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머리가 지끈거리게 만드는 캐릭터 설명으로 시작한다. 전직 레스링 선수로, 고졸 특채를 통해 경찰에 들어왔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몸부터 나서다 지금은 민원실에서 일하고 있는 전직 형사 박미영(라미란), 그녀와 한집에 사는 사이(시누이)이면서 거의 비슷한 성격의 열혈 경찰 조지혜(이성경)까지.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전개가 충분히 예상되면서도, 그 과정에 재미를 넣기 위해서였을까, 지나치게 과장되어 보이는 캐릭터들이 좀 시끄럽게 느껴진다. 이런 우려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데...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민원실로 당분간 쫓겨나게 된 지혜는 미영과 티격태격하며 험난한 근신기간을 보내기 시작하던 중, 민원실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몰카 범죄의 피해자의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강력한 각성을 경험한 두 여자가 도움이 안 되는 남자들을 뒤에 두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

 

     근래에 사회적 이슈가 된 있는 몰카 범죄를 중심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그 과정을 지나치게 가볍게 소비하지는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우선, 사건은 수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식일 뿐이고(악역들이 조금만 머리를 더 썼거나, 3분만 더 의심했어도 두 여자는 진작 제거되었을 듯), 감독은 여기에 거의 강박적으로 개그코드를 넣으려고 애를 쓰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억지스럽다.

 

 

     애초에 작정하고 웃겨보자는 코미디 영화로 만들었다면 또 모르겠다. ‘극한 직업처럼 경찰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가벼운 터치로 그려낼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여성주의’(혹은 여성우월주의?)라는 좀 더 무거운 주제를 넣으려고 작정한 상태였고, 이 주제를 어떻게든 우겨넣으려다보니 개연성이 부족해도 어지간히 부족하다

 

     ​어차피 영화야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적어도 실제를 어느 식으로든 반영해야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오직 여성은 피해자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만나는 모든 인물과 사건에 가져다 대버린다는 게 문제. 영화 속 동료 남성 경찰들은 하나같이 진급과 실적에 눈이 먼 속물들로 묘사되고, 미영의 남편이자 지혜의 오빠인 지철(윤상현)은 그냥 머저리로 출연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인물들을 그려낼 생각이 없었다고 밖에...(애초에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구보고 웃으라는 걸까?)

 

     애초에 이 영화가 여성의 우월함, 혹은 정의롭고 지혜로움을 그리는 영화였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해내기는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충동적이고, 신중치 못하며, 겨우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실수에서 아무런 배움도 얻지 못하는 수준이니... 오히려 여자는 이래서 안 돼같은 식의 디스만 난무하는 듯한데 말이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그렇다고 유쾌하게 보기도 어려운 무리한 설정들의 남발. 이 영화는 뭘 위해 만들어진 걸까? 몰카 범죄에 대한 경각심?(물론 몰카 범죄는 척결되어야 할 문제인데, 이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고 그 부분이 진지하게 와 닿을까?) 아니면 그냥 남성은 열등하다는 식의 편견을 보며 웃고 떠들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만든 영화?

 

     네이버 기준으로 관람객 평점이 무려 9.08이다. 기자, 평론가와 네티즌 평점은 5점 대. 사실상 평점조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대충 의도가 읽히긴 한다. 집단지성이라는 건 과연 허구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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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영화인 줄 알았다던(이 말은 상징법 아니라 직설법이었다) 손석희 사장의 말을 듣고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지 않고 예매를 한지라, 나도 비슷한 생각은 갖고 앉았으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좀 지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 속 기생충이 사람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작은 생물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데, 그 순간 제목에 관한 감독의 씁쓸한 조크에 피식하게 된다.

     영화 초반은 계속 이런 식의 블랙유머가 오고간다. 분명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기택(송강호) 가족의 어이없을 정도의 평온하며 자신감 있는 모습도, 그들이 하나둘 동익(이선균)과 연교(조여정)의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유머러스함이 느껴지는데, 어느새 이야기는 두 가족의 확연한 빈부의 격차, 사는 방식의 차이, 나아가 사고의 다른 결을 보여주는 것으로 넘어간다. 유머와 메시지, 그리고 (결말부에 등장하지만) 격정적인 감정의 분출까지, 외국인들의 눈에도 확실히 작품이구나 싶게 할 만한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동익과 연교 부부의 집과 큰 비가 오면 금세 물바다가 되어버리는 기택 가족의 반지하집은 시각적으로도 엄청난 대조를 보인다. 하지만 더 큰 대조는 두 가족의 생각에 묻어있다. 분명 사기를 치는 중에서도 뻔뻔함을 넘어 떳떳한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의 달변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데, 반대편의 동익과 연교는 또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결국 돈이 아니었나 싶다.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고, 부유한 사람들의 공감능력을 앗아갔다. 그런데 이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모습을 가져온다는 게 아이러니다. ‘선을 넘어오지 말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동익의 모습에는 어떤 인간다움, 혹은 인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자신들의 사기를 감추기 위해 극단적인 일까지 저지르고도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기택의 모습에서도 크게 다른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자신들보다 열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을 저 아래에 두고 선을 그으려 하고 있으니까. 돈의 가치를 최상위에 둔 이상, 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문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다양한 포인트들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놀이가 인기다. 감독이 그 모든 것을 다 염두하고 세밀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심으로는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듯. 여튼 상업영화에 이렇게 많은 말이 나오는 건 흥행에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할 테니까. 개인적으로는 동익 부부의 둘째 다송이 그렸다는 자화상속 주인공이 내가 생각하는그 사람인지 살짝 궁금하긴 하다.

     오늘 일자로 영화가 7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렇게 대중적일까 하는 생각은 살짝 든다. 일단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좀 그로테스크한데다가, 후반부의 충돌도 좀 불편하게 볼 만한 소지가 잔뜩 있으니까.(약간은 뜬금없는 폭력의 수위도 그렇고, 과연 그게 논리적인 결과인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택의 집에서 볼 수 있는) 일정 수준 이하의 가난은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 마련인지라.

 

     영화의 예술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는 건 내 몫은 아닌 듯하고,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긴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보라고, 좋다고 권하고 싶은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차라리 상을 받아 않았더라면 좀 더 작품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가능해졌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살짝 표하던데 백번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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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 브로커라는 직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의 뒤편에 숨어있는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 수위의 노골적임은 역시나 미국 쪽이 훨씬 더 강렬했고, 이 영화 은 딱 그냥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터치와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오락영화 쪽이다.(디카프리오 주연의 그 영화는 시종일관 퇴폐적인 분위기와 우울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상장된 회사의 코드를 모두 암기할 정도로 좋은 기억력을 가진 주인공 일현(류준열)이었지만, 첫 출근 후 수입은 바닥에 머물렀다.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하는 주식 브로커라는 직업이 어느 정도 인맥이 있어야 하는데, 신입사원에게 그런 게 있을리 만무했으니까. 그러던 중 회사 선배의 소개로 은밀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거물 작전세력의 설계자 번호표(유지태)’를 만나게 되고, 이른바 작전에 끼어들어 거액을 벌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섭섭할 테고, 처음엔 돈을 좀 만지면서 여자친구도 동료도 내팽개치며 신나하던 그가 각성하게 된 것은 자신처럼 번호표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제거되어 버린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언젠가 자신도 그런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작전세력을 추적하던 금감원 팀장(?) 한지철(조우진)에게 협력하기 시작한다는 내용.

      영화가 좀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인물들이 그다지 생동감이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맡은 류준열은 요새 너무 나온다 싶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에 출연하는데, 신스틸러의 면모를 드러냈던 초기와 달리,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나 평점심(?)을 보이는 듯하달까.(배우에게 이게 칭찬일지) 영화 속 최종 빌런이었던 유지태는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고(이건 감독이 번호표의 폭력성을 좀 덜 잔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고), 사실 애초부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실감하기엔 오가는 단위가 너무 크기도 했고 말이다. 인물이나 전개나, 그냥 모든 게 적당 적당했던 영화랄까.

   

 

      영화는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을 다룬다. , 재물에 관한 욕망이다. 평범한 증권회사 직원이 수억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자, 그는 별 고민 없이 일에 뛰어든다. 돈이라는 게 누군가 벌면 누군가는 잃어야 하는 건데, (특히 그것이 뭔가를 만들어 제공해서 번 대가가 아니라, 일종의 도박적 성격을 띠고 있는 주식시장에서, 그것도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단타 매매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더더욱) 쉽게 말하면 누군가의 돈을 빼앗으면서도 고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한 인물이었던 것.

     흥미로운 부분은 그런 그의 무감각함을 깨운 것이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존본능의 덕분이었다는 점이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인 행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돈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기 때문에 번호표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해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번호표를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위협이 되었던 인물마저 처리하고 돌아가는 조일현의 모습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 속 주요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판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한지철이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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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법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에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들이 피지배자들을 마음대로 다스렸고, 법률은 그런 권력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곤 했다. (물론 최소한의 자연법을 따르는 원칙들은 존재했지만, 대개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됐다.)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귀족들에게 유리했던 법률이 보호하는 대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로 많은 재산을 지닌 이들이 새로 만들어진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게 만드는 길을 열어둔 것이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확립되면서 이제 법은 원칙적으로는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적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법이 공평치 않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이들이 소수의 특권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차적으로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고는 하나 국회의원들은 소위 당리당략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당 정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다시 일종의 권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다.

     적용부분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검사와 판사가 되어 법을 적용하는데, (비록 일부라고는 하더라도) 이들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최근 불거진 사법농단의 내막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법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상황에서라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배심원제다. 우리나라에선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첫 재판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호기심 많고 끼어들기 잘하는 권남우(박형식)가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의 누명을 풀어준다는 내용.

 

     ​상업영화다 보니 어느 정도의 상업적 코드(유머라든지, 인물들의 충동적 행동이라든지)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건 감안하더라도, 주인공은 지나치게 돌출적이다. 법원 내부를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관리자도 없는 피의자와 일대일로 마주친다는 게 말이 될까? 시종일관 감과 감정에 좌우되는 모습은 오히려 배심원제도에 대한 회의감을 주기도 하고..

     사실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반대하는 편에서 꺼내든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재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일부 법관들은 비슷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이 재판을 법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부각시킬 수 있는 재료로 삼으려고 한다. 그만큼 사건은 이미 법률적으로는 결론이 나 있는 상황이었고, 배심원들이 형량만 제안하면 법관이 그걸 적당히 고려하는 시늉을 하며 판결을 내린다는 시나리오.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일종의 약자의 반란, 반전 같은 느낌을 주니까.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경찰이나, 이에 대한 공소를 유지하는 검찰에서도 여전히 놓친 부분을 비전문가들이 찾아내는 일이 늘어난다면 꽤나 곤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만 영화 속에는 배심원 제도의 약점이나 한계점도 언뜻 보인다. 결과적으로 진상을 밝혀내기는 했으나, 특정한 배심원(주인공 권남우)은 어느 순간 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듯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아닐 것 같다는 심증으로 증거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데, 결과가 제대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단순한 동정심 같은 감정으로 사안을 그르치는 경우가 나온다면 낭패가 아니었을까.

     범죄자에게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인권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용서와 화해라는 가치는 매우 고귀하지만, 그건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강요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문제다.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인권 옹호자가 배심원이 된다면,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간다면 그건 제대로 된 사법절차의 일부일까. 게다가 여기에 모든 사람은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끼어들기 시작한다면? 배심원 선정제도는 이런 일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심원 제도는 시민 일반의 인식을 사법제도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제도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권위의식에 쩌든 법률전문가들은 간단히 그런 이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겠지만. 배심원 제도가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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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자 성룡이 맡은 배역의 이름이기도 한 포송령은 사실 실존인물이다. “요재지이라는 기담집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음양의 붓을 무기 삼아 요괴들을 퇴치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설정. 이렇게 보면 영화의 주인공인 포송령이 신나게 요괴들을 쫓는 내용인가 싶은데(사실 그렇게 가도 괜찮았을 텐데...) 감독은 여기에 섭소천과 연적하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인 천녀유혼을 섞어 넣었다. (사실 천녀유혼이야기도 바로 그 요재지이에 들어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주인공인줄 알았던 포송령은 천녀유혼 이야기와 뒤섞여 자리를 잃어버렸고, 포송령이라는 인물을 억지로 끼워 넣은 천녀유혼은 예전의 그 명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간소화되고 망가져버렸다. 사실 초반의 바다요괴 사냥 장면이나 포송령 주변을 포켓몬처럼 따라다니는 귀염성 있는 작은 요괴들만 보면 어린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판타지물인가 싶었지만, 천녀유혼의, ‘어른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걸 보면 또 그런 장르도 아니고...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캐릭터들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부분이다. 포송령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하는 식의 뒷방 노인처럼 등장하고(그 와중에 분장은 어찌나 잘했는지.. 나이에 비해 훨씬 젊게 나온다), 초반부터 움직이기만 하면 사고를 치면서도 시종일관 긍정적인 태도로 포송령의 제자가 되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 좋은 민폐 캐릭터도 한숨 유발, 심지어 요괴들조차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며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산으로 날려버리는 헛발신공을 보여줄 정도. 여기에 간소화되고 과장된 섭소천과 연적하의 이야기는 이제 그냥 사랑중독, 사랑 타령에 빠져 주변을 다 망가뜨리는 민폐커플로 보인다.

 

 

 

 

     과유불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뒤죽박죽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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