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미니멀리즘 테이크아웃 16
은모든 지음, 아방(신혜원)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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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맨날 하는 짓이 뭐냐면 누워서 정리, 미니멀리즘, 집 꾸미기 유튜브 보는 거다. 와.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많았어? 놀라는 건 덤. 정리도 대단한데 그걸 영상으로 촬영하고 편집하고 올린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신성해서 나를 넓고도 광활한 세계로 데리고 간다. 원형 테이블에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밥을 먹는 영상을 보다가 원형 테이블, 필요할 것 같은데 미니멀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얀 침구에 하얀색 벽, 깔끔하게 정리된 집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공주님이 그려진 분홍 색 캔디 베개를 물끄러미 보다가. 버려야 하나. 생각에 잠기고. 괜히 영상을 봤네 후회하고. 정리를 한답시고 보고 있는데 물욕이 자꾸 생긴다. 한심. 은모든의 소설 『꿈은, 미니멀리즘』에는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얘기해 줄게.」 완주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안 쓰는 것 열 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 마음에 꼭 드는 것 하나를 가지고 쓰자. 그거 따라 하다가 샴푸 통 하나까지 깔끔한 거로 다 새로 사고 있지? 무지에서 50만 원쯤 긁었지? 아님 이케아?」

「나도 얘기해 줄게. 그럴까 봐 천천히 진행 중이야. 이번 주에 옷 정리할 거야.」

(은모든, 『꿈은, 미니멀리즘』中에서)


주인공 심소명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집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얀 벽지로 감싸인 방 한 편에 원목 스툴 하나가 놓여' 있는 사진.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는 소명. 먼저 저녁 시간을 먹방으로 탕진하게 하는 텔레비전을 과감하게 없앴다. 텔레비전이 놓인 벽에는 추억이 묻어 있는 영화제 포스터를 붙였다. 정열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스무 살 시절에 자봉으로 일했던 영화제의 추억이 담긴.


훌륭한 정리 선지자의 말대로 다른 포스터는 사진으로 남기고 버렸다. 잘하고 있다, 심소명. 그 후로 2단 행거를 해체하고 입지 않는 옷을 버렸다. 이제 책과 화장품. 친구 완주가 임용고시 공부 시절 빵을 사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소명은 화장품을 사며 회사 생활을 버텼다. 자신을 저기요,라고 부르는 동료의 행동에 충격을 먹고 열나게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꿈은, 미니멀리즘』은 집 정리를 통해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불안과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려는 건강한 시도를 보여준다. 꿈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한 채 소비를 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세태를 명랑하게 꼬집는다. 소명은 물건을 비우면서 꿈의 크기를 조정한다. 친구 채경과의 비교를 멈추고. 무료 드림을 통해 알게 된 동네 아는 동생이 된 동우가 준 씨앗을 키우며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다.


책을 많이 가지면 작가로 가는 하이패스를 얻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으로 책을 모았다. 비가 오는 일주일 내내 몇 권의 책들을 다시 추렸다. 욕심과 욕망, 욕구의 화신인 나여. 반성하라. 꿈을 크게 가져라, 어른들은 말했지. 대신 꿔줄 것도 아닌데 잘도 무책임한 말을 했겠다. 소명은 집을 정리하고 정리뽕 맞게 해준 원목 스툴 하나만 놓여 있는 그 집의 풍경을 다시 바라본다.


정리를 했는데도 그 집의 분위기를 낼 수 없었다.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의 집은 동향이라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짧았다. 햇빛이 문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쬐어 주는 게 햇빛인 줄 알았는데. 햇빛은 잘못이 없다. 잘못은 창과 향을 선택할 수 없는 나의 통장이 문제. 『꿈은, 미니멀리즘』은 그럼에도 우울하게 끝을 내지 않는다. 우리 집에 햇빛이 들어올 수 있다면 직접 내가 햇빛을 찾아간다.


꿈을 작게 가져도 된다. 그때그때 다르게 꿈의 크기를 조정해서 살아가도 문제없다고. 집을 한 번 정리해보면 꿈의 크기에 집착했던 과거를 햇빛에 널어 말리며 살균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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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관리대상자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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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실종이 일어나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사람들이 죽어간다. 유명 인사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는다. 실종과 죽음에 언론은 침묵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나 1000명이 넘게 죽었다. 그 후 3년. 심판과 처단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해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오단은 해적에 가입하기 위해 접선한다. 주원규의 장편소설 『특별관리대상자』의 세계관이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정도로 가독성이 높다. 직접 소설 속으로 들어가 인물과 함께 공간을 누비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특별관리대상자』의 서사는 기시감이 드는 소재로 가득하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인과 관계를 밝히기보다 죽었다는 결과에 수긍하게 된 세상. 주원규는 사회를 이루는 질서라는 메커니즘에 허구적 상상력을 들이댄다.


좀 그럴듯하게. 『특별관리대상자』의 세계는 지금 여기다. 서울 도심 안에 마련된 사설 감옥, 미래 아파트. 주인공 오단은 해적에 가입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한다. 백화점 명품관을 폭파한다. 참으로 까다로운 가입 절차. 두목 해이수. 의사 출신 미우기. 회사 간부였던 남군. 탈옥자 장철수. 가출팸에서 빠져나온 리군. 해적단은 오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한다.


오단은 해이수의 암묵적 동의하에 해적단으로 들어가 참상의 실체를 목격한다. 사회 안정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자부하는 컴퍼니에서 벌어지는 비밀의 실체에 다가간다. '시스템 불온지수'를 개발한 컴퍼니는 인공지능으로 사회를 불안정으로 몰아가는 '특별관리대상자'를 선정한다. 사회 안정화라는 목표 아래 인공지능이 뽑아낸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한다.


해이수는 컴퍼니의 중간 관리자 강 실장이 '특별관리대상자'의 서류를 가지고 오면 납치와 심판, 처형까지 실행한다. 오단은 왜 그토록 해적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지 그의 목표는 무엇인지 소설의 끝에 가서야 드러난다. 반전의 실마리는 곳곳에 있고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별관리대상자』는 안정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탐구한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사회를 위해 회사가 필요하진 않은가. 인간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과연 컴퍼니의 설계는 누가 했는가. 몰아치듯 읽어가다 보면 마주하는 진실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소설의 세계라서 다행히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욕망의 끝은 없으며 침묵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현실의 움직임 때문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별관리대상자』는 외친다. 오단이 결국에 마주할 진실. 리군의 마지막 행동의 의미. 빠른 전개와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다. 자신이 심판자가 되게 하라. 그렇게 못하니까 소설가가 이야기로 이런 심판도 있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세상에는 나쁜 놈 천지인데 그걸 현실에선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대리만족을 느끼라는 건데 무섭긴 하다. 내가 그 대상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맨날 누워 있으니까. 인공지능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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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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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무튼, 메모』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을 적어본다. 네 마음 내 마음 같은 글이었으므로.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 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론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만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어두움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만 아는 것들-거의 이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 실수했다는 것, 후회스럽다는 것, 말만 앞선다는 것, 유치하다는 것, 속이 좁다는 것. 수시로 자기 비하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 칭찬에 중독되었다는 것, 중요해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 무조건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 돈을 심하게 밝힌다는 것, 남과 비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 비판을 감당 못한다는 것,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것,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다는 것


한 번 읽은 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中에서)


공책을 사서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연필과 샤프, 볼펜까지. 그걸 사면 대단한 글을 써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언갈 쓸 수 있겠다는 활력을 돈으로 사는 기분이 들었다. 첫 장에는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잃어 버려도 그걸 보고 누군가 찾아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꼼꼼한 사람이 아니고 꼼꼼한 척할 뿐이라서 끝까지 공책을 채우진 못한다. 쓰려는 자가 아닌 쓰는 자가 작가라고 하던데. 나는 매일 쓰려고만 하는 한심한 사람이 될 뿐.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의 첫 시작을 읽고 가슴이 두근대서 곧장 잠으로 빠져 버렸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에 나왔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성악가의 공연을 본 아이의 심정을 감히 상상할 수 없어 꿈까지 꾼 것일까.


꿈을 꾸고 메모를 해 놨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썼을 텐데. 그냥 공연을 본 아이가 웃었다는 내용만 기억이 난다. 정혜윤의 안타까움처럼 '메모해둘걸' 하는 마음. 『아무튼, 메모』는 많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읽고 기억나는 문장을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쓸 수 없는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나대는 작가의 작품들. 카프카, 보르헤스, 리처드 플래너건, 호치노 미시오, 이탈로 칼비노의 글과 정혜윤 자신의 기억과 메모.


책을 읽는 건 열심히 한다. 책의 밑줄을 긋고 문장을 옮기는 일까지는 아직. 어쩌면 나는 책을 읽는 시간과 문장에서 파생되는 과거의 기억과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꿈의 포기가 아닌 꿈의 추구를 『아무튼, 메모』는 말한다. 꿈을 포기하는 건 쉽고 유혹적이다. 이런 현실에서 꿈의 추구가 가능해?라고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꿈을 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죽은 자들의 언어를 빌려 응원한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를 좋아하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존재하기가 아닌 살아가기로. 나쁜 일은 시 같은 것으로 바꾸며. 아무튼, 쓰는 시간 안에서. 공책을 펼쳐 꿈을 그리는 순간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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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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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얻어걸렸다고 해야 할까. 도서관이 다시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래서일까. 1층에 마련된 신간 대출 코너에 책이 거의 없었다. 와. 사람들. 이렇게 책을 많이 읽는 거야? 나처럼 도서관 개관 소식을 듣고 많이들 왔나 보다. 소설 책장에 꽂힌 몇 안 되는 책에서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을 꺼내 들었다. 영화 《고백》의 원작자라는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한 권만 빌리기는 아쉬워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이게 뭐지? 신간 책이 2층 종합 자료실에 가득 꽂혀 있었다. 올라와보기를 잘했다. 2층 올라가는 계단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니까 게을러서 1층에서만 책을 고르고 떠났었는데. 가끔 찾아야 할 책이 있으면 2층에 올라오는 정도였다. 이제는 매번 올라와서 책을 빌려 가야지. 부푼 마음으로 책을 골라 들고 집으로 갔다.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소설의 정보가 전혀 없는 책이었다.


이런 내용일 줄 알았으면 빌려온 책 중에서 맨 처음 읽어볼걸. 그래도 좋다. 읽었으니. 욕심껏 책을 빌려왔는데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으니까. 미나토 가나에는 마리 유키코와 더불어 이야미스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인간 본성에 감춰진 악의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읽으면 기분 나빠지는 추리 소설이라는 뜻의 이야미스. 『조각들』은 미용외과 의사인 히사노가 한 소녀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히사노는 얼굴이 예쁘다. 가정 환경도 좋아 학교 내에서 인기가 좋다. 외국으로 봉사 활동을 갔다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루어 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히사노의 목소리는 없다. 히사노를 찾아오거나 히사노가 찾아간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히사노의 학창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히사노의 신경을 긁는 동창의 목소리로 소설은 시작한다.


히사노를 찾아와 대뜸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하는 시호. 자신이 정한 몸무게의 데드라인이 넘었다고 했다. 반에서 살이 찐 요코아미를 교묘하게 놀렸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네가 그 중심에 있었다며 요금을 깎아 달라고 한다. 히사노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요코아미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챈다. 병원을 벗어나 요코아미에 관련된 인물을 만나러 다닌다.


『조각들』에서 외모의 아름다움, 공부를 잘하는 능력, 행복한 가정 환경을 인물의 입을 통해 기프트라고 표현한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닌 선물로써 주어져야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누군가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말해 버린다. 저 사람은 예쁘네. 공부를 잘하니 행복하겠어 라는 식으로.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행복의 가치를 마음대로 단정해 버린다.


도넛을 옆에 두고 죽은 소녀. 그 소녀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찾아가는 히사노. 돼지라고 놀림당했어도 당당했던 소녀. 단순히 살이 쪘다는 이유로 가혹한 일을 겪어야 했다. 스스로를 못생기고 키가 작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의 불행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을 구하지 못한 건 내 외모 때문이야라고 짐작했던. 낮아진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세상에는 내가 끼어 들어갈 구석이 있겠지.


울퉁불퉁한 나란 사람의 조각이 맞춰지길 기다리는 퍼즐이 있을 거야. 『조각들』은 소녀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이란 자신이 찾아들어갈 조각을 완성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야 한다. 쌍꺼풀을 하면 예쁠 거야. 살을 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말을 듣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의 평가가 아닌 나의 판단에 의해서 내 조각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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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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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성장 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무관심하고 방관으로 일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힘들어하는 아이가 나오고. 지구 용사처럼 맞서 싸우지는 않지만 내내 괴로워하다가 껍질을 깨고 세계 밖으로 탈출하는. 나쁜 어른이 존재하고 또 이상한 어른이 등장하며 손을 내밀어 준다.


말더듬이증이 있는 열네 살의 소년은 자신을 금사빠라고 소개한다. 호의와 친절을 간절히 원하는 소년은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부반장을 자신에게 잘해줬기 때문에 좋아했다. 원래는 다른 이에게 갔어야 할 생일 선물을 부반장은 거절당해 소년에게 줘버린다. 그 길로 소년은 사랑에 빠진다. 내내 부반장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돌아오는 한 마디는 '쳐다보지 마'였다.


114 안내원으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엄마의 전 애인 쓰레기가 집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말더듬이증을 고치기 위해 소년은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간다. 원장은 사람들에게 소년을 '무연'으로 소개한다. 그곳에선 최근에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정해 한 달간 부르게 한다. 무연중에 다니는 소년. 스프링 언어 교육원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원장은 노트를 주면서 '말하기 힘든 말.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적'으라고 한다. 무연은 쓴다. 말을 할 수 없다면 쓰는 것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쓴다. 나에 대해서. 나의 주변. 나를 괴롭게 하는 것. 나를 실망에 빠뜨리는 것. 소년은 무연에서 24번으로 이름이 바뀐다. 학교에서 이름 대신 불리는 번호. 국어 선생은 소년의 말더듬증을 고쳐 주겠다는 이상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억지로 글을 읽게 하는 국어 선생은 소년을 24번으로만 부른다.


소년은 조금씩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찾는다. 원장의 표현처럼 용기가 없는 이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은 기만이다. 사람들은 가짜의 말로 진짜를 숨긴다. 하지 않아도 될 만을 하며 살아간다. 소년은 일상에 필요한 말만이라도 제대도 하고 싶었다. 교정원에서 만난 이상하거나 다정한 사람들에게서 실마리를 얻는다. 그들은 가짜가 아닌 진짜의 말을 하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계피 맛 사탕을 손에 쥐여주고 돈가스를 사주고 너 진짜 글 잘 쓴다 말해주는. 내내 사소한 친절이 소년의 입을 열 수 있게 도와준다. 소년의 마지막 이름은 용복으로 정해졌다. 소년이 쓴 노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용서와 복수'였기 때문이다. 소년을 슬프게 했던 누군가들. 용서를 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다 읽고 소년의 진짜 이름이 나왔는지 찾아보았다.


눈 어두운 독자라 혹시 놓쳤을까 봐. 나오지 않았다. 소년이 열네 살에서 열다섯이 되는 고독과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다. 추측한다. 용복이 소년의 진짜 이름이 아닐까 하는. 우리의 삶은 용서와 복수 사이 중간을 헤매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독특하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 등장한다. 캐릭터가 살아 숨 쉬고 있어 영상화되면 즐거울 것 같다.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가면 나의 이름은 무엇이 될까. 안돼. 싫어. 이렇게 불릴 수도. 용기와 위로를 주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자신감이 떨어지고 말하는 게 힘든 어른이들. 어른이 되기 전에 좋아하는 말을 마구 하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까워서 사 놓고 쓰지 못한 펭수 노트의 비닐을 벗겼다. 용복이처럼 나도 쓰며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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