 자신이 하던 일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그는 부하직원인 피터에게 USB 메모리를 주며 살펴보라고 경고한다. 그날 밤 피터는 넘겨받은 자료를 분석하던 중 자신의 회사에서 팔고 있는 파생상품에 심각한 위험이 있음을 깨닫고 이를 상사에게 보고하지만, 밤샘 논의 끝에 회사의 최고위층에서 내린 결정은 다른 이들이 알기 전에 가지고 있는 상품을 모두 팔아버리라는 것...

 

 

2. 감상평 。。。。。。。         

 

     몇 년 전에 있었던 미국발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회사 고위층의 부도덕한 판단과 결정들, 그리고 그 안에서 양심의 갈등을 느끼는 중간 간부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눈앞의 보수만 보고 시키는 일을 다 하던 하급 직원들의 이야기가 그저 몇 개의 사무실을 배경으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매매라는 건 반드시 존재하는 걸 사고팔아야 한다. 무슨 선문답 같지만, 세상 돌아가는 게 워낙에 상식적이지 않다보니 이런 상식적인 문답을 종종 강조해야 할 때가 있다. 쌀이면 쌀, 사과면 사과를 파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들은 생산량의 한계가 있기에 당연히 거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의 양도 제한적이다. 사람들은 현물 대신 ‘가치’를 거래한다는 개념을 발명해냈고, 그게 바로 주식시장이나 선물거래시장이다. 꽤나 오래된 것들이라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투기자본과 결합하는 순간 기존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결과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리곤 한다.

 

     게다가 여기에 최근 미국과 유럽의 투기기업들(일단 겉으로는 ‘투자은행’이라는 아주 번듯한 이름을 달고들 있긴 하다)은 새로운 상품을 창조해낸다. 바로 파생상품이라는 것.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문서화 한 채권과 관련된 것인데, 파생상품은 모든 채권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위험’(쉽게 말해 꿔준 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첨단금융기법’을 동원해 쪼개고 나누고 이어 붙여서 ‘고수익 저위험(상대적으로 처음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의 채권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가상의 상품을 신나게 팔아먹기 시작한 것.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 가상의 자원은 어디까지나 실제의 자원에 기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투기자본들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거품은 진짜 자원의 가치의 수십 배로 커져버렸다. 결국 실제 물건에서 일어난 작은 충격으로도 거품은 왕창 터져버렸고, 그 결과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와 중산층의 삶을 어렵게 만든 금융위기다.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도, 그리고 (사후에서지만) 이해도 가능한 것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들은 그 뒤에 나타났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핵심 결정권자들, 그리고 물주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도리어 이후 발생한 금융위기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점 말이다. 투입된 정부의 공적자금은 그들의 막대한 보너스를 챙겨주는 데 날려버렸고, 고통은 졸지에 직장을 잃어버린 수 백 만의 사람들 몫이었다.(사실 가장 무서운 건, 지난 정부와 이번 정부를 막론하고 바로 이런 ‘선진금융기법’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뭐가 됐든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그들의 도덕적 해이를 정면으로 지적한다. 회사의 최고 결정권자인 존 털트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동요 없이 진실을 감추고 문제의 상품들을 하루 내에 다 팔아버릴 것을 지시해 버리고 자신은 편안하게 아침 식사를 한다. 또 엄청난 보너스에 혹한 말단 직원들은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 폭탄을 거래처에 팔아넘기는 데 열중하니 딱히 다른 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잠시 양심적 반발을 시도했던 샘 마저도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그저 자신의 개가 죽은 것만을 슬퍼할 뿐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돈을 신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교리에 따라 도덕을 버린 지 오래다.

 

     넥타이 매고 비싼 양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늘 고상한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중요한 교훈. 사실 이건 그냥 깡패, 깍두기 놈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조금 밋밋한 감이 있긴 해도, 생각하면서 볼만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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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1. 요약 。。。。。。。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이전에는 대기업이나 국가 권력을 상대로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평범한 개인들’이 모이고 조직되더니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시민들이 잇따라 독재권력들을 무너뜨렸고, 종종 개별 국가보다 더 넓은 범위에 퍼져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대 기업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벌여 요구조건을 얻어내기도 한다. 위키피디아라(사용자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나 리눅스라는 컴퓨터 운영체계는 일부러 조직하지 않은 일반인들의 힘이 어떤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저자는 바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현상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기업이나 조직을 운영하는 기존의 방식은 자체유지비용의 증가로 인해 이런 새로운 물결을 궁극적으로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는 이 새로운 방식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실제 예들을 동원해 길게 설명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약속-도구-합의)을 분석한 후, 이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기보다는(어차피 불가능하니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적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2. 감상평 。。。。。。。        

 

     대중에 관한 고전적인 설명 중 하나는 딱히 고상한 취미 없이 일이 끝나면 그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시간이나 때우는, 복잡한 문제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말을 그냥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지금도 이 나라의 어떤 집단은 좀비 운운하며 이런 케케묵은 낡은 관점을 떠벌리고 다니고 있고) 이 책은 그런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설명한다.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도구들은 이제 널리 퍼져서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었는데, 바로 그렇게 새로운 기술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시점에서 진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변화는 이제 추진력을 얻었고, 맹렬하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연료를 태우며 날아가기 시작해버렸다. 일종의 전환기가 전 세계적으로는 최근 20여년 내에 (아마 우리나라의 경우는 10여년 내에) 시작된 것인데,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예상했던 내용들과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유력 정당에서 각종 선거의 후보를 뽑는 데 모바일 투표를 이용하게 된 것도 그런 예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정당이나 기업과 같은 고전적인 조직들은 여전히 조직의 유지 자체에 많은 힘을 기울이느라 새로운 기술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 자체에만 주목할 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확장적 의미와 힘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걸로 보이지만. 앞으로 바로 이 부분을 제대로 잡아 이용하는 쪽이 확실히 성공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물론 이 새로운 변화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책에서 언급된 위키피디아나 리눅스 같이 자체정화 능력을 보여주는 집단 창작물이 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각종 범죄를 공모하거나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될 수도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는 거니까. 인류가 가지고 있는 악의(惡意)의 깊음과 넓음은 늘 예측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곤 했다.

 

     흥미로운 책이다. 조직을 운영하거나 이끌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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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진화론 옹호 입장 발표에 관해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는 2012년 9월 5일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의 진화론 내용에 대한 수정·보완 가이드라인'에서

"진화론은 과학적 반증(反證)을 통해 정립된 현대 과학의 핵심 이론 중 하나로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내용의 기자회견이었는데요,

먼저 왜 이런 발표를 굳이 나와 했는지를 살펴봐야겠죠.

 

 

사건은 지난 2011년 한 단체가 교과서에 실린 시조새와 말의 진화에 관한 기술을

삭제해 달라는 청원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한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둘 모두 진화의 증거로 제시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죠.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단계가 아닌 독립된 종으로도 볼 수 있고,

 말의 진화를 보여준다는 화석들은 인위적인 배열로 인한 착시효과라는 게 정설)

그 뒤에 종교적 배경이 있든 없든 간에,

문제 제기 자체는 지극히 타당한 논거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둘 모두 현대 과학계에서 위에 나온 것과 같은 식으로 이해되지는 않고 있음

 

 

그런데 이번에 발표한 한림원의 가이드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현재 일부 과학 교과서가 시조새를 조류 또는 파충류에 가까운 유일한 중간종으로 오해하도록 서술했으나, 시조새 외에도 수각류 공룡에서 현생 조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원시 조류의 화석이 존재한다"

 

"단순한 직선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진화도를 관목형으로 대체해야 하며, 이런 진화도는 말 외에도 고래의 진화, 초기 양서류의 진화로도 설명할 수 있다"

 

꽤나 재미있는 대답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시조새와 말의 진화도(進化圖) 모두 기존의 설명 자체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 맞다.

2) 하지만 진화의 다른 증거가 있으니 그 둘을 빼서는 안 된다.

 

이게 무슨 소린가요?

진화는 옳지만 현재 교과서에 실린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① 일단 사실과 다른 내용을 삭제하고,

② 그분들이 말하는 다른 증거들을 연구해 삽입하면 그만입니다.

 

틀린 건 인정하지만 삭제는 안 된다,

진화는 다른 증거로 증명될 수 있다 라뇨..

마치 어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한참 야단을 맞았는데,

오늘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은 게 밝혀진 거죠.

하지만 상대는 내가 했던 다른 잘못들도 있으니

어제 야단 친 걸 철회하거나 사과할 이유는 없다는 거랑 비슷합니다.

과연 내가 했다는 다른 잘못들이 정말 사실인지 확인해보는 것과는 별도로,

이런 식의 논지 전개는 완전히 논점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 한땐 이런 그림도 유행했었죠. 이건 이미 헤켈 생전에 조작으로 밝혀진 것.

 

 

교과서에서 그 내용들의 삭제를 요구한 사람들의 배경이 어떻든,

청원의 내용 자체는 철저하게 사실에 관한 확인을 요구하는 것인데

굳이 한림원 쪽에서는 문제를 사실 여부보다는 '배경적 이론'의 차원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고마운 일입니다.

과학자들 역시 자기들만의 패러다임, 혹은 세계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이란 걸

증명해주는 좋은 예가 될 테니 말입니다.

 

네, 이 문제는 찬찬히 따라가 보면

현대의 과학주의, 혹은 분석주의라는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것 옳지 않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죠.

오늘날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입장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건 오로지 과학자들만 할 수 있다는,

대단히 독재적인 발상이기도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과학자들에게 진실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줬던가요?

 

그분들은 과학이 대단히 객관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과학은 객관적일지 몰라도, 그것을 실제로 연구하고 이용하는 ‘사람’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과학계도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기와 기만, 속임수들이 난무해 왔습니다.

요즘도 연구비 타 내기 위해 교수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가관이죠.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다른 모든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굳이 부정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과학 이론 자체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귀납적인 방식을 기본 태도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상당수의 이론은 가설에 근거합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다 아실만한 분들이

‘진화는 절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라는 투로 말씀하시니 좀 재밌습니다.

그런 식의 입장 발표 자체가 딱히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여하튼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이번 삭제 청원의 배후에 ‘비과학적인 집단’이 있고,

그들이 취하고 있는 배경은 옳지 않기 때문에(이 판단은 당연히 자기들만 할 수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논리가 옳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는지도 모릅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들의 패러다임과 전제와 다른 어떤 의견도 듣지 않겠다는 말이죠.

 

다시 묻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줬던가요?

 

 

 

물론 저도 현대의 발전된 과학적 연구의 결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과학계의 큰 공헌도 인정합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각종 살상도구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할 수 있는 온갖 기술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과학이란 드러난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에 관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이용해

그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표명할 수 있는 것 뿐이지,

세계에 관해, 옳고 그름에 관한 절대적인 판단자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하물며 상대방의 배경이나 의도까지 예상해 오버할 필요는 더더욱 없구요.

 

그런 차원에서 이번 발표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독단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로, 이번 가이드라인은 한림원이 만든 전문가협의회가 마련했다고 하는데요,

협의회 위원 11명은 과기한림원 회원 3명, 진화론 및 화석학 전문가 5명,

기초과학학회연합체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됐다는 군요.

처음부터 특정 입장을 정하고 그걸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인적 구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 하는 건 '과학적'이라기 보단 '정치적'인 듯합니다만..

뭐 그냥 느낌인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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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국익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논의 자체가

파병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관계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현상이다.

이익이 있어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여전히 대의와 명분 같은 것으로 

참전 혹은 파병 같은 일을 결정하게 된다.

 

- 우석훈, 『촌놈들의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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