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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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이런 짤을 봤다.




뭐야. 너무 공감 되잖아. 이거 나 아니야? 한참을 웃었다.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게 바뀌었다. 똑같이 소파에 누워만 있고 집에만 있을 뿐인데 2019년에는 '게으른 쓰레기'였고 2020년에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었다. 2019년 이전에도 누워만 있었다. 함부로 앉아 있지 않는다. 앉아 있으면 큰일 난다. 누워서 체력을 보충하고 내일 움직일 힘을 얻어야 한다.


코로나19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지금. 일하러 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집에만 있다.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 없는 게 나는 원래 집에만 있었다. 금요일 밤에 집에 들어가서 월요일에 나오는 나. 대단하진 않지만 2020년의 나는 엄청 기특한 셈이다. 상이라도 준다면 냉큼 받겠다. 단발머리를 고수하는데 미용실 가는 게 겁나서 어깨까지 기르고 있다. 이놈의 코로나. 이럴 때일수록 불안해하지 않고 웃음거리를 찾아 마음을 가볍게 먹는 게 중요하다.


일본 문학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권남희의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읽으며 킥킥댔다. 정세랑의 추천사 대로 글이 정말 재미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나와 권남희 번역가의 생활 패턴이 비슷했다. 거실에서 글을 쓰고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 동창회는 가지 않고 화를 내기 보다 속으로 삭히는 것. 심각하지 않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일본 문학을 애호한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권남희 번역의 책을 많이도 읽었다는 걸 알았다. 마스다 미리, 무라카미 하루키, 무레 요코 등등. 내가 읽고 본인이 번역한 책에 대한 썰을 풀어 놓으니 읽는 재미가 더해졌다. 번역가는 어떤 일상을 보내나. 약간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이다. 사는 거 별거 없는 데 별거 없이 사는 게 힘든 요즘.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속 일상은 위로를 준다.


활동적인 사람의 글도 좋지만 조용하고 행동반경이 넓지 않으며 공기마저 아껴 쉬고 있는 듯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번역을 하다 소설 속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고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가기도 한다. 딸과 친구처럼 지내며 그 아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 손안으로 온기가 전해진다. 꽤 솔직하고 꾸미지 않는 자신을 보여주기 애쓴다는 걸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읽으면 알게 된다.


행복을 찾아가는 일이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2020년의 나날은. 행복은 바라지도 않은 채 무사히 오늘을 보내기를 바라는 이들이, 행복은 사치라고 여기며 그저 힘든 오늘을 묵묵히 버티는 이들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래도 그러지 말자. 귀찮아도 일부러 행복을 찾으면서 살자. 퇴근 후에 먹는 달달한 아이스크림. 곧 다가올 월급 날짜. 오늘 도착한다는 택배 문자. 많이 먹었는데 늘지 않는 오늘의 몸무게. 귀찮지만 행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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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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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급을 타서 내가 먼저 한 일은 여권을 만들고 옷을 산 거였다. 전자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세계 여행을 가리라는 헛된 다짐의 결과였고 후자는 약간의 강요로 인한 일이었다. 품위 있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지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소리를 날이면 날마다 들어야 했다. 90만 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정말 작고 소중한 내 월급. 너무너무 작고 소중해서 어떻게 귀여워해주어야 할지 난감한 금액.


한 달 교통비만 해도 20만 원이 넘게 들었다. 왜 나는 그렇게도 멀리 일을 다녔던가. 경험과 연륜이 없는 대신에 열정과 패기만 넘치던 시절의 일이었다. 일하는 곳으로 가려면 옷 가게를 지나야 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 예쁘고 알록달록한 옷. 작고 소중한 월급 님을 들고 갔다. 정장 투피스, 정장 바지, 블라우스 등 입으면 격식 있어 보이고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옷으로 골랐다. 30만 원님 로그 아웃.


서수진의 장편 소설 『코리안 티처』의 첫 부분인 봄 학기에는 면접에 통과해 한국어 학당으로 출근하게 된 선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이는 합격 문자를 받고 80만 원짜리 핸드메이드 코트를 산다.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누가 봐도 '강사'로서 보일만한 옷으로 고른 거였다. 봄인데 눈이 내렸고 코트가 젖을까 걱정한다. 그러다 '코트 드라이클리닝 비용을 걱정하는 시절은 지나간'거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지나간 시절이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물 빨래가 쉬운 옷만 샀지 드라이클리닝하는 옷을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사회 초년생이 된다는 거. 직장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거. 옷을 사면서 실감했다. 7급 공무원 준비를 하다 내려놓고 한국어 학당 강사로서 일하기 위해 시험을 친 선이. 정규직이 아닌 한 학기 10주만 강의를 맡아서 하는 비정규직 강사로서 일을 시작하는 선이. 무시당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겨우 옷을 사는 행위가 전부인 선이.


『코리안 티처』는 명문 대학의 한국어 학당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계절별로 펼쳐간다. 봄 학기에는 선이의 이야기가. 여름은 미주. 가을은 가은. 겨울은 한희. 겨울 단기는 다시 선이의 이야기로. 『코리안 티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이다. 그들은 모두 고학력자에 속한다. 석사는 기본이고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이도 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그래도 또 배우는 그들은 어째 정규직의 길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다. 몇 개월 단위로 끊어서 일하는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 학기 편의 주인공 한희는 책임 강사로 선이, 미주, 가은보다는 낫지만 임신을 이유로 다음 학기를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나만은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공부를 했지만 그럴수록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한희는 일을 쉬면서 매일이 불안하다. 그는 완전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희가 포기하지 않는 미래에 응원을 보낸다.


미주는 청바지를 입고 단화를 신고 수업을 한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게 미주의 큰 장점이다. 모두의 규율 대신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매사에 자기주장이 정확하고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미주에게 원치 않는 시련이 찾아온다. 여학생인 한 학생을 남학생으로 오해한 것이다. 자신은 편견과 차별이 없다고 생각한 미주였다. 소설에서 그리지 않은 미주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잘 웃고 옷을 잘 입는 가은.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아 강의 평가에서 매번 1등을 한다. 가을 학기의 주인공 가은은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의 원인을 그저 자신은 운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무한 긍정의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다. 선이가 슬퍼할 때 자신의 운을 나눠 주고 싶다는 해괴한 말로 위로를 한다.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일이 뒤틀리기 시작하자 무너져 버린다. 그럼에도 『코리안 티처』는 꽤 괜찮은 미래를 가은에게 선사한다.


다시 겨울 단기는 선이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솔직히 선이에게 가장 크게 감정 이입되었다. 모든 일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극단적으로 소심한 모습에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본인이 손해를 감당하면서까지 현재를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코리안 티처』의 각 장인 학기가 끝나는 부분의 결말은 죄다 섬뜩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원하지 않게 돌아가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주인공들 때문에. 일상의 공포는 좀비 떼가 나오고 귀신이 출몰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계약 연장이 안 되거나 모르고 한 일에 대해 고소를 당하고 조심하라는 이유로 협박 문자를 받는 일이 공포고 호러고 스릴러다. 다음 달에는 꼭 주겠다 말하며 월급을 떼이고 소송 건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지 않아 그 월급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 귀찮고 힘든 일을 미루면서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하는 개소리를 참아내는 일. 『코리안 티처』는 고학력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차별의 이야기를 그리는 소설인데 나는 공포 소설을 읽는 것처럼 심장이 벌렁대고 소름 끼치는 기분을 마주해야 했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들의 현재가 너무나 암담하고 미래는 아예 삭제 당할 것 같아서. 초극세사 현실적인 여성의 아니 인간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한국어 학당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포와 서스펜스 가득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첫 장을 여는 순간 공포는 시작된다. 『코리안 티처』는 되지도 않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의 인물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가능한 추측의 기회마저도 빼앗는다. 그래서 공포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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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10-06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 극세사 현실, 진짜 호러 소설이네요. 제목만 봐서는 안끌렸는데 좋은 리뷰 읽고 나니 굉장히 관심이 갑니다 :)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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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의 소설은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로 처음 읽었다. 팔곡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사라졌다는 사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하루에 한 번 배가 들어가는 길에 우체부는 선착장에 자신이 설치한 우체통에 편지를 두고 간다. 우체통이 꽉 차 있다는 사실에 우체부는 이상한 느낌에 빠진다. 왜 우편물을 가져가지 않은 거지? 우체부는 마을로 들어간다. 여덟 집에 열 명의 노인만이 사는 팔곡 마을.


마을로 들어간 우체부는 그곳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노인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장 집에는 이불에 감싼 옥수숫대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길로 파출소로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한다. 박경위는 별일 아니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배를 타고 우체부와 마을로 들어간다. 정말 아무도 없다. 이장 집 앞에서 망을 보던 우체부마저 사라졌다. 박경위는 폐가가 있다는 언덕으로 이끌리듯 올라간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전형적인 추리 소설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한 날 한 시에 노인들이 사라졌다. 도대체 왜?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회색 인간에게 실마리가 있다. 친절하게 사건의 배후를 설명해 주지만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처리했지만 계속해서 이 세계 안에서는 노인들의 실종과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예언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실종되지 않았다. 단체로 관광을 떠났고 멀쩡하게 돌아왔다. 박경위는 폐가에서 덮친 자신을 범인을 잡았지만 그가 망상에 빠진 정신이상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하던 말. 초고령화 사회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대의를 위해 실행하고 있다는 비밀스러운 직무. 자신이 속한 단체는 국가가 관여하고 있으며 노인들을 편안하게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


모두 죽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인 죽음의 의미를 되짚는 소설이다. 추리 소설 형식으로 가독성이 높지만 주제는 묵직하다. 웰빙이 아닌 웰다잉. 소설에 나오는 노인들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다. 사건처럼 보였지만 노인들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뉴스에 나오는 노인들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소설은 질문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쓸쓸해졌다. 주변을 잘 둘러보시라. 손목에 나무의자 그림과 영어로 된 뉴 제너레이션 문자가 쓰인 자가 다가오지 않는지. 눈길도 마주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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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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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의 『더 셜리 클럽』은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소설이다.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로 떠난 설희는 그곳에서 일과 사랑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아니고 일은 빼고 사랑을 얻는다. 성격 이상한 셰어 하우스의 마스터를 만나 잘하고 있던 치즈 공장의 일자리는 빼앗겼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영어 이름 셜리. 멜버른 커뮤니티 페스티벌에서 셜리는 인생에 있어서 몇 번 오지 않을 대단한 만남의 기회를 갖는다.


행렬의 끝에서 나타난 사람 좋아 보이는 할머니들. 작은 현수막에는 '더 셜리 클럽 빅토리아 지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셜리는 당연히 그 행렬을 쫓아간다. 자신의 이름도 셜리라면서. 할머니들은 카페로 올라갔고 셜리는 따라 들어간다. 셜리 클럽에 끼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운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셜리의 표현대로 '거의 완벽한 보라색 목소리'를 가진 S였다.


셜리는 그날 '재미, 맛있는 것, 친구'를 최고로 치는 셜리 클럽의 임시-명예-회원이 될 기회를 얻었고 S의 만남도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더 셜리 클럽』은 워킹 홀리데이의 '희망' 편이라고 박서련을 밝힌다. 모든 이들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따뜻하고 악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셜리가 만나는 사람들(몇몇을 제외하곤)은 셜리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먼저 연락을 해주고 피자를 먹으러 가고 공항에 내렸을 때 황망해 하지 않도록 마중을 나와주고 머물 곳을 안내해 준다. 누구나 그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거 아냐. 반문할 수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악의 없는 선의를 베푸는 건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는 약간의 경계심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내성적인 성격의 셜리가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클럽에 먼저 다가간다. 함께 하고 싶다고. 이름이 같은 것 빼고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것만이라도 우리는 함께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느냐는 마음으로. 셜리라는 이름은 우리 식으로 치면 '자'나 '숙' 자로 끝나는 이름보다도 오래된 느낌의 이름이다. 자신들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동양인 여자가 셜리라는 이름이라고 함께 하고 싶다고 할 때 그네들은 기꺼이 리틀 셜리를 받아준다.


그리고 S. 첫 만남에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S. 셜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보라색 사랑의 느낌을 받아들인다. 표지만큼이나 핑크 핑크 한 사랑의 느낌으로 가득한 『더 셜리 클럽』. 행복한 결말로 소설의 끝내주어서. 전 세계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셜리 클럽 지부가 있어 셜리들이 마중 나와줄 것 같은 희망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어서. 연대는 거창한 게 아닌 꼭 끌어안아주고 전화를 대신 걸어 주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해주어서. 고맙고 기쁘다.


기사를 찾다가 읽은 박서련의 인상 깊은 워홀 에피소드. 룸메이트랑 싸워서 거리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교복 입은 청소년들이 박서련에게 다가와 길을 잃었냐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단다. 실제 나이는 박서련이 많았을 텐데. 길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선량한 학생들. 그때 받았던 선의. 삶은 미약한 온기로 우리가 가진 냉혹함을 미지근하게 만들어준다. 요즘 울기만 하는 당신을 위한 소설 『더 셜리 클럽』. 읽고 나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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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생활
송지현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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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오는 한국 소설, 한국 에세이, 한국 시집을 많이 읽는다. 안다. 민음사에는 세계 문학과 다양한 인문 교양서도 많이 나온다는걸. 그런데도 나는 한국 작가들이 쓴 책을 주로 읽는다. 나라를 사랑하는 주관이 뚜렷하고 의식이 투철한 애국주의자, 국수주의자는 절대 아니고.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독서를 하는지라 내게는 한국 문학이 찰떡이다.


한국, 사랑한다. 이제서야 고백한다. 의료보험 잘 되어 있고 택배 시스템 훌륭하다. 오죽했으면 세계 여행 한 번도 안 가봤을까.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여권을 만들었는데 10년 동안 한 번도 안 쓰고 갱신 기한을 넘겨 버렸다. 한국을 사랑하는 것과 외국 여행 안 가본 건 무슨 상관일까 싶은데. 이왕 쓸 돈 우리나라에서 쓰자는 이상한 고집 때문이다.


여행기를 꾸준히 읽는 것으로 지식을 넓힌다. 여행을 책으로 배웠다. 책만 펼치면 방구석에서도 여행이 가능하다. 남의 고생기를 읽으며 안 가길 잘했어, 행복 회로를 돌린다. 일상의 피곤함을 독서로 달래 보는 것도 요즘 같은 시대에 현명한 방법이다. 먹는 우울증 약이 아닌 읽는 우울증 약을 받아드는 셈이다. 책 읽기란. 소설가 송지현의 에세이 『동해 생활』을 읽으며 사는 거 참 별거 아니다 하는 위로뽕 맞았다.


소설가 송지현의 첫 소설집은 안 읽고 첫 에세이를 읽었다. 조만간 읽을 게요. 『이를 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요. 『동해 생활』을 보니 해외여행 못 가니까 국내용으로 이런 기획으로 '생활 시리즈' 나오면 대박 치겠다. 여수 생활, 통영 생활, 남원 생활, 강릉 생활, 충주 생활…. 송지현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써도 되고 다른 작가가 이어받아서 써도 되고. 민음사 관계자분들이여. 나의 대박 아이디어를 받아 적으시라. 코로나 시대에 여행 못 가는 이들에게 환영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실직하고 아빠가 빌려준 돈 대신 받은 동해 아파트가 있다는 걸 깨달은 송지현은 이케아에 가서 '나만의 집'을 꾸미기 위한 인테리어 용품을 산다. 친구와 동해에 살러 가면서 아차 엘베가 없는 집이란 걸 뒤늦게야 안다. 차분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완벽한 친구에 의해 짐을 나르면서 이 년간의 동해 생활이 시작된다.


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집.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전무후무한 작업 멘트인 "라면 먹고 갈래요?"를 날리며 눈을 반짝이던 이영애니까 가능했던 그 말을 듣는 유지태가 배시시 웃던 배경이 된 아파트. 송지현은 그곳으로 이사를 간다. 전입 신고를 하고 실업 급여도 받는다. 처음 한 달은 스무 시간 넘게 잠만 잤다. 스무 시간. 하루는 24시간인데.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동사무소에서 보내준 팸플릿을 보고 중단되었던 취미 생활을 이어 나간다.


나도 그렇다. 무슨 일을 하려면 장비부터 사야 한다. 완벽하게 세팅된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송지현은 자신을 취미 왕이라고 소개한다. 기타를 배우려고 삼 개월 할부로 기타를 사고. 색연필 인물화를 하려고 72색 색연필을 사고. 한국화 수업을 들으려고 화선지 1000장을 사고. 사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끝까지 수업을 듣고 준전문가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동해 생활』은 웃기고 슬프고 즐겁고 짠하고 신나고 애틋한 생활의 에피소드 모음집이다. 아홉 살 차이 나는 친동생과 송지현은 동해에서 산다. 고양이 두 마리까지도. 생활비를 이마트에 전부 탕진하면서. 친구들이 오면 망상 해수욕장으로 끌고 가고 방 하나 거실 하나인 아파트로 데려와 술자리를 이어간다. 첫 부분에 민음사에서 나오는 한국 문학을 열심히 읽는다고 썼는데. 왜 그 이야기를 했냐면.


민음사에서 나오는 한국 소설, 에세이에는 추천의 말이 좀 길게 나온다. 그게 좋다. 별거 아닌데 형식적으로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쓰인 평론이나 간단한 발문이 아닌 작가의 지인들이 사심을 가득 담아서 쓴 추천의 말을 읽을 수 있어서. 나는 사소한 일에 쉽게 감동을 받는지라 몇 장이 넘어가게 쓰인 추천의 말을 읽으며 그 작가의 평소 인간관계나 생활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동해 생활』에는 송지현이 사는 동해로 놀러 간 작가 세 명 권민경, 박상영, 백은선의 글이 실려 있다. 바다색을 닮은 종이에. 우울증을 겪는 송지현을 그대로 봐주고 과잉 친절로 범벅된 위로의 말을 해주지 않으면서 같이 술을 음식을 먹는 작가 친구들. 나는 별일 없으면 지금 사는 곳을 떠나지 않을 거다. 대신 누군가가 살아간 시간의 글을 읽으며 이곳과는 다른 풍경을 엿볼 것이다. 송지현의 어떤 생활이든 파이팅! 갑자기? 응 갑자기.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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