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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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있는 곳에서 겨우 탈출하고 나서 인생 뭐 있어 하는 생각에 물욕이 터져 버렸다. 무언갈 살 때만 겨우 사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쿠폰을 주길래 하루에 한 권은 책을 샀다. 과자와 음료수, 커피도 사서 쟁여 놓았다.(지금은 전쟁 시기니까.) 그리하여 책꽂이에 책은 이중으로 꽂히고 옷장은 옷으로 빡빡하고 살은 토실토실 올랐다. 


그렇게 물건을 사서 쟁이는 사이 마음은 더욱 공허해지고 집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느 날 바닥에 묻은 얼룩을 닦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찌든 때로 바닥은 미끌 거렸고 몇 번을 닦아도 검은 얼룩이 계속 묻어 나왔다. 이마를 때렸다. 정신, 차리자. 잘못을 반성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다고) 바닥을 닦았다. 


서점 앱은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그동안 사둔 책을 키 순서대로(이상한 강박.) 꽂아 놓았다. 그중에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왜 이 책을 샀을까. 그날의 기분은 떠오르진 않았지만(아무래도 책 소개에 혹해서겠지. 이 책을 읽으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이곳에 책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읽어 나갔다. 


아베 아키코의 『카프네』를. 제목이 다소 생소한데 친절하게도 책의 뒷날개에 뜻을 적어 놓았다. (사소한 다정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 카프네는 '사랑하는 사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주는 행동은 뜻하는 포르투갈어. 소설 속 가사 대행 서비스 업체의 이름'이다. 그런 날 있다. 누군가 나의 집을 깨끗하게 치워주진 않을까. 집에 들어가기 전 기대하는 날이. 


어제와 오늘 아침의 내가 벌여 놓은 짓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엉뚱한 상상을 하는 날.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쓰레기와 머리카락과 바닥의 얼룩이 나를 반겨준다. 이제 그만 사야지. 필요한 게 아니라 필요를 만들어서 사는 거잖아. 나를 어르고 달래보지만 쇼핑 앱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멈출 수 없는 날들에 『카프네』가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남동생을 잃은 가오루코는 현재 제정신이 아니다. 사이가 좋았던 남동생이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여서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젊은 남동생은 유언장을 써 놓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일부의 유산을 전여친에게도 상속한다는 내용과 함께. 


누나 가오루코는 남동생의 유언을 들어주고 싶기에 언젠가 한 번 본 남동생의 전여친 세쓰나를 기다리고 있다. 유산의 일부를 받아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약속 시간에 늦은 세쓰나는 투박하고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동생의 유산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가오루코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세쓰나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가오루코의 집까지 그녀를 데려다준다. 


엉망진창인 가오루코의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대로 집도 치우지 않으면서 청소와 정리 영상을 열심히 본다. 보고 있으면 힘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카프네』는 가사 대행 서비스에서 일하는 세쓰나와 얼떨결에 그곳에서 자원봉사 일을 시작하게 된 가오루코의 변화를 보여준다. 오늘까지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쓰레기를 먼저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달라지는 내일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나도 할 수 있다. 너도 마찬가지야. 일어나 봐. 머리를 묶고 쓰레기봉투를 찾아.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담아. 힘이 들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고 다시 움직이자. 


가오루코와 세쓰나가 토요일마다 가정에 방문해 집을 치우고 음식을 하는 모습에서 기운을 얻는다. 사람은 먹고 잘 자는 것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토요일인 어제는 계속 잤지만 오늘은 일어나서 겨우내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사 놓은 책을 읽었다. 계속 읽어갈 예정이다



이렇게나 책이 많으니까. 우울해하지 말자!(권또또님의 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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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함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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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감이 있다. 어쩐지 세상은 나에게만 가혹하게 대할 거라는. 그런 예감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이상하게도 꽤 괜찮은 날이 이어진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마주한다. 거대한 불행의 얼굴을 한 세상의 정면을. 그래 그러면 그렇지. 세상이 나에게 호락호락 할리 없지. 이게 맞지 하면서 불행의 얼굴을 뜯어본다. 


곧 울 것 같으면서도 입술을 깨문 얼굴을. 함윤이의 장편 소설 『정전』의 주인공 막의 처지가 그렇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막은 세상의 다정한 얼굴과 마주한다. 왜 이렇지 하면서도 다정하고 친절하게 구는 시간을 즐긴다. 아버지는 믿었던 삼촌에게 배신을 당한다. 이게 맞지. 가세가 기울면서 대학을 휴학하는 일련의 서사가 내게는 어울리지. 


막은 다양한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그나마 숙련도를 덜 요구하고 임금이 센 제약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약을 선별하는 작업을 한다. 시절 인연으로 남겠지만 공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막은 소중하게 여긴다. 아직 세상의 우울한 얼굴을 보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불행하지만 너의 표정을 바꿔 주겠다의 결심이 막에게는 있다. 


그러다 변하겠지. 세상은 불행한 채로 밥을 먹고 머리를 감고 커피를 사 마시는 어두운 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다정함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겠지. 막은 공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휴학을 하고 공장으로 일을 다니게 되었지만 한 가지 좋은 순간을 맞이한다. 


스리랑카에서 취업 비자로 온 라히루. 그 애의 잘생긴 얼굴에 눈이 가고 그 애와 함께 하는 시간이 애틋하고. 세상, 너 마냥 나에게 막 대하지는 않네. 이 정도면 괜찮아. 난 견딜 수 있어의 희망 고문의 시간이 찾아온다. 등록금을 벌고 학교에 돌아가서도 그 인연은 이어질 줄 알았지만 공장에서 사고가 난다. 이럴 때 또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인간한데 사랑은 무슨, 행복은 무슨. 


『정전』의 장르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공장과 노조가 나오니 노동 소설? 막이 겪어 내는 건 사랑의 고통이니까 로맨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이야기의 전부를 풀어내지 못했지만 후반부에 몰아치는 사건 때문에 초능력 장르 소설? 글쎄 이제 나는 하나의 현상에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분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모르겠음. 모르겠음. 모르겠음. 평서문.


으로 남겨야겠다. (영화든 소설이든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세계와 빨리 만나길 바란다. 오바!)


진짜 모르겠다니까. 『정전』의 장점은 이상한데 이상한 힘으로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게 가능해 하면서도 그건 모르겠고 나는 막과 그의 친구가 벌이는 해괴한 일을 따라갈래 막무가내로 돌진하게 한다. 공모전 수상작이라 소설의 뒤 편에 심사평이 실려 있다. 신형철의 말은 모르겠고 이유리의 말은 조금 알겠다. 


너를 위해 잠시 불을 끄겠다. 잠깐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어 불행한 세상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 다시 불이 켜져 내내 불행한 세상의 얼굴을 보겠지만 좀 웃어봐 어깨를 토닥여 줄래의 마음이 『정전』에 있다. 이거면 됐지.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건. 더 나은 내일과 미래는 가짜의 삶이고 오늘보다 덜 불행한 내일과 미래면 된다. 사랑은 그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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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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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만 내일도 어김없이 살아야 할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 슬펐다면 내일은 조금 기뻐질 수 있도록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곤 합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아침에는 비우기. 아트박스나 모던 하우스에 들어가서 신상 물건 구경하기. 신간 책이 나왔다면 한 권씩 사기. 써 놓고 보니 모두 소비와 관련한 것들이네요. 


물건을 사는 즐거움 그러니까 소비로서 내일이 조금은 괜찮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방법을 찾아냈지만 이는 통장 잔고 사정을 생각하면 지양해야 할 행동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문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보면서 잠시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에 나를 세워 놓습니다. 광고라는 걸 알면서도 영상을 보며 쓰임새를 찾아내는 저녁의 나를 어쩌지 못합니다. 


오하림의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은 물욕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일본 광고의 문장들을 가져와 지쳐 있는 오늘의 나를 다독입니다. 괜찮아. 여행도 휴식도 소비도 너에겐 모두 필요한 일이야 하면서요. 70개의 일본 광고 카피가 실려 있으면서 이를 해석해 주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광고의 종류도 다양해서 여러 업체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배당받은 하루치의 사회인 역할극을 끝내고 돌아와 누우면. 다들 무얼 하시나요. 이미 에너지는 바닥났습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갓생 영상에 자극을 받아 책상 앞에 앉으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대로 누워 있습니다. 꼭 필요하진 않은데 사고 나면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거나 다정하게도 나만을 위해 추천해주는 알고리즘 영상을 끊임없이 위로 올립니다. 


그런 저녁에.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 실린 광고 카피를 하나씩 읽어갑니다. 종이 위에 많은 활자를 보기는 힘들어서 딱 이 정도 분량의 문장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요. 한 줄의 문장.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문장이지만 그 안에 '사람'과 '위로'를 찾아냅니다. 그야말로 엄선한 한 줄의 문장을 지친 나에게 가져다줍니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책을 읽는 우리는 이런 호사를 누리고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책을 읽는 저녁을 지나 어제와 같은 오늘이 찾아오죠.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립니다. 배차 간격이 15분이라서요. 사람이 많아 늘 서서 가지만 그래도 오늘 버스 타기에 성공했네 작은 성취감이 듭니다. '마음에, 모험을' 어제 읽은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 실린 신초샤 여름 추천 도서 100선의 카피를 떠올립니다. 


출근길 버스 타기이지만 이런 한 줄이면 어떨까요? 


'어른은 모두, 여행의 도중'(JR 동일본·기차여행) 


버스에 실린 나의 모습 위로 말이죠. 마음에 모험을 담고 이 길은 여행의 도중이라는 생각을 하면 책가방을 앞으로 메지 않고 뒤로 맨 채로 서 있는 학생의 등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거죠.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을 읽으며 이런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문장이 떠오르면 스쳐 가는 걸 보고만 있었는데 어쩐지 이 문장은 쓰고 싶어졌습니다. 


엄마 나는 잘 지내, 그럭저럭. 


어떤 제품의 광고 카피로 적당할까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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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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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취업한 곳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집에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 지금까지의 일은 지우고 다시 1부터 시작하는 거야. 생각한 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고 내가 스스로 나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다시 시작하기. 리셋 버튼을 쥔 자는 나였으므로 내가 이 삶을 책임져야 했다. 자주 번번이 도망쳤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했지만 대체로 그전보다 나은 곳이었다. 


이런 식인 거다. 한 번은 못 견디는 곳. 다음번은 견디는 곳. 지금은 견디는 곳에 와 있고 경험상 다음번은 못 견디는 곳일 거라서 약간 우울한 상태에 있다. 그런 거다. 인생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르거나 둘 중에 한 곳에 와 있는 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는 최상의 상태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김영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타 작가의 삶에서도 단 한 번의 삶은 화두로써 작용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남아 있는 자로서 느끼는 상실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평범한 인간이 느낄 법한 비애를 같이 경험한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태로서 지낸다. 이런 안도. 쉽게 말해 나만 힘들고 지치고 병이 날 것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확인을 책에서 받는 거다. 


나는 이제 사람이 무섭다. 이렇게 쓰니까 좋다. 사람이 무서운데 무섭다고 어디에다 말할 데가 없었는데 쓸 수 있다니. 한 번 더 적어야지. 나는 이제 사람이 무섭고 더 정확히 말하면 까다로운 사람들이 두렵다. 마침표와 띄어쓰기, 글자체에 집착하고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사람들이.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이 생은 단 한 번인 걸 아느냐고. 


『단 한 번의 삶』에서 김영하는 어머니의 죽음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를 앓은 어머니는 현재부터 기억을 지워 나간다. 현재의 자신이 누군지 모른 상태로 과거에서 반짝인다. 그런 어머니의 소실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은 애틋하다. 일회용인 삶. 한 번 쓰면 재생이 힘든 키친타월 같은 삶. 그런 삶에서 죽음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잘못된 과거를 지워 버릴 수는 없기에(리셋 버튼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현재의 시간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고장 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이므로 잘못을 고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책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를 『단 한 번의 삶』의 마지막에서 김영하는 들려준다. 퉁퉁 부은 손으로 그 문장을 필사했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하는 이 삶도 나의 삶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달라졌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도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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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
정지음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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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제목 봐라. 하루치의 슬픔과 스트레스를 책 사기로 날리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을 때 정지음의 신간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발견했다. 제목이 제목 한 책. 제목이 저러한데 어찌 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또책(나 또 책 산다.) 해야지. 보통 글쓰기 책이라 함은 야너두(야 너두 할 수 있다.) 같은 대책 없는 응원의 제목 혹은 비법 전수(**완성법, **필살기) 부류의 제목을 달고 있는데. 


정지음은 다르다. 먼저 묻는다. 글이 안 써지세요? 그러고 답을 듣지 않는다. 냅다 자신의 말을 한다. 저도요. 작가인 본인도 글이 안 써진다는데 분명 글쓰기 책인데 글이 안 써진다고 먼저 말해버리는 책이라니. 참 대책 없으면서도 즐겁고 재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이지. 나만 글쓰기가 막막하고 책상 앞에만 앉으면 나를 위해 추천해 주는 쇼핑 목록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보는 순간 책의 제목만 읽었는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이상한 원칙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읽을 땐 차례대로 읽는다. 병렬 독서는 개뿔. 직렬 독서도 제대로 못 한다. 한 권을 천천히 다 읽고 다른 책을 읽는다. 순서대로. 강박적으로.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는 달랐다. 먼저 목차를 훑어보고 그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챕터를 펼쳤다. 「첫 문장 노트 만들기」(121p)라는 소제목이 끌렸다.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글쓰기 비법이나 작법서를 흉내 내는 척하면서 정지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게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것이다를 자주 쓴다고 밝히고(맞아. 나도 그래. 것이다라고 끝내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쿠팡 상자에 반품이라는 손 글씨만 썼다고 집 안을 온통 둘러보아도 필기감 좋은 볼펜과 쓸만한 노트가 없었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글쓰기 책인데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없어서 좋았다는 것이다.) 줄줄줄 늘어놓는다. 


친구들 이야기, 반려묘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서 글과 관련한 이야기가 사알짝씩 있다. 그리하여 디게디게디게 좋다. 각 잡고 문장, 조사, 문법에 대한 진지한 글쓰기 책이었으면 텅 빈 나의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골라 첫 문장을 필사해 보라는 조언. 출퇴근 시간에 휴대전화로 단어, 문장을 써 보라는 조언. 쓰다가 막히면 가만히 있지 말고 샤워를 한다거나 다른 글쓰기를 하라는 조언.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을 때는 글의 형식을 바꿔 보라는 것도. 다 좋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정지음 작가와 다르게 나는 필기감 좋은 볼펜과 질 좋은 종이의 공책이 다량으로 있다.) 노트를 꺼냈다, 그리하여. 나는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지 막상 한다고 마음먹으면 한다. 읽으려는 책의 첫 문장을 적어 보기로 결심했다. 첫 문장을 옮기다가 필이 꽂히면 첫 문단을 첫 페이지를 옮겨 보기도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두렵거나 불안한 나의 감정을 방치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단 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소중한 첫 독자인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머릿속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감정을 종이로 불러 모은다. 너희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봐. 글이 되게 해봐. 슬픔과 분노와 불안이는 이때다 하고 달려 나온다. 빈 화면에 커서가 반짝이는 틈을 주지 않는다. 글을 써서 내일을 살 수 있다면 계속 써야지 뭐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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