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저자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하는가?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보인다. 언뜻 이 주장은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우스의 오래된 주장의 재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또한 저자는 우리가 “의롭게 될 당시 믿음이 행위를 동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299)는 점에서 좀 다른 입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행위와 동떨어진 다른 개념이 아니라는 부분이다. 행위란 “현재 우리의 삶을 달리 부르”는(21)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위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구”(22)라고도 말한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었다고 해서, 우리 구원의 과정에 어떤 행위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299)
문제가 이렇게 된 건 용어의 혼란 때문이다. 애초에 “믿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성경의 용어에는 일체의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 정신적 작용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았다. 신약과 구약 모두 믿음으로 번역하는 말에는 행위의 신실함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59)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말씀 어디에도 우리의 삶이 엉망진창이어도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면 괜찮다는 식의,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애초에 용어를 정확히 했다면, 오늘날 보이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마 바울도 그런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와 그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믿음이라는 단어에 어떤 삶으로 드러나는 태도와 행위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였을 테니까.
확실히 우리 시대는 점점 윤리적 강조를 포기해 나가는 것 같다. 어떻게 살든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들도 확산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좀 다른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무슨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