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일기
박소영.박수영 지음 / 무제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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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음악 프로그램이 있다. 《더 시즌즈-이영지의 레인보우》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을 봤다가 흥미가 생겨 매주 챙겨 보고 있다. 키가 큰 영지 소녀의 활기차고 다정한 모습에 매번 감화 받고 있다. 《2024 마마 어워즈》에서 명랑 소녀 이영지는 '스몰 걸'을 부르기 전 "사랑을 하고 계신다면,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절대 주저하지 마시길 바라겠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노래를 이어갔다. 


묘하게 이런 말들이 툭툭 내던지는 쉬운 문장의 말들이 눈물을 쏟게 만든다. 현실을 살고 있는 나에게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갑자기 위로를 던지는 것 같아서. 《더 시즌즈-이영지의 레인보우》에는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도 나온다. 영화배우 박정민이 한 권의 책을 들고나와 영지 소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본업은 배우이지만 글도 쓰고 책도 만드는 박정민. 무제라는 출판사의 대표로서 나온 걸까. 넷플릭스 시리즈 《전, 란》을 홍보하기 위해 나온 걸까. 


둘 다이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그는 홍보에 열심이었다. 깜찍한 율동과 함께 고민중독을 부르고 진심을 다해 구름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 요즘 나의 최애 노래는 고민중독이다. 가사가 어쩜 그리 사랑스러운지. '너를 고민고민해도 좋은 걸 어쩌니'라니. 귀여움 터진다, 터져. 홍보에 열심이면 홍보에 넘어가는 수밖에. 《전, 란》은 이미 봤으니 그가 만든 책 『자매일기』를 사면 되겠지. 내 책을 만든 대표가 이 정도로 홍보에 진심이라면 노예 계약서라도 좋으니 사인하고 말겠다는.


『자매일기』를 받아들고 놀랐던 건 책의 제본 상태였다. 사철 노출 제본 도서라니. 말장난을 하자면 사철 내내 노출하고 있는 야한 책인 거잖아. 히히히. 나만 웃긴가. 나만 웃으면 된다는.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뭐. 책에 관한한 호갱인 나로서는 이런 실용적이고 귀여운 디자인의 책을 보면 책을 읽기도 전에 호감도가 급상승한다. 어느 쪽을 펼쳐도 쫙쫙 펼쳐진다. 누워서 보기에도 좋다. 한 손으로 읽는데도 함부로 책장이 안 넘어간다. 


겉표지를 포스터로 써보라는 친절한 표지 설명까지. 연말인데 선물할 일이 있으면 『자매일기』가 어떨지. 다정한 자매들 박소영과 박수영의 고품격 사회 철학 만담이 실린 『자매일기』를 읽으면 없던 자매애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우울한 당신의 하루에 큭큭 까지는 아니어도 히히하는 웃음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자고로 두 자매의 직업은 '동물권리론자이자 동물 구호 활동가'이다. 


전화하는 척 연기 하면서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위급한 상황에 처한 동물이 있으면 에어컨을 켜지 않은 차를 타고 달려간다.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사는 박수영은 아시온이라는 애칭을 붙인 차를 타고 세계의 확장을 경험한다. 박소영의 글은 담백하고 박수영의 글은 질척거린다. 박소영의 글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만든다면 박수영의 글은 과거를 바로 보게 만든다. 두 감각 다 필요하므로 『자매일기』는 환상의 책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너를 고민고민해도 좋은 사랑이든 사랑은 상시 우리 곁에 대기 중이어야 한다. 운 좋게도 자매가 싸우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한 집에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다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기도 하겠지. 허나 지금 그렇지 못한 자매들이여 『자매일기』 속 소영과 수영을 통해 대리 자매애를 느껴보자. 책을 읽었다고 굳이 지금 불편한 자매 사이를 좋게 만들어 볼까 시도해 보지는 않아도 된다. 그냥 그렇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힘들이지 않으며 방치하며 사는 게 최고의 효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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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송지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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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많이들 궁금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뭐가 궁금해하셨을 라구요.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한밤이나 새벽에 울리는 전화만큼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요.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보다가 그만두고 얼른 머릿속을 스치는 몇몇의 사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늦은 밤 너무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주변의 성화에 얼른 전화를 걸어야 했기에 미안한 마음에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바로 연락이 와서 놀랍기도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팠다는 거죠. 도저히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응급실에 갔습니다. 별거 아니겠거니 생각했어요. 수액 한 병 맞고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그런 처방을 스스로 내리다니. 급히 입원을 하면서 걱정이었던 집의 상태였습니다. 언젠가는 먹을 거라고 냉장고에 쟁여둔 음식과 미처 정리하지 못한 빨래. 그동안 미니멀한다고 설쳐댔는데 반성합니다.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미니멀. 아프기 전에 읽은 송지현의 소설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을 챙겨 달라고 했어요. 


읽을 수 있을까.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와중에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해열제를 맞고 정신을 차리면 지금을 읽을 수 없는 책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쳐다보다가 책장을 넘길 힘이 있겠다 싶어 책을 들었습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기에는 적당한 무게였습니다. 송지현의 소설은 아픈 와중에도 척척 읽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생활이 어렵고 다정하고 정이 많습니다. 가족이 모여도 가족 같지 않은 풍경에 스산해질법한도 하지만 허탈한 유머로 극복해냅니다. 직장에서의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아도 낙담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무심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병실에 누워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는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에서 애틋함을 느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고통이 없다면 말입니다. 아니 고통이 있어도 살아만 있으면 응급실에 가고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을에 제가 먹을 수 있었던 건 라면과 편의점 과일이었습니다. 혼자 울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밤의 자판기 앞에서 음료가 담기지 않은 캔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더할 나위 없이 깨달았어요.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의 미덕은 이런 것입니다. 환자도 읽을 수 있는 편안한 호흡으로 쓰였다는 것. 몸의 고통을 전부 잊게 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현실에 맞닿아 있는 풍경을 내어주며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 모두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고 계절에 맞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지내요. 겨울에는 군고구마와 귤 그리고 치킨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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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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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괜찮지 않아요?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두어 번의 통화를 했을 뿐이었다. 한 번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나 성향을 파악하기에 나에게는 직관이나 통찰력이 없다. 여러 번 자주 오래 보면서 말투와 행동을 보고 겨우 짐작 할 뿐이다. 잘 모르겠고 제게 괜찮은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애매한 말을 했다.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해본다,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장점을 들여다보다가 그렇지 좋은 면이 있네 하는 식으로 대충의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좋은 모습이 하나도 없나. 파도 파도 괴담뿐인 사람이 실제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먼저 말을 걸지도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을 때 조차도 상대는 평온하다.


알겠지.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 상대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다. 어쩔 수 없다. 이유 있이 싫게 된걸.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싫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에. 우연히는 아니고 어쩌다 책 축제에 갔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부스를 만들어 놓고 출판사 별로 책을 팔고 있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내 손에는 책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초록 초록한 표지의 책 『어른의 어휘력』을 골라 들었다. 나이만 많이 먹었지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인 척 살고 있는 나에게 딱 맞춤한 책이 아닐는지. 논다고 흥청망청까지는 아니고 이때 아니면 언제 써보겠어, 돈 이러면서 소비에 심취해 있다가 드디어 죄책감을 덜어줄 아이템을 만났기에 고민 없이 책을 샀다. 


맞춤법 공부하고 문장력도 기르고 싶어 문법책을 잔뜩 샀다가 어려워서 포기했더랬다. 『어른의 어휘력』도 조금 읽다가 덮겠지 하면서 읽었다. 아니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 시간 전에 틈틈이 읽고 집에 와서도 짬짬이 읽었다. 글을 쓰기 위한 문장력 강화나 외워야 할 것 같은 문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다. 타인과 대화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과 공감을 길러야 하는 이유 같은 어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일러준다. 


작가 유선경의 과거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어휘 책에서. 내 영혼이 오래되고 낡았을 때 나를 일으켜 주던 한 마디의 기억까지도. 문장, 어휘, 문법책에서 읽을 수 없었던 감성이 『어른의 어휘력』에 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만에 문법책이라고 하는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괜찮고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말투와 쓰는 어휘력을 보고 판단한다. 말을 할 때 습관처럼 욕설을 쓰지는 않는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지. 상대의 나이와 성별, 직업을 알고 무시하는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지. 『어른의 어휘력』을 읽다 보니 내가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확한 표현과 문장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까지도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삶. 사랑. 사람.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세 가지를 가지고 괜찮은 타인으로 남아야겠다. 닫힌 마음의 문은 놓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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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꿈과 토템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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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름인 것 같은 착각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그러다 재채기를 연속으로 하는 순간 아, 가을 말하면서 문을 닫는다. 이미 여러 벌 가지고 있는 비슷한 패턴의 셔츠를 사놓고 몇 번 입지도 못했다. 아, 겨울 이러겠지. 휴일에도 청구서는 날아오고 숫자를 한참 바라보다 찬물을 마신다.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등은 아프고 다리는 조금씩 붓다가 가라앉고 있다. 


책 읽기는 더딘 반면에 책 사기는 미친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누워서 그나마 힘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기와 책 사기. 오늘은 책 사기에 더 집중한 하루이다. 힘들고 지칠 다음 주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지서와 택배가 쌓여 있겠지. 은모든의 소설집 『꿈과 토템』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매일 지치고 매일 짜치고 매일 슬픈 나를 위로한다. 


도대체 누가 훔쳐 간 건지 모르겠다, 나의 집중력. 멍하니 앉아서 한 곡의 음악만 반복해서 듣는 것 외에는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내게 『꿈과 토템』에 실린 간략하고 짧으면서 온기 있는 소설들은 괜찮아 네가 이해 못 해도 내가 너를 이해하고 있단다 하고 말해준다. 다중우주의 세계 속에서 오늘은 네가 졌지만 다른 세계에서 오늘의 다른 너는 이기고 있다고도. 


「꿈은, 미니멀리즘」을 읽으면서 여름옷 정리하자 생각했다.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의 주인공은 집 안에 불필요한 짐들을 정리한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동기부여받아서 버리자, 정리하자 생각만 했다. 실천은 아직. 생각만 한 게 어디야. 이런 생각들이 쌓여 겨울이 오기 전에 정리하겠지. 「모닝 루틴」의 그녀들. 은하와 민주, 성지를 다시 만나면서 명절이 별 건가. 마음 맞는 이들과 만나 맛있는 거 먹으면서 깔깔깔 웃으면 되는 거지. 기분 좋은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되어드립니다」에서는 연애를 시작할까 말까의 망설임이 묻어나 흐린 일요일의 배경색을 밝게 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떤 오해와 어긋남 때문에 시작할 수 없는 만남은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이 작용해 연애의 길로 이르게 한다. 『꿈과 토템』 속 이야기는 너무나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어서 너무나 예쁘고 소중하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하루하루라면 심장과 폐는 남아나지 않겠지. 계속 기쁠 수도 계속 슬플 수도 없다. 직장에서 있었던 부당한 일을 이야기해도 가만히 들어주는 친구. 하기 힘든 기름진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오는 친구. 좀비떼가 습격해도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가족. 은모든의 다중 세계의 우주에서는 세상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그 모든 다정함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번역 없이 노벨문학상의 소설들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오늘 나의 슬픔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요즘 자주 꿈을 꾼다. 잠에서 깨면 무슨 의미였지 생각해 보지만 다시 잠에 빠진다. 분주한 낮을 보내고 밤에 이르면 꿈의 잔상들이 남지만 그것 또한 피곤함에 잊힌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이야기뿐이리라. 내가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는 비밀 이야기를 사랑 느낌으로 변환해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오늘을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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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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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바다를 마주했다. 내 기억 속 바다는 구정물이었다.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와 백사장에 깔려 있었다. 가까이 가기 싫어서 멀찌감치 서서 일별했다. 당연히 그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발을 담그면 나의 생애가 잠겨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눈치 보지 않고 눈치 볼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연차휴가를 붙였다. 그래도 아무도 누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다. 나 너무 눈치만 보며 살았잖아. 바다를 보러 가자. 동해의 푸른 바다를 만나러 가보자. 송지현의 에세이 『동해 생활』의 영향이 살짝 있었다. 소설가의 소설은 안 읽고 에세이 먼저 읽다니. 좋잖아.


동해로 이사를 가고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돈을 벌면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방을 내어주고 해수욕을 한다. 저녁에 술은 덤덤덤. 또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언덕은 여전히 가파르구나. 한국소설 코너에서 오래 머물다가 읽고 싶었던 책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발견했다. 그치. 나 이 책 읽고 싶었지. 『동해 생활』을 읽었으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읽어야지 했었지.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눈에 담아온 동해 바다의 푸르고 거친 파도가 배경으로 떠올랐다. 작가의 말에서 송지현은 동해에서 월화는 카페에서 일하고 목금토일은 이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한다고 밝힌다. 소설가의 삶. 소설을 쓰기 위한 삶에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것.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자기만의 집이 필수이며 돈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이 전부 좋다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의 감상이다. 이럴 수가. '언니가 집 안에 있는 모든 약을 먹은 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라는 다소 경박한 호기심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선인장이 자라는 일요일들」부터 돈이 되지 않을 의뢰만 들어오니 그 일만 하는 탐정 사무소의 사계절을 담은 「탐정과 오소리의 사건 일지」 시리즈까지. 


송지현의 소설은 송지현의 문장은 송지현의 세계는 너의 삶이 그렇게 힘들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좀 더 다정하고 쉬워질 거야 하며 손을 내민다. 그 손을 나는 덥석 잡는다. 잡고 송지현으로 들어간다. 좀비가 되어도 일을 하러 다니고 사우나에서 만난 이모들과 여행을 가고 애인과 이별해도 다시 집에 돌아와 살아간다. 망해가는 대여점에서 일을 해도 오늘 정도는 긍정한다. 내일은 모르겠고!


바다 정도는 보이는 곳에서 살수 있잖아. 노랗게 바랜 벽지를 보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열면 하얀 포말을 그리며 달려들다가 멀어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책을 읽다가 던져두었다가 다시 읽으면서.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방식으로 내 삶의 판을 다시 짤 수도 있다고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는 속삭인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얻기 위해 망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번 망했다가 새로 괜찮아지기도 하더라고. 그런게 삶이라고 꼰대처럼 말하기는 싫고 눈치만 보지 말자고 잔소리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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