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죄책감을 이용한다. 우선은 모든 부분을 법과 같은 규정을 통해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근거가 불확실한 것들을 강제하려고 할 때도 죄책감은 톡톡히 이용된다. 물론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이 어떤 사람의 내면에 심각한 억눌림을 초래할 때다. 과도한 죄책감, 정확히는 잘못 이해되는 죄책감은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를 막아 지속적인 괴로움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죄책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죄책감을 초래하는 근원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근본적인 치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대 의학은 죄책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특정한 성적 본능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상황에 대해 현대 의학은 그가 그런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 그 남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을 억압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관한 부끄러움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투르니에의 독특한 관점이 빛을 발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인 용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는 그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여기에 저자는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의식을 모두 포용한다).
그리고 하나 더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의학적이고 영적인 치유를 통합하는 의사에게 일종의 성레적 치유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명명법인데, 의사가 성직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일반은총에 기초한 직업적 소명에 대한 강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