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만 3천 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남긴 인류 최악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 이 전쟁에서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새로운 전술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참호전이었다. 물론 참호 자체야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이 이 정도도 대대적으로 구축되고 오랫동안 그것을 발판으로 공방전을 벌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 영화 ‘1917’1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17(전쟁은 이듬해인 1918년에 끝났다), 참호전이 한창이던 독일군 서부전선(프랑스 지역이었다)을 배경으로 한다.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영국국 소속의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그의 친구 블레이크(-찰스 채프먼)가 통신이 끊어진 채 독일군의 함정으로 돌격하려는 부대에 사령관의 공격중지 명령서를 전달하러 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리는 작품.

 

 

 

 

     최근에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경과에 대한 두꺼운 분석서(몽유병자들, 1,000페이지가 넘는다)를 읽고 있는 중이라 자연스럽게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학술적 분석을 담고 있는 책과 한 개인적 용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는 그 성격이나 양상이 많이 다르긴 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려는 책임감과 적들이 몰려 있는 지역을 홀로 돌파해 나가는 용기를 그리는 영화 쪽이 훨씬 몰입감은 있었다.

 

     실감나는 세트와 전쟁 장면이 인상적이다. 특히 영화 전반부에서 가장 눈에 띈 참호씬은 압권이다. 진창과 시신들을 먹이삼아 모여든 쥐 떼들이 넘쳐나, 참호열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할 정도로 비위생적이었던 당시 참호에서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지 그 느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정보 프로그램에 따르면 약 1.6km 정도의 참호를 실제로 제작했다고 한다.)

 

     ​단지 배경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도 실감난다. 영화 후반,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 직전의 부대 분위기와 부대전술, 또 전선 투입을 앞두고 모두 숲 속에 둘러 앉아 한 병사의 노래를 듣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여기에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데 두 병사가 보여주는 개인전술에 기초한 움직임도 아는 사람은 눈에 들어왔을 듯(엄폐물을 찾고, 포복하고, 약진 등등).

 

 

 

 

     용기나 책임감 같은 덕목은 오늘날 점점 약화되어 가는 것 같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언제나 사람들이 과거를 더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염병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는 와중에서도 몸 좀 풀겠다며 클럽에 몰려드는 사람들이나, 얼토당토않은 선동에 휩쓸려 여전히 광장에 모여 가짜뉴스를 골백번 외쳐대는 이들을 보면 책임감, 연대의식 같은 게 있기는 한 건가 싶기도 하다.

 

     전염병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 세계에, 이런 덕목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며 자신은 계속 밖에 나가서 활동할거라는 미국의 한 여배우의 트윗이나, 영업중단 행정조치가 내려지기 직전 다들 쏟아져 나와 파티를 벌였더라는 유럽의 어느 나라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프랑스 혁명기 오합지졸이었던 혁명군이 이런 모양이었을까.

 

     하지만 또, 같은 시간, 다른 자리에서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더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대구의 다양한 자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의료진들이나, 도시락과 마스크를 보내는 시민들을 보면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사회를 유지시키는 건 이런 책임감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신보 아키유키 감독, 스다 마사키 외 목소리 / 알스컴퍼니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후회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좀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생각보다 오래 남아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그 후회를 하게 만든 결정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될까.

 

     ​이 작품에서 주인공 노리미치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마을의 불꽃 축제를 앞둔 어느 날, 엄마의 재혼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나즈나는 심란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노리미치에게 그날 저녁 축제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려 한다. 그러나 수영시합에서 노리미치가 아닌 유스케가 이기면서 유스케에게 신청을 하게 되고, 유스케가 그런 나즈나를 바람맞히면서 일은 어긋난다. 가출을 감행하려던 나즈나는 그렇게 엄마에게 끌려가고, 그 순간 노리미치는 나즈나가 떨어뜨린 신비한 구슬을 던지면서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번엔 수영에서 이기고 나즈나에게 축제에 가자는 말을 듣게 된 노리미치.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주저주저 하는 사이 몇 번이나 나즈나는 집으로 끌려가고, 노리미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즈나와 함께 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노리미치.

 

 

 

 

     어떻게 보면 첫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순한 학원물로 보인다.(실제로 영화 포스터 중 하나의 문구도 그런 식이다. ‘첫사랑은 타이밍이다같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에서도 말했던 후회라는 키워드가 좀 더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 노리미치는 나즈나와의 관계를 진행시키면서 수많은 후회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얻었지만 좀처럼 후회의 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또 다른 후회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야 상영시간이라는 제한 속에서 이런 후회의 사슬이 어느 시점에서 멈춰야했지만, 실제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노리미치는 또다시 수없는 후회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그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과거 어느 한 순간에 내린 결정에 온전히 메여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실은 수많은 선택과 행동이 조금씩 쌓여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구축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어느 한 가지 선택을 바꾼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과거의 후회되는 선택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굳이 타임 패러독스와 같은 것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재를 바꾸기 위한 그 목적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정말 그걸 바란다면, 몇 번의 선택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내리는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바꿔낸 현실은 결국 뭔가 조금씩 비틀린 모습일 듯도 싶고. 어쩌면 영화 속 노리미치가 마주한 세상 속 불꽃의 독특한 모습들(평평하게 터지거나, 꽃잎 모양이 되거나)은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결말이 좀 아쉽다. 이야기가 충분히 마무리되지 못한 느낌인데, 감독의 고민이 충분치 못했다고 할 수도 있고, 이 정도의 동화 같은 마무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을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일반판
웨스 앤더슨 감독, 에드워드 노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20세기 초반, 주브로브카라는 가상의 국가(배경으로 볼 때 알프스 근방이 아닐까 싶은)의 유명한 호텔인 그랜드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벌어진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비주얼적인 부분인데, 온통 분홍빛으로 장식된 호화 호텔과 호텔 직원들의 보랏빛 목장들, 그리고 하얀색 눈으로 가득 한 세상 등 눈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 파시즘군대에 징발당해 새롭게 장식된 호텔에는 치명적인 검은색과 핑크색으로 디자인 된 ZZ(아마 나치의 SS기를 패러디한)가 장식되어 있다. 과장된 색인 핑크(와 그 어두운 버전인 보라)를 사용해 이야기의 분위를 붕 띄우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두 주인공인 호텔 총 지배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스)와 갓 로비 보이로 들어온 제로(토니 레볼로리)의 조합도 흥미롭다. 호텔과 마찬가지로 과장된 성격의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연극처럼 만드는 효과를 준다. 여기에 나이는 어리지만 구스타브에 비해 훨씬 침착한 조제가 따라다니며 살짝 가벼운 무게추처럼 분위기를 잡아준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서구식 다크 코미디가 짬뽕되어 있다. 문득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포인트들인데, 박장대소를 하게 만드는 유쾌함과는 살짝 거리가 있어서 호불호가 좀 갈릴 듯. 살인사건과 킬러의 등장으로 좀 잔인한 장면도 있고

 

     가장의 배경에서 가상의 인물들이 조합해 나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그 중에서도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인 데다가 처음부터 과장된 진지함으로, 도리어 너무 진지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냥 가볍게 보고 즐기면 되는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는 하기 싫고, 엄마의 잔소리도 듣기 싫어 무작정 집을 나와 버린 택일(박정민), 우연히 군산의 한 작은 중국집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일견 조금 무겁게 진행될 것 같은 분위기지만, 택일이 중국집에서 만난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이 등장하는 순간 확 바뀐다. 그 우람한 덩치에 곱게 단발머리를 하고 등장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어떤 분위기로 진행될 지가 딱 보인다. 이건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코미디다.

 

     덩치답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왠지 쪼잔한 모습을 풀풀 풍기는 거석에게는 뭔가 숨겨진 과거가 있어 보였고, 거의 예상했던 그대로의 그림이 풀려 나온다. 거석과 택일, 그리고 중국집 식구들이 투덕거리는 게 영화에 웃음을 주는 주요 요소인데, 그 핵심은 우람한 덩치에 소녀 머리를 하고 있는 마동석 캐릭터에 있다. 그러니까 비주얼로 끌어내는 매우 단순한 웃음이란 거.

 

 

 

 

     문제는 이 캐릭터가 워낙에 강력해서, 정작 주인공 격인 택일이 오히려 묻혀버린다는 점이다. 택일이 겪고 있는 고민은 물론 작은 고민은 아니지만, 또 따지고 보면 그냥 엄마랑 싸우고 집 나온 철부지 수준인데다, 하는 짓도 그리 귀엽지도 않다. 애초에 공감이나 몰입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캐릭터였고, 더 강력한 캐릭터도 바로 옆에 있으니....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니, 생긴 것 가지고 웃기려는 모습이 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심지어 영화에는 또 다른 상투적 코드인, “착한 조폭 해결사 법칙도 등장한다. 엄마가 사채업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택일은 간절히 거석이 형의 도움을 요청하고,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반응하던 그도 서둘러 와서 해결해 주는 것. 도대체 우리나라 조직폭력배는 경찰보다 우수한 정의구현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산만한 감이 있다. 택일의 친구인 상필(정해인)이 아는 형의 소개로 사채업 말단으로 들어갔다가 벌어지는 사고들, 갑자기 나타난 빨간 머리 소녀의 이야기 등은 약간 갑작스럽고, 다른 이야기들과 따로 도는 느낌이다.

 

 

 

 

     유쾌한 소동 정도를 기대하고 보기 시작했다면, 예상보다 작은 소동과, 어디선가 봤던 듯한 뻔 한 장면들의 연속, 마동석 캐릭터 하나에만 기대고 있는 허술한 구성 등으로 살짝 실망할 것 같은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종 시대는 각종 과학기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해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그 모든 발전이 오직 장영실이라는 천재적인 인물 혼자 이뤄낸 것은 아니고,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나선 결과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장영실이니...

 

     근래에 세종과 관련된 작품들이 자주 보인다. 한글의 창제자로서의 면모를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번에는 장영실을 주인공의 차원으로 올렸다. 정확히는 세종과 장영실 사이의 브로맨스를 그린 영화라고 할까.

 

 

 

 

     소재는 바뀌었지만(한글에서 천문관측으로), 여전히 구도는 비슷하다. 세종(과 장영실)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어주고자 애쓰지만, 명분론과 사대주의에 쩌든 완고한 신하들은 이를 반대한다. 결국 장영실이 명나라로 끌려가게 되는 상황에 몰리고, 세종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린다. 매우 익숙한 그림.

 

     ​실제 역사서에도 장영실은 천민 출신으로 제법 높은 지위까지 올랐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다. 감독은 이 빈자리를 가상의 이야기로 채워 넣으면서, 세종과의 친밀한 인간적 관계를 엮어 넣는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물론 실제로 그랬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 사람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면서, 나머지 인물들과 갈등은 너무 단순화되어 버렸다. 인물들은 입체감이 부족하고, 언뜻 보면 그냥 로맨스영화인가 싶을 정도.

 

 

 

 

     많은 것들을 잘라내고서 세종과 장영실 두 사람에게 집중하면서 감독은 어떤 걸 제안하려고 했던 걸까. 세종대왕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장영실의 세종에 대한 충성(혹은 애정)은 진심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보았던 조선의 하늘은 아름다웠다? 이야기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풀어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