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느낌은, 이 책이 이 두 번째 부분,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의 핵심적인 목표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좀 약하지 않았나 싶다. 경제라는 영역은 굉장히 실제적인데, 이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 혹은 대안은 조금은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달까.
사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좀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2장의 경우 “과거의 사슬에 묶여”라는 시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맺은 계약에 묶여 그 이후 발생하는 다양한 변동성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고용주들은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고.
저자가 이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으로 소개하는 건, 회심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과거에 누구였는지(특히 죄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에서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일으킨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점에 있어서 과거에 맺은 어떤 종류의 계약이 우리의 오늘과 미래를 사로잡도록 내어주는 금융자본주의와는 다르다는 것.
사실 이건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식의 자본주의에 기독교의 이론적 배경이 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쉽게 말해 기독교의 세례를 금융자본주의에 주지 말라는 것. 여전히 베버를 운운하면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밀착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반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기독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더 와 닿을 부분도 없지 않을까.
애초에 이 책은 기독교에 기초한 어떤 대안적 경제이론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이 상황이 그런 식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다만 기독교가 특정한 형태의 경제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그 지긋지긋한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반박은 될 수도 있겠다. 특히 현대의 금융자본주의 안에서 고삐가 풀린 채 날뛰고 있는 맘몬이라는 우상과,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덩달아 그 숭배의 행렬에 동참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