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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1. 요약 。。。。。。。
중앙등기소의 보조 서기원으로 25년 간 근무해 온 주제 씨. 매일매일 똑같은 서류작업과 엄격한 위계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중앙등기소에서, 딱히 눈에 띄는 점도 없이 등기소 옆에 딸린 집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제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 인사들에 관한 신문 기사를 모으고, 등기소에서 그들의 등기문서를 옮겨 적는 수집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유명인사의 등기기록을 가지러 가던 중 우연히 떨어진 한 여인의 기록이 곧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이제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탈들이 시작된다.
2. 감상평 。。。。。。。
우연히 보게 된, 전혀 일면식도 없는 여인의 삶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제 사람들이 더 이상 유명인보다는 보통사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에도 소위 ‘일반인’들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고, 모든 환경을 사전에 제어해 놓은 각본 있는 드라마보다는 소위 리얼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직은 여전히 유명인들의 사생활이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제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같은 대체(혹은 서브급의) 매체들에서는 일반인들의 삶에 더 주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리고 문화의 흐름을 보면 이제 곧 이런 서브 문화가 메인 문화화 되어갈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요새도 유명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을 캐내 팔아먹는 사생활 장사꾼들이 넘쳐난다.(그러다 물의가 일어나면 ‘공인이 감수해야 할 일들’이니 하는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거나 자기들이 무슨 신성한 언론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투사인 양 위장하기도 하지만, 결국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생활을 팔아 돈벌이를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앞서와 같은 일반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파헤치기가 결합되면 얼마나 음습한 결과를 초래할 지.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딱히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의 삶을 파헤치고, 사회적으로 발가벗겨 드러내는 것이 대중적인 오락프로그램의 한 주요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이 집단적 관음증을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마저도 파괴시켜버리고 말 것이다.(소설 속 주제 씨의 삶이 망가져갔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비정상적일 정도의 과도한 관심을 쏟는 사회는, 이웃을 아예 모른 척 하는 극단적 개인주의화 된 사회만큼 치명적이다. 후자가 모든 이들을 극도로 고립되도록 만들어 결국 사회 전체의 연대감을 상실시켜 해체로 이끈다면, 전자는 개인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사회,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일반화된 사회, 그래서 결국 개인이 사라지고 전체만 남도록 만들어 또 다른 의미의 해체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뭔가 - 그것이 단지 개인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일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든-를 얻는 것은 (중앙등기소 보조 서기원 같은) 쥐꼬리 만한 권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전체주의는 그 ‘전체’ 속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몇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을 몰아주는 법이다.
현 정권 들어 기무사나 총리실 산하 기구가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불법적 사찰을 감행했다는 것이 드러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단순한 취미와 개인적 기호를 위해 조사를 했던 주제 씨와는 달리 이런 식으로 권력기관이 목적을 가지고 한 조직적인 사찰은 한 개인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을 수도 있기에 더욱 비열하다 하겠다.
한편 작가의 잘 팔렸던 전작들에 적당히 얹혀서 홍보와 판매를 해 보려던 출판사의 유치한 전략은 실망스럽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라니.. 작가를 아주 건축공학 전공자로 만들 셈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나 ‘눈뜬 자들의 도시’와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작품인 것처럼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지만, 원제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다.
※ 저자 자신은 작품을 통해 이름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그것이 실제로 가리키고 있는 것의 관계, 즉 소위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주인공인 주제가 저지르고 있는 불법적 조사는 처음부터 그런 쪽의 긍정적인 감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끊어놓은 듯 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