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라는 금속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대중적이다.



잘 세공된 은 장식품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은 자체가 우선 보석의 한 종류인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화폐경제가 시작된 중국에서도
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초적인 화폐로 사용되곤 했다.
조개껍데기가 아닌 은을 화폐로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귀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고대 그리스의 격언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 격언에는 한 문장이 생략이 되어 있다.
그 전문(全文)은 이렇다.
‘침묵은 금이다. 그러나 웅변은 은이다.’
이 말을 했던 이는 그리스의 한 웅변가였다.
왜 웅변가가 말을 금이 아닌 은에 비유했을까?
그것은 이 말이 사용될 당시 그리스에서는

금보다 은을 더 귀중하게 여겼었기 때문이다.
‘은’은 그만큼 옛부터 귀중하고 고급스러운 금속이다.

 

 

 

반면, 은의 대중성은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의 절대적인 가치가
여타의 보석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진데서 기인한다.
이제 은보다는 금이 훨씬 더 고가에 거래가 된다. 

가난한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는 그림에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는 왠지 어색하다.
얇은 은가락지가 어울리는 조각인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에 은이라는 보석은
대중성이라는 이미지 또한 품고 있다.

 

 


 

고급스러움과 대중성이라는
두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은’.
어쩌면 ‘은’의 이런 이중적인 이미지는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은색’이 가지고 있는
다중적인 이미지를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은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특성이 결정된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이런 질문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도 쓸 말이 좀 있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난 주저없이 은색이라고 대답하는데,
대부분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어쩌다가 그런 색을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투다.
질문자들이 준비해놓은 선택지에는
여간해서 은색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자의 그런 당혹감(?)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긴 하지만
그런 반응을 구경하기 위해 은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은이라는 금속이 그렇듯이,
은색도 제법 여러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은색’하면 가장 흔히 떠오르는 생각인 ‘차가움’이다.
아마도 은색이 대부분의 금속들이 띄고 있는 색이기 때문에,
은색이 그런 금속 특유의 차가움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형광등이나 달빛이 칼날에 반사가 되어 빛나는 장면을 그려보면
좀 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그런 금속성의 은색은 왠지 냉정함과 냉혹함
(둘 모두 ‘냉(冷)’자가 들어간다),
혹은 날카로운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은색에서 광택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까.
은색을 차갑게 만드는 형광등이나 달빛으로부터
그런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옮긴다던가,
아니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산화)하여
빛을 잃은 은색.
극단적으로 말해 그런 은색은 사실상 회색처럼 느껴진다.
마치 콘크리트처럼 무겁고, 느릿하고, 어두운 색 말이다.
좀 전에 느껴졌던 날카로움은 한없이 무뎌지고,
차가움은 우울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럴까.
빛을 빼앗긴 은색은 슬퍼보인다.

 

 
차가움과 우울함.
아직 은색에게는 반전이 하나 남아있다.
은색은 ‘따뜻함’도 발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은색을 그렇게 만들까?
역시 ‘빛’이다.


은색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형광등이 아닌 백열등을 이용해야 한다.
이왕이면 하얀색보다는 붉은 빛이 도는 전구가 좋다.
아예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데 사용하는
색색의 반짝이는 줄로 이어진 꼬마전구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이번에 나오는 은색은 사실 그 트리에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큰 은색 별, 종, 공들.

이런 것들은 은색이 발산하는 따뜻함을 담고 있는 물건들이다.

 

 

은색이 담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
차가움, 우울함 혹은 슬픔, 따뜻함.
내가 은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색 안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색이 은색처럼 풍부한 이미지를 함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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