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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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노르웨이의 한 작은 어촌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후원자의 도움으로 독일의 예술학교로 유학을 온 젊은이다. 전도유망해 보였던 그는, 역시 뛰어난 화가이자 선생이었던 한스 구데에게 그림을 평가받아야 하는 날 아침부터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혹시나 선생이 자신더러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점점 커져서 결국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여기에 그가 하숙을 하고 있던 집주인의 딸 헬레네와의 관계 때문에(라스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헬레네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결국 하숙집에서 내쫓기게 되기까지. 이 모든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그의 정신을 압박해왔고, 깊은 우울감으로 시작된 환청과 환시, 그리고 망상이 더해지면서 라스의 정신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라스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등장한다. 조금 나아졌는가 싶었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은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병원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의 계획이 어찌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써 놓고 보면 뭔가 이야기가 쭉쭉 진행되는가 싶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거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부분이 앞에서 말한 이틀 간의 이야기니까.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오직 라스의 머릿속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활자는 그의 생각이 남긴 발자국인 셈.


그런데 언급했던 것처럼 라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보니 그의 생각 역시 끝없는 반복들로 채워져 있다. 스승이 자신에게 그림 소질이 없다고 말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수십 수백에 걸쳐 등장하고, 헬레네에 대한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점차 황당한 피해망상으로 진화해 나간다. 문장을 읽어 나가는 동안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역으로 말하면, 작가는 그런 이상심리 상태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작가는 이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체로 독자가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묘사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이라는 것도 단순한 반복만이 아니라 조금씩 변주를 주어가면서 점차 극단적인 상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말 그대로 물 흐르듯 묘사한다. 때로 폭력적인 언행을 폭발시키듯 터뜨리는 데도 다 나름의 내적 논리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





II편에서는 라스의 동생인 올리네가 화자로 등장한다. 시간으로 앞서의 사건들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난 후로, 올리네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다. 항구 근처에서 생선 두 마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올켈로부터 남동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집에 생선을 가져다 두고 방문하지로 한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그녀는 갑자기 작은 집(옥외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고셍서 회상에 빠진다.


전편의 혼란스러운 사고 서술에서 부족한 부분을 이 두 번째 파트에서 어느 정도 회상을 통해 정리해 주나 싶었지만, 웬걸 이쪽에도 문제는 있었다. 올리네는 아마도 치매의 경계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고, 그녀의 사고 역시 앞서 라스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반복되고, 뒤섞이고, 왜곡된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희미하게 라스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후에도 증세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부분들은 보인다. 다만 전편에서는 라스의 머릿속 사고로 그걸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혼란스러운 올리네의 눈으로 그런 라스를 관찰하는 식으로 서술한다는 차이가 있다.





I, II편 모두 묘사의 방식이 독특하다.(어쩌면 노벨문학상의 선정자들은 이런 점에서 “예술”적인 무엇을 발견하고 높이 샀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고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면서 느리게 장면을 그려내는 게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또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결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누군가의 생각을 단정 짓고 판단한다. 그건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학림원에서는 작가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비록 작가의 책을 이번에 처음 보긴 했지만, 이게 어떤 뜻인지는 대략 짐작이 된다. 노벨상 선장위원들은 표현도 참 문학적으로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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