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 조수석 앞 수납공간에는 비닐장갑이 한 상자 들어있다.

차량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비를 하려고 둔 건 아니고,

(그럴 목적이라면 면장갑을 두는 게 맞다)

이곳 화천에서 살기 시작한 지 일 년 쯤 지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챙겨 가지고 다니게 된 아이템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두고 보면 이곳 화천은 동서의 중간지점,

거기에서 북쪽으로 불쑥 올라간 곳에 위치해있다.

(위도 상으로는 개성보다 위쪽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있는 곳은 최전방 휴전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

살고 있는 사람들의 90%는 군인이고,

면회객들을 제외하고는 유동인구랄 게 거의 없는 동네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군부대들이 많다보니 따로 개발이 된 곳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엄청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 합쳐보면 동물들이 살기에 딱 좋다 싶은 곳.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생활 한 지 2년 동안

평소에는 보지도 못한 야생동물들을 잔뜩 보고 말았다.

이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은 고라니.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키기 일쑤고

눈이 많이 온 밤엔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면

주차 해 둔 내 차 주변을 한 바퀴 삥 돌고 간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멧돼지도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길가다 한두 번 마주친 적도 있지만,

주로 GOP 지역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큰 놈은 2m 가까이 되는 것도 있다.

그 외에도 도시에 살 때는 볼 수 없었던

산토끼, 너구리, 가재, 매, 독수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새들이

사시사철 사방을 뛰어 다닌다.

(꿩들은 아예 차가 지나가도 피하지 않고 고개만 돌릴 정도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살고 있는 곳에 사람들도 살기를 원했다는 것.

사람들이 오고가야 하니 길이 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길은 점점 더 넓어진다.

거기에 석유에서 뽑아낸 시커먼 덩어리로 땅을 다져놓으니,

이 녀석들이 움직일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녀석들이니 꽤 익숙해졌을 테지만

그래도 그 시커먼 길 위를 빠르게 지나다니는 쇠붙이들은

여전히 큰 위협이다.

 

내가 비닐장갑을 차에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녀석들 때문이었다.

일이 있어서 읍내를 오고가던 중 미처 달려오던 자동차를 피하지 못해

길에 쓰러져 죽어 있는 동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걸 봐 버렸다.

굳이 동물들의 사체를 밟고 다니는 운전자들은 없겠지만,

빠르게 다니다 보면 필히 이리저리 치이는 사체들이 나오게 된다.

그 후 급한 일이 아니면 최소한 길 한 쪽으로라도 치워주어야겠다고 결심한 것.

 

 

첫 번째로 수습하게 된 것은 고라니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죽지 않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새끼를 밴 상태였는지 사고의 충격으로 핏덩이가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녀석이 의식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었겠지만,

그 녀석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물론 동물들 다니는 곳에 길을 냈다고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도로라는 게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지간해서는 쓸 데 없는 곳에 나지는 않는 법이다.

(물론, 이 나라에선 상상치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게 일상이지만)

더구나 여기에 있는 많은 군부대들을 생각하면

왕복 2차로라는 길은 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사람의 편의를 위해 길을 냈다면

동물들의 편의도 조금쯤 생각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

또.. 그렇지 못해서,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혔다면

함께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조금쯤은 예의를 표해 달라는 건

지나친 부탁인 걸까.

(뒤에 들은 말인데 그렇게 사고로 죽은 고라니가 발견되면

식당에 팔기 위해 금방 누군가가 와서 수거해 간다고 한다.)

 

오늘도 여전히 내 차엔 비닐장갑이 실려 있다.

그 자리에 장갑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으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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