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잊어버림.




학창시절 누구나 난 왜 이렇게 잘 까먹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 번 쯤 해 보았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고민을 꽤 했었다.

특히 영어 단어들...

난 외국어만 보면 왠지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체질인 것만 같았다.

외워도 외워도 잘 안되는 영어단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단어 수첩을 하나 만들었더랬다.

폭은 손바닥 가로정도 만하고, 길이는 손바닥보다 약간 더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첩의 앞뒤는 좀 두꺼운 종이가 대어져 있었고,

까만색 바탕에,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구피가 그려져 있었다.

스프링으로 묶어놓는 수첩이었는데..

자주 들도 다녔더니 정이 들어서 나중에는 물고기모양의 열쇠고리까지 달아서 다니기도 했었다.
(이와 연관되어서 내가 쓴 인간성에 관한 첫번째 글을 참고하면 좋을듯.. ^^;;)





아무튼, 그렇게 정성들여서 만들지....는 않았고, 암튼 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영어단어장.

대학교 들어와서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를 외울때도 사용했던 방법이지만,

내가 단어를 외우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적당한 종이를 준비해서 적절하게 칸을 배분한다.

고등학교때의 단어장의 경우 가로가 짧은 직사각형의 수첩이었기에

그냥 그대로 배분하지 않고 사용해도 무방했지만,

A4용지 같은 경우에는 경험상, 가로를 3등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다음에 할 것은, 다시 그 칸을 반으로 접는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외우고자 하는 단어를, 오른쪽에는 그 단어의 뜻을 적는다.

그 다음에는 오른쪽에 적혀있는 뜻을 뒤로 접어 넘기면 끝.

이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외국어.

처음에야 계속 펴보면서 그 뜻을 찾기 마련이지만,

서너번 하다보면 펼치는 빈도가 많이 낮아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사용했던 영어 단어장.

하지만, 이넘의 머리는 어떻게 된 것인지 단어는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단어장 10장까지는 겨우겨우 넘어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영 안됐다. ㅡㅡ;;;

성격상 그냥 넘어가기는 싫고.. 별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봐야했는데..

그 결과 단어장의 채 절반도 쓰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난 고등학교를 지하철로 다녔었는데,

3년간 딱 두 번 내려야할 역을 놓친 적이 있었다.

바로 그렇게 단어를 외우다가 깜빡한 것이었다.

아.... 맨날 영어 단어는 잊어버리고,

영어 단어를 안잊어 버렸다 싶으면 내려야할 역을 깜빡하고.. ㅡㅡㆀ





그 밖에도 시험때면 언제나처럼 조금 전에 봤던 건데,

아... 이거 책 어느 부분에 쓰여있는 것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등등..

자신의 기억의 짧은 유효기간을 원망했던 경험들이 허다하다.. ㅡㅡ;;






이렇게 잊어버린다는 것은 우리 생활을 여러가지로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 왔다.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 법.

그것은 과거의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즉, 내가 좋아하는 역사야말로 '인간의 망각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흠흠.. 잠시 역사로 빠져서 흥분을 했나.. ㅡㅡ;

다시 돌아와서...






그럼 망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을 불편하게만 하는가?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간이 하루에 각종 입력기관 - 눈, 코, 혀, 귀, 피부 -을 통해

두뇌에 저장하는 정보의 양은 실로 막대하다.

잠자는 시간 8시간을 빼 놓고는(요즘엔 좀 적게 자기도 하지만서두..)

나머지 시간 내내 눈을 뜨고 있다.

안구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의 눈꺼풀이 안구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잠시의 시간을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눈을 통해 우리의 두뇌로 전송되는 정보의 양은 하루에 16시간에 해당한다.

CD롬 한 장에 80분에서 90분 정도의 영상이 저장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려 11장에 해당하는 정보이다.

우리가 매일 CD를 11장씩 방안에 쌓아놓는다고 생각을 해보라.

좁은 방 안이 금방 CD로만 가득차고 말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두뇌는 고맙게도 눈이 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



그 뿐인가.

우리의 코, 혀, 귀, 피부를 통해 입력되는 정보의 양도 적지 않다.

사실 현재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시각정보와 함께,

청각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간단한 일이다.

라디오가 가장 먼저 발명이 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 뒤 시각정보를 전달하는 텔레비전이 발명되었고,

일부 촉각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 연구중이다.

아직 후각정보나 미각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은

직접 냄새를 피우거나 맛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은 어려운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것들을 데이터화 시키는 기술도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두뇌는 그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다.

그것도 하루에 16시간이라는 중노동을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온 날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그 데이터의 양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 방대한 정보를 모두 어디에 저장하는가?

현대의 발전한 생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뇌,

그 중에서도 대뇌의 일부분에 저장된다고 한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 많은 정보가 우리의 작은 뇌 안에 다 저장될까.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중요도, 자주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그 정보들을 적절하게 저장해 놓는다고 한다.

예를들면 자주 사용되는 것들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곳에,

잘 사용되지 않는 정보들은 저 밑바닥 어느 곳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치 서랍을 정리하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일부분은 저 멀리, 너무나 깊은 곳에

도무지 꺼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망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다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정보를 쉽게 꺼넬 수 있는 위치에 저장하기 위한)라는 것이 통설이다.





다시 말하면 망각이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들이 저 깊숙한 곳에 숨어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기억의 파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말한 것 처럼 망각은

우리의 뇌가 가진 기억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만약 망각이 없다면,

우리의 두뇌는 얼마가지 못해서 쏟아져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저장하느라

다른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눈을 감고 당신이 앉아 있는 뒷 편에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라.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이 나는가?

대개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정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보다 중요한 정보,

이를 테면 오늘 점심에 어떤 메뉴를 먹었느냐(?)를 기억하는 대신,

내가 늘상 드나드는 방의 한 쪽 벽에 어떤 것들이 배치되어있는지와 같은

가벼운 정보(뒤를 돌아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는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망각이라는 도구는 이렇게 실용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인간이 무슨 컴퓨터도 아니구..





어쩌면, 망각이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추억이란 대개 아름다운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을 첫사랑에 대한 추억.

비록 그 첫사랑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 년이 지나고... 10년이 넘어버린다면 그저 아름다운, 예쁜 추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냥 떠올리고 있으면 빙긋이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추억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망각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두뇌가 망각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삐져나오고, 모난 부분은 과감히 깎아내고 없애버려서

남은 기억 중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남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좀 더 나아가자면,

과거의 슬픔이나 아픔, 원한 같은 것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추억으로 삼고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원한을 잊지 않고 대물림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은혜나 호의를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그 보답을 하기 위해 살아갔던 사람은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다.

매스컴에서 선행을 한 사람을 기사꺼리화 해서 보도하는 것도,

그것이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 아닌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리 길지 않은 삶..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을 더 많이 기억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예쁘고, 아름다운 일들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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