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법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에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들이 피지배자들을 마음대로 다스렸고, 법률은 그런 권력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곤 했다. (물론 최소한의 자연법을 따르는 원칙들은 존재했지만, 대개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됐다.)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귀족들에게 유리했던 법률이 보호하는 대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로 많은 재산을 지닌 이들이 새로 만들어진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게 만드는 길을 열어둔 것이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확립되면서 이제 법은 원칙적으로는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적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법이 공평치 않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이들이 소수의 특권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차적으로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고는 하나 국회의원들은 소위 당리당략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당 정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다시 일종의 권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다.

     적용부분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검사와 판사가 되어 법을 적용하는데, (비록 일부라고는 하더라도) 이들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최근 불거진 사법농단의 내막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법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상황에서라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배심원제다. 우리나라에선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첫 재판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호기심 많고 끼어들기 잘하는 권남우(박형식)가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의 누명을 풀어준다는 내용.

 

     ​상업영화다 보니 어느 정도의 상업적 코드(유머라든지, 인물들의 충동적 행동이라든지)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건 감안하더라도, 주인공은 지나치게 돌출적이다. 법원 내부를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관리자도 없는 피의자와 일대일로 마주친다는 게 말이 될까? 시종일관 감과 감정에 좌우되는 모습은 오히려 배심원제도에 대한 회의감을 주기도 하고..

     사실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반대하는 편에서 꺼내든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재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일부 법관들은 비슷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이 재판을 법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부각시킬 수 있는 재료로 삼으려고 한다. 그만큼 사건은 이미 법률적으로는 결론이 나 있는 상황이었고, 배심원들이 형량만 제안하면 법관이 그걸 적당히 고려하는 시늉을 하며 판결을 내린다는 시나리오.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일종의 약자의 반란, 반전 같은 느낌을 주니까.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경찰이나, 이에 대한 공소를 유지하는 검찰에서도 여전히 놓친 부분을 비전문가들이 찾아내는 일이 늘어난다면 꽤나 곤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만 영화 속에는 배심원 제도의 약점이나 한계점도 언뜻 보인다. 결과적으로 진상을 밝혀내기는 했으나, 특정한 배심원(주인공 권남우)은 어느 순간 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듯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아닐 것 같다는 심증으로 증거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데, 결과가 제대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단순한 동정심 같은 감정으로 사안을 그르치는 경우가 나온다면 낭패가 아니었을까.

     범죄자에게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인권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용서와 화해라는 가치는 매우 고귀하지만, 그건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강요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문제다.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인권 옹호자가 배심원이 된다면,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간다면 그건 제대로 된 사법절차의 일부일까. 게다가 여기에 모든 사람은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끼어들기 시작한다면? 배심원 선정제도는 이런 일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심원 제도는 시민 일반의 인식을 사법제도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제도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권위의식에 쩌든 법률전문가들은 간단히 그런 이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겠지만. 배심원 제도가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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