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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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는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서 시작되어 3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된 중국의 마지막 왕조다. 역대 중국 왕조 중 원나라를 포함하는 몽골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넓었고, 현대 중국 영토의 기초가 되기도 했던 나라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두 차례의 호란과 관련해 우리나라와도 연결이 되긴 하지만, 딱히 그 왕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옹정제’가 누구인지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른 중국 황제들과 달리 흔히 부르는 이름이 OO제로 끝나는 세 글자라는 점에서 청나라 황제구나 했을 정도. 이 책은 청나라의 다섯 번째 황제인 옹정제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은 정사 기록에 충실하다. 흥미로운 건 이런 책이라면 왠지 중국의 학자가 썼을 것 같은데, 의외로 일본 학자가 쓴 책이라는 점이다. 사실 일본이 이런 종류의 역사나 인문학 등의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나가고 있는 나라이긴 하니까 뭐 이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어쩌면 공산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중국에서 왕조 시대의 역사에 대한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역사마저 현대 공산당 통치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게 작금의 중국 학계 현실이니까.


학문적인 책이지만 그 내용이 또 아주 딱딱하지는 않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술술 읽혀 나간다. 몇 개의 주제로 장을 구성하고, 곳곳에 저자의 평가와 설명이 더해지는데 이게 그리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행적은 제위 계승 과정이다. 직전 황제인 강희제는 무려 서른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위 계승 과정에서 황태자가 두 번이나 폐위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후계다툼이 벌어졌고, 제위를 이어받은 것이 후궁 출신이었던 옹정제였다.


즉위 후 그는 황권에 경쟁자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형제들과 공신들을 집요하게 핍박해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이 부분만 보면 치졸하기 그지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그가 열성적으로 통치하는 중후반 내용을 보면 또 평가가 급히 달라진다. 옹정제는 말 그대로 워커홀릭의 전형이었고, 소수민족 출신의 황제가 대륙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고민했던 성실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의 치세 동안 부정부패가 줄고, 각종 부당한 일들이 개선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정도로 넓은 땅을 다스리기에는 황제 한 사람의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대에는 몇 개의 성들을 묶어 총독들을 임명했고, 그 아래에는 다양한 관료들이 층층이 존재했다. 결국 통치는 관료조직을 통해 하는 건데, 이 조직은 나름의 방식과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에, 황제 같은 절대군주로서도 이들을 완벽하게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제법 깊은 고찰을 더하는데, 이 부분이 또 읽어볼 만하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나라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면들에 변화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결국 나라 운영은 소위 ‘늘공’이라고 불리는 관료들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독재의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중앙집권에 대한 경계가 강해지면서 이런 권한은 더욱 퍼지게 되는데, 그만큼 개혁도 힘들어 지는 면도 있다. 지방의 경우 토호들의 입김이 훨씬 더 강하게 미치곤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라는 게 어렵다.




분명 옹정제는 대단한 개혁을 이루었지만, 그의 통치는 겨우 10년을 넘겼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과로사 한 게 아닌가 싶지만, 저자는 또 여기에 독특한 해석을 더한다. 개혁이란 기본적으로 이전의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개혁이 좋고 의미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마음 깊숙한 곳부터 개혁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은 기세에 눌려 좀 바꾸는 것처럼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영원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그의 개혁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시간이 10여 년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가 죽은 뒤 나라를 이어받은 건륭제는 아버지의 정책 중 상당부분을 이전의 관행으로 되돌린다. 당시 관료사회가 그런 개혁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개혁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동서양의 유능한 영웅들이 개혁이 아닌 혁명을 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전제군주제에서도 힘든 개혁이 오늘날 권력의 파편화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회의적이다. 이 어려운 일에 단지 개인적 탐욕이 아닌 이유로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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