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 이슬람은 전쟁과 불관용의 종교인가 고정관념 Q 9
폴 발타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물론 유럽은 자신이 아랍-이슬람 문명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개 국어를 구사하는 시리아의 학자들 덕분에,

‘중세 암흑기’ 동안 유실되었던 텍스트들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남아 있기 때문이다.

 

 

1. 줄거리 。。。。。。。

 

     웅진지식하우스의 ‘고정관념 Q’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제목대로 이슬람에 대한 몇 가지 ‘고정관념’을 풀어주기 위해 쓰인 책인데, 저자가 프랑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워낙에 이슬람에 대한 무지가 일반적인 상황이어선지,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 많았다.

     저자는 크게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대성이라는 항목으로 나누어,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책에 써 놓은 것처럼 ‘이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직성 ․ 부동성 ․ 불관용의 총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감상평 。。。。。。。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가장 많은 오해와 공격(그리고 고정관념?)의 대상이 된 것 중 하나가 ‘종교’다. 사실 고정관념이라는 게 너무 익숙하거나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기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던 유럽-미국 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가 그대로 나타나서 기독교에 대한,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각보다 많다. 9.11 테러 후 아랍계 미국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은, 꽤나 교양인인 척 하는 그들도 사실은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보통 사람들임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 듯싶다.(아마도 이슬람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부족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혹 텔레비전을 통해 등장하는 ‘호전적’ 모습이 전부니까.)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이슬람이 생각보다 ‘호전적이지 않다’는 데 중점을 두고 내용을 진행한다. 사실은 이슬람이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라는 식의 설명.. 하지만 물론 그런 모습이 이슬람의 전부라는 순진한 생각은 옳지 않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한 편견이 아닐까. 실제로 이슬람 사회를 주도하는 주요 세력 중 한쪽이 그런 강경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가능한 이슬람을 ‘변호’해 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건 어느 정도 저자와 교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 내 침묵하는 이슬람교도’들과 많은 교집합이 있는 설명이고, 당장에 극우파들에 의한 직간접적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잘 안 통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주요한 정보는 이슬람 사회 안의 다양한 분파들과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관한 부분이었다. 전에 『마호메트 평전』과 그 저자후기를 읽으면서 처음 접했던 부분이지만, 특히 ‘이슬람 통일의 신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수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편, 저자는 오늘날 이슬람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의 원인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이슬람교도들 때문이라고 몰아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서구식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의 최악의 결과는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사람이 윤리학 박사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낳은 것이다.

     사실 “종교는 개인적인 것일 뿐이고, 공적 토론의 영역에는 나오면 안 된다”는 신념 자체가 유물론적 무신론에 기초한 하나의 거의 종교적 문구라는 점을 저자는 간과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가 일으키는 문제’의 상당부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역역의 분리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어나기 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공적인 차원에서 불법적 행동이나 비윤리적 행동을 일삼는 것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분리’가 아니라 ‘통합’이나 ‘조화’에서 찾는 것이 옳다. 물론 그것은 ‘정교일치’나 ‘특정 종교의 국교화’나 ‘강제적인 종교이식’과 같은 모양은 아니다.(그런 것은 ‘통합이나 조화’ 대신에 ‘통제와 억압’이라고 불려야 한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가치와 영향력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만들어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한국교회의 50% 이상이 서해안 기름유출 자원봉사에 직업 다녀왔다는 통계자료와, 여전히 사회복지시설의 상당수를 종교기관에서 운영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말한 ‘프로슈머’의 대표적인 예가 여기에 있다!), 이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결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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