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미래 - 종교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필립 젠킨스 지음, 김신권 외 옮김 / 도마의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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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에 대해 현대인이 가지는 이미지는 

대개의 경우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유대교나 이단에 대해 가혹했던

성직자들의 세속 지배, 신정국가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중세의 상당한 기간에 세계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 통치자들 아래에서 소수파로 살아야 했다.

 ……

중세에 자주 나타났듯이, 기독교인은 세련된 도시인이라기보다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었다.

 

1. 요약 。。。。。。。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점차 쇠퇴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쇠퇴할 종교이다. 하지만 저자는 각종 통계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지구 남반부 전역(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에 걸쳐 기독교 인구의 대대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향후 세계 기독교에 관한 고전적 이미지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주류’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흐름’이라고 정의할 때,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주류’ 기독교는 남반구의 강렬한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열정적인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흐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충돌들’에 대해 설명한다. 남반부의 교회들은 그들의 오랜 신앙들(이를 테면 정령신앙과 같은)의 여러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미 등지에서는 교회가 매우 강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모습들을 세속화되고 학문화된 서구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기독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반부에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급격한 증가는 단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또 다른 주요 종교로서 이슬람교도 있다. 특별히 높은 인구증가율을 가진 국가들에 있어서 이 두 종교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서구의 예측과는 다르게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기보다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때문에 저자는 미래 사회의 중요한 분쟁들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아울러 지적한다. 


2. 감상평 。。。。。。。

 

 

     이 인구통계학에 근거한 학술적인 책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전세계의 종교인구의 추이에 대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서구와 유럽인의 종교, 제국주의적 종교라고 적대시하는 어떤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기독교는 그 태동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적이었으며,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 자체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이 맞닿는 지역이기에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만, 사실 그동안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점이기도 하다. 초기부터 기독교의 중심지는 안티오크였고, 알렉산드리아였으며, 바빌로니아에도 제법 큰 교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한 가지 주요한 사실은 세계적으로 기독교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는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인구증가율이 매우 높은 나라들이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적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럽 등지의 기독교인은 줄어들겠지만 대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기독교의 중심이 더 이상 유럽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책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늘어나고 있는 남반구의 신생 교회들의 성격은 기존의 교회들의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도 가벼이 넘기기 어려운 부분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아 대부분의 공동체를 포괄시키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좀 더 작은 이유로 분열되기도 하고, 사실 생각이라는 것에 금을 긋는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엄청난 변화에 대한 이 책의 지적은 비단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만이 아니라, 종교적, 영적 차원에 무관심한 이들도 함께 귀담아 들을 만 한 내용이다. 이 책의 지적이 옳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미래는 종교를 무시하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던져줄 것이다. 우리는 이 ‘신의 미래’에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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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독설
김진호 지음 / 삼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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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언제부터인지 ‘축복’, ‘천당’ 운운하는 이런 신앙이나 서로 얘기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복권추첨일 기다리듯 보내왔고,

그러는 동안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절대권력의 추구자가 되어버렸다.


 

1. 요약 。。。。。。。

     예수를 모든 종류의 일상적 권위에 대항해 적대적인 운동을 벌인 인물로 설정하고, 그 관점 아래 복음서의 여러 사건들을 재조명한 책이다. ‘역사적 예수 운동’의 한 지류이자 그 한국적 적응 모델 중 하나인 ‘민중신학’에 신학적 기원을 두고 있는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기존 교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연히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2. 감상평 。。。。。。。

     자유주의 신학이란 한 마디로 이성 중심의 신학, 모든 것이 이성적 사유 과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만들어진 신학이다. 이성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데,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발생된 것으로, 이런 면에서 이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신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 운동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생각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실제로도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고, 자연히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기적적인 일들은 믿을 수 없는 것들, 나아가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꾸며 넣은 것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예수 운동’은 그렇게 성경 편집자가 꾸며 넣은 것들을 배제하고 원래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추론해 보자는 나름 건실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0년 전 예수의 모습에 관한 정보는 사실상 현재 남아 있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나아가 그것을 보존해 온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서 밖에 알 수 없는데, ‘교회의 예수’ 말고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필경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남겨둔다는 선별작업이 필요하지만, 이 선별작업 역시 그 때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 기준에 근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의 생각에 맞는 모습만 남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ex. ‘캘리포니아의 예수’)

     민중신학도 그런 역사적 예수 찾기 운동의 한 지류로, (마치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6, 70년 대 한국의 독재 시대에 맞는 예수상(像)을 찾는 데서 만들어진 신학 조류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 운동’이 갖고 있었던 문제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진짜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를 찾기 보다는 오늘날 연구자의 상황에 맞는 예수의 모습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민중신학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 버린다. 현대인의 눈으로 읽어낸 성경(혹은 예수)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강변이다. 오히려 그런 해석만이 진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읽는 올바른 역사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심하게 말하면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저자는 결국 이 책을 통해 현대인의 눈에’만‘ 맞는 예수를 창조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그러한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히 민중신학도 한국 교회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 안에는 권위와 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억압당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며,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해 잊지 않도록 해 주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힘’에 대한 동경 아닌가.


     나아가 성경 텍스트에 관한 극단적 관점에서의 재단은 요셉을 혁명전사로 만들고, 마리아를 로마 군인에 의해 사생아를 갖게 된 여인으로 전락시키는 정도다. 말로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재구현 하겠다지만, 그 기본적인 사료가 되어야 할 복음서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증거는 거의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기초로 역사적 예수를 구현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경 텍스트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오늘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예수의 모습밖에 남는 것이 없다.

     저자는 민중을 압제하고 폭압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을 향한 예수의 독설을 쓰고자 했으나, 결국 나온 것은 (그나마 무엇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고 여기는) 예수의 입을 빌린 저자의 독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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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 밖에서 예수를 못 찾는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어디서 예수탐구에 대해 몇 마디 좀 주워듣고선 이런 글이나 쓰는지.

2017-10-28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의 다양성이 합의점이 없음을 말하는게 아님.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는 차이들을 과장하지 마시길.

2017-10-2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학자들중 일부나 복음서를 역사문서로 취급함. 중립적인 종교학의 경우에는 그런 주장은 처음부터 먹히지도 않고. 그런걸 감안하지도 않으면서 뭐가 어쩌니 저쩌니.

2017-10-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민중신학 자체를 비판하면 모르겠는데, 역사연구 자체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니 이건 뭐 봐주기도 힘듬.

2017-10-2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맛에 맞는대로? 자연과학 정도를 빼면, 입맞에 안 맞는 연구가 어디있는데? 보수기독교인들도 지들 입맛에 맞는 소리만 하잖아. 결국 차이는 입맛이 아니라 얼마나 합리적이냐 차이임. 보수 신학자들은 그걸 못함.

2017-10-2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진짜 예수상이 뭔지는 몰라도, 전통적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예수 모델은 현존하는 다른 어떤 모델들보다 설명력이 떨어짐. 즉,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최소한
교회 모델을 받아들이는 입장보다 합리적임.

2017-10-2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양비론이 왜 역겨운 입장이냐면, 현실적인 대안 제시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편도 선택을 못하기 때문임. 교회의 예수론은 끝났고 다른 대안들만 남았음. 그 대안들을 비판한다고 죽은 옛날 예수론이 돌아오진 않음. (역사연구를 포기하고 지금 가진 자료로는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말하면 모를까.)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1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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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불신을 중단하고, 내가 진짜 예수인 것처럼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예수가 실제 앞에 있다면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1. 줄거리 。。。。。。。   

 

     어느 날 낯선 초대장 하나가 도착했다.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내용의 초대장. 의심스런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파티라도 있는 줄 안 닉은 약속된 자리에 나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웬 모르는 남자 한 사람만 앉아 있었고, 황당하게도 그는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한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려고 생각도 해봤지만, 뭔가 다른 게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사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와의 저녁식사'. 어린 시절 부모의 강요에 의해 교회에 잠깐 '다녔던' 닉은, 예수와의 식사를 하면서 종교의 문제에 관해 오랜만에 나름대로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가 가짜라는 확실 아래 잇따른 질문을 퍼붓는 닉과, 차분한 대답과 때로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예수의 저녁식사.

 

2. 감상평 。。。。。。。 

 

     재미있는 설정이다. 20세기 어느 날 예수를 직접 만나, 현대식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예수님은 정말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오실까? 또, 그 식사 시간에는 어떤 대화들이 오고갈까? 저자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재미있는 설정을 제시해 독자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책의 진행 순서는 서양식 식사의 순서를 따라간다. 메뉴를 살피고, 에피타이저와 샐러드를 먹고, 메인코스와 디저트를 먹는 순서에 따라, 대화의 무게감도 달라진다. 여러 가지 대화의 주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고른 다음, 가벼운 것들로부터 점차로 진지한 주제로 진행해 나간다. 멋진 구성이다.

 

 

     책은 얼마 전 읽었던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와 유사하다. 저자는 ‘예수’의 입을 통해 기독교가 믿을만한 종교라는 것을, 또, 기독교를 믿는 일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는 한 가지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등장 인물인 예수의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불신을 중단하고, 내가 진짜 예수인 것처럼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예수가 실제 앞에 있다면 묻고 싶은 게 있지 않나요?”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약점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중립지대'에서 기독교에 관해 토론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중립지대'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기독교에 동의를 하던지, 반대를 하던지 둘 중에 하나가 아닌 다른 쪽에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립지대로 가려면 믿음의 자리에서 불신으로, 불신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각각 자리를 약간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엄밀한 중립은 될 수 없다.(이런 의미에서 아예 상대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에 서게 해 두고, 점차 그 입장을 누그러뜨리도록 유도하는 C. S. 루이스의 책이 한 수 위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중립지대'에서 대화를 하고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의 입장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논리적 부정확함이 이 책의 가치를 아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모든 부분을 다루지는 않지만,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매우 쉽게, 그리고 재미있는 형식을 사용해 잘 설명하고 있다. 볼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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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모던 클래식스 3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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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특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안전을 확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정한 안보에 이르는 길은 정의다.

 

1. 요약 。。。。。。。 

 

     저자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종교’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회피적 종교와 형성적 종교가 그것. 특별히 기독교 안에서도 이 두 흐름이 발견되는데, 중세 기독교와 종교개혁 이후의 루터교 일파는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회피적(내세 지향적) 종교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칼뱅주의로 대변되는 개혁주의자들은 세계 형성적 종교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자 한다. 저자는 개혁주의자의 후예로서 현대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관해 논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 세계는 빈부격차의 문제, 근시안적 민족주의로 인한 문제, 도시환경에 있어서의 무질서 등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저개발 국가들을 ‘주변국가화’ 시키고 있고, 강자들은 약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샬롬 중심적 세계관’을 그 대답으로 제안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개혁자와 비 그리스도인 개혁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둘 모두 사회의 ‘개선’ 혹은 ‘선의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독특함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 독특함을 예배에서 찾는다. 단순한 예전이나 교회 밖의 삶을 위한 주유소쯤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함을 접촉하고, 그분으로부터 기쁨과 안식을 얻을 때 정의와 샬롬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2. 감상평 。。。。。。。

 

     우리나라처럼 좌우의 갈등이 첨예한 나라도 많지 않으리라. 슬프게도 기독교 안에도 이러한 갈등 혹은 구분이 존재한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조금이라도 비판할라치면 단숨에 좌파니 뭐니 하는 비난을 해대고, 하나님의 주권이나 영혼구원을 강조할라치면 보수니 우파니 하며 단정 짓는다. 인간 영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과 개혁을 말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주변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런 미심쩍은 비난과 지적을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철학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저자는 소위 보수 쪽에 속하는 개혁주의 혹은 칼뱅주의 안에 이미 세계 변혁적인 비전이 담겨져 있음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신학적 전제에 충실할 때, 그들은 이 세계에 정의와 샬롬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참 매력적이다. 내 평생의 작업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으니까.

 

     슬픈 현실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지 20년이 훨씬 더 넘었음에도, 책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세계는 강대국들이 설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인종적 갈등과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사회의 변화를 올바로 집어내지 못하고 그저 번영과 강자를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있으니 심각한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많은 비난이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기인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세계 형성적 기독교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시키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형성해 놓은 이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종종 그 자체로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기독교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가져야 할 비전은 훨씬 더 크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모두 시야에 넣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성경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사회참여에 관한 고전이라는 책 소개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세상을 품는 큰 꿈을 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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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9-03-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 저도 공감합니다.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
지금 페이퍼를 쓰고 있는데.. 블로그에 관한 페이퍼인데요.

과연 블로그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결국' 장기적인 운영을 하게 될까요..??
주인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뜬금 없는 질문 죄송합니다. ^^

노란가방 2009-03-23 13:42   좋아요 0 | URL
블로그 운영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우선 저 자신을 위해 블로깅을 하는 터라
누가 보든 안 보든 그냥 쭉 운영할 것 같구요..
다른 무슨 목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목적이 잘 될 때야 계속 운영하시지 않을런지..
 
예수와 함께한 가장 완벽한 하루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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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예수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간 닉.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이 책에 그에 관한 후기가 살짝 등장한다. 평소 일중독에 빠져 살았던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딸을 위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나님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정기적으로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이제 만사가 행복하게 끝나게 된 걸까?

     하지만 그의 아내 매티는 남편의 이런 변화가 마뜩치 않았다. 종교라면 질색을 하는 그녀는 남편이 갑자기 ‘예수쟁이’가 된 것을 두고 당황했고, 마침 부업으로 하던 디자인 일과 관련해 출장을 가게 되면서 그와의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 때 슬그머니 나타난 옆 사람 제이(J). 늘 그렇듯 그는 관심 없는 듯한 마디를 툭 던져 상대의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차근차근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화를 마칠 때 즈음 매티는 이미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된다.



 

2. 감상평 。。。。。。。

 

     전작인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의 후속편이자 내용상으로도 후편에 해당하는 책이다. 종교에 대해 썩 탐탁지 않게 여기던 주인공이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이야기다. 잘 설득하면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 있다는 환상.

     하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중요한 논리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믿지 않는 사람도 깊이 생각하면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하면 기독교의 설명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즉, 중립의 위치에서 사고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발을 믿는 쪽에 두어야 이야기가 되는, 그런 책이다. 불신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 신이 없다는 가정 아래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그렇다고 이러한 약점 때문에 이 책이 쓸모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내 생각에 이 책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데보다는, 이미 어느 정도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을 때 추천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가정 문제, 개인적인 상처들, 외식화 된 교회생활로 인해 받은 생채기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 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에 언급된 것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좀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물론 전작을 읽고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궁금한 사람도 읽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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