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급실에 가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슬픔이라는 강렬한 자극을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순종과 인내이다.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야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침대에 시트 한 장 없이 누우라고 해도 누워야 한다.
굵고 뾰족한 금속 바늘은 그 자리에서 대여섯 번씩 팔에 찔러 넣어도,
환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몸을 움찔하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반항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순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들은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재판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형량이 달려 있는 것처럼,
자칫 실수로 그의 비위라도 거스리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 처럼,
의사의 말에 집중한다.
뿐만 아니다.
응급실에서는 인내 또한 중요한 미덕이다.
몇 번씩 찔러댄 결과로 얻어낸 피 검사를 하는데도 족히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곧바로 알려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는 언제나 나보다 더 급한 환자들이 많은 법이다.
당연히 결과를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으면 안된다.
그 것 뿐만이 아니라도 응급실에서는 기다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의사가 지금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짜증스런 목소리로 무성의한 대답을 듣기 일쑤다.
가끔씩이라도 찾아와주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중한 상태여서 당장 수술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너시간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절대적 순종과 한 없는 인내라..
응급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금방이라도 부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이렇게 훌륭한 자질을 지닌 성도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대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사제들이 의술까지도 담당했던 이유가 짐작이 된다.
벌써 12시가 훨씬 넘어 이제 1시가 다 되어간다.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여기 도착했으니 벌써 4시간 째이다.
그러고보니 저녁도 건너 뛰어버렸다.
배가 고픈건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무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조금 전부터는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가져왔던 성경책 사이에 꽂아있던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방금 깨달은 사실 두 가지.
아무도 내가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다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뭐.. 사실 응급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아버지가 누워계신 이동식 간이 침대의 난간 옆에,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
우리가 오기 전, 누군가 흘린 피이리라..
이전에도 아버지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받은 인상은 하나같이 나쁜 것들이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이 한결같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지던트들이 제대로 잠도, 식사도 대충해결하기 일쑤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더구나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이라고는 온통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 뿐이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사람을 놔두고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앉아 있는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친절했다.
한 이틀은 면도도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전에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고압적인 자세도 아니었고,
시종일관 웃는 인상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짜증스럽거나 무성의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응급실 의사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2시다.
글 쓰는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새벽 3시.
한 시간 정도 깜빡 졸았나보다.
여전히 응급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신다.
좀 나아지셨는지...
좀 전에는 채 두 살도 안 돼 보이는 아기 하나가 들어왔다.
뭘 하는지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간호사 5명이 달려들어 아기에게 무엇인가를 한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저렇게 어린 아기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잠시 든 생각 하나.
오늘날 응급실에서는 수시로 피를 뺀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란다.
자기들이 고치기 어려운 병만 만나면 피가 더러워서 그렇다는 이유를 대며,
무조건 피를 빼다가 종종 사람을 죽이곤 했던,
중세 유럽의 의사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지..
온 몸이 결려온다.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나 보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새벽 4시.
또 아버지에게 굵은 바늘을 꽂고 피를 뺀다.
XXXX,
내 살에 바늘을 찌르는 것 같다.
피를 빼지 않고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의 수준은 낮은 건가..
응급실이 잠시 조용해 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앰브런스도 지금은 좀 잦아들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몸 한 번 편히 펴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앉은 채 눈이라도 쉬게 해 줄 수 밖에..
6시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의사는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보라고 하는데...
........
휴.... 모르겠다.
지금은 오후 8시 14분.
6시에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 예배 준비하려면 교회가서 할 일이 많다.
좀 전에야 집에 돌아왔다.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