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 역사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학 공부
정인경 지음 / 이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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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 제목부터 설명이 필요한 책이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라니, 이 무슨 문학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사실 책 자체는 과학사를 훑어가는 과학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제목을 붙인 건, 뭔가 다른 책들과 차별화를 꾀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이건 이 책이 담고 있는 네 개의 파트 소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다윈의 잔인한 표본실’, ‘에디슨의 빛과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휘어진 시공간’이다.


고전역학을 완성한 뉴턴, 진화론의 다윈, 발명가로 유명한 에디슨,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각각의 시대를 소개하는 식으로 책의 내용은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 저자는 각각의 파트에서 다루는 내용과 관련된 20세기 초 한반도의 인물들을 함께 배치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각 파트의 시작은 20세기 초 조선의 작가들이 쓴 글의 일부를 배치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턴의 시대를 다룬 1부는 이광수의 “무정”의 한 대목으로 시작해,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으로 과학을 통한 “민족 개조”를 주장했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춘다.


뉴턴에서 정립된 서양과학은 한 마디로 “세계의 수학화”였다. 자연을 양적으로 수량화하고, 이를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살아있는 것들 또한 단순히 수량적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저자는 뉴턴에게 “무정한 세계”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 그렇게 일찌감치 (뉴턴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활동을 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인조 말에서 영조 초에 이른다. 그 시대 우리의 과학 수준은...) 과학을 통한 발전을 이룬 서양은 과학만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과학주의에 빠져들었고, 이를 통해 아직 과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미개인들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했다. 앞서의 “무정”은 그런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복사한 측면이 있었고, 저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본다.


2부 다윈의 이야기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시작해,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온 사회진화론과 여기에 근거해 “미개인”을 살아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일제의 모습이 설명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3부에서는 20세기 초 경성의 일상에서 전기의 중요성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에디슨에게로 넘어간다. 분명 과학기술계에 많은 공헌도 한 에디슨이었지만, 저자는 그의 탐욕스러움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가치중립”이라는 신화의 환상을 문제 삼으며, “조선의 과학기술”을 부정하면서 일제가 이식한 수준 이하의 식민지용 과학을 옹호하던 이들을 아울러 비판한다.


아인슈타인을 다룬 4부는 천재 시인 이상과 함께 시작한다. 단순히 시를 잘 써서 ‘천재’라고 불렸다고만 생각했던 이상은, 공부 쪽에도 꽤나 수재에 속해서 조선인들에게 매우 좁은 문만 열어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일본인 동기를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제의 건축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한동안 일제의 건축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던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조선의 발전과는 상관없음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총독부에서 나와 쇠약해져 가는 몸을 붙잡고 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


저자는 이상의 시 속에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향기를 읽어내면서(물론 이상이 이런 이론들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조선을 부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가차 없이 비난한다.






저자는 서양 과학의 발전사(그리고 애써서 탈아시아해 서양의 일원이 되려고 했던 일제의 시도) 속에서, 그 주요 요소들이 20세기 초 조선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런 과학 발전이 과연 조선에도 유익을 끼쳤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다.


과학발전을 이룬 서양을 따라가는 것이 문명화이자 진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양인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미개인으로 전시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시대는 무정하고 잔인한 시대였다. 여기에 서양을 직접 접하고 공부하기보다 일제라는 필터를 하나 더 거쳐서 접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게 상황은 더욱 왜곡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결국 다양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으니, 서양의 과학이 약속한 유토피아는 적어도 당시 조선에게는 거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과학”이란 뭔지가 좀 불분명하다. 저자는 책 초반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하면서 후자를 좀 비판적으로 보는데, 사실 둘 사이의 정의의 구분보다 어려운 건, 실제로 그래서 과학을 어느 선까지 가져다 댈 것인가 하는 실천적 차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은 의외로 쉽지가 않다.


또, 식민지 조선의 과학이 갖는 울분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의 과학이라는 게 조선인들에게도 수준 높은 과학교육을 시행하는 것과 조선의 발전을 위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정도라면, 그건 과학 차원보다는 식민지 통치방식의 문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책 말미의 뉴라이트 진영의 헛소리에 대한 비판은 공감이 가지만.


요컨대 책의 시도 자체는 참신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분명 공감이 가는 결론들이 있긴 했는데, 그게 하나로 잘 모아지지는 않았던 느낌. 결론부에 하나의 장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책의 각 부분의 주제적 짜임새가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각각의 내용들은 교양으로 알아 둘만한 내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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