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임시 보관 중
가키야 미우 지음, 김윤경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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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를 남기며 살지 말자고 다짐해 봐도 살아가기는 늘 후회의 연속이다. 어제 많이 먹었어. 그 말은 하지 말 걸. 거기에 가지 않았어야 했는데. 같은. 과거의 나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과거의 가장 깊은 후회의 순간이 있기 마련인지라 가키야 미우의 『인생 임시 보관 중』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중학생의 나로 돌아가는 이야기. 뻔한 시간 여행의 소재이긴 하지만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의 열망을 가지면서 살고 있기에 『인생 임시 보관 중』을 즐겁게 읽었다. 


63세의 마사미는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 차트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세계적인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오타니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을 한다. 인생의 계획표를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그만의 치열한 노력에 감화를 받기보다 남성이기에 가능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져도 오타니는 그의 커리어가 중단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녀 자신은 전문대를 나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정규직 일자리는 갖지 못하고 파트 타이머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남편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하다. 무엇을 하며 지금까지 살았나 슬픔과 후회로 가득한 어느 날 카페에서 오타니를 흉내 내어 만다라 차트를 적어간다. 지금 시대에 여성으로서 살아가기는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해보고 싶은 목표를 쓴다. 그러다 만다라 차트의 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눈을 뜨니 중학생이 되어 있다. 결혼하기 전 성인 기타조노로 불리는 마사미는 63세에서 중학생으로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 한 번 살아봤으니 후회나 미련 따위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솟아오른다. 각성한 기타조노는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인생 임시 보관 중』은 그런 소설이다. 시간 여행, 여성 인권, 남존여비 같은 닳고 닳은 소재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놓는다. 


영웅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학생으로 돌아간 기타조노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여성 비하의 노래 가사를 쓴 작사가나 문부성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지만 답장은 받지 못한다. 부단히 노력하지만 기타조노의 인생 2회차의 시간은 만만치 않다. 사이다 같은 시원한 에피소드는 없다. 읽어갈수록 답답하다. 나의 현실조차 바꾸지 못하는데 세상을 바꿀 생각을 꿈꾸다니 어리석다고 느낄 뿐이다. 


그러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답답함과 어리석음을 해소해 준다.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묘책을 들려준다. 두 번 살지 못하는 인생.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내가 벌인 일을 수습하면서 살아가야 할 오늘이 있을 뿐이다. 미래는 더더욱 알 수 없고. 그저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다. 오늘은 슬프고 싶지 않아.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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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 월급사실주의 2026 월급사실주의
강보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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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겠지만 서류 몇 장을 받는 일이 끝나고서야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2026년 소설집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첫 번째 소설 강보라의 「우리의 투어」를 읽었다. 총 네 장의 서류를 받기까지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언젠가 이 경험을 기억해서 소설로 써봐야지 혹은 리얼리즘 시로 써야지 결의를 다졌다.


「우리의 투어」에는 그동안 내가 겪은 일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나는 한 발 아니 두 발, 세 발 늦은 거다. 나만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착각했다가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첫 번째 소설 강보라의 「우리의 투어」에 자세히 나온다. 나 대신 작가님이 수고를 맡아주셨다. 제가 다른 평행 우주에서 강 작가님을 만났던가요. 왜 이렇게 다 알고 계시죠?)


일 년을 넘게 기다렸는데 한 시간을 못 기다릴까. 좁은 의자에 앉아서 이름이 불릴 때까지 초조해서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금만 긴장이 되거나 슬퍼지면 얼굴이 빨개진다.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 서류에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굽신거리는 게 성격이 된 것 같다. 살다 보니.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에 실린 소설들 전부 다 내 이야기 같아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읽는내내 얼굴이 뜨거웠다. 예민한 얼굴을 잘 달래주면서 살아야 하니 피곤하다. 소설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를 보고 흥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먼저 읽었더니 처음 읽은 소설은 성혜령의 「퇴직금 돌려받기」였다. 퇴직금. 퇴직금. 퇴직금. 


정신병 걸린 사람처럼 퇴직금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 이유는 「우리의 투어」에 자세히 나온다.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을 구매 혹은 대출해서 읽어보시겠죠. 안물안궁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서도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내가 먼저 쓰려고 했는데. 강보라 작가님이 먼저 써버려서. 다시 「퇴직금 돌려받기」로 돌아가자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나의 현재 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또 놀라움으로 한가득. 


책의 제목대로 일하면서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 맞다. 그럼에도 적어도 괴롭힘당하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다. 임금 체불은 노노노이고. 소박한 바람인데 바람으로만 남을 것 같아 두렵다. 


-경희야. 나는 사려고 사는 것 같아. 자꾸 뭘 사고 있어. 어쩔 때는 택배가 왔는데 뭘 시켰는지 내가 모를 때도 있다. 

-나 명품백 살까봐. 

경희의 말에 지우가 멈칫하더니, 임실장의 가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들어올 때 봤는데, 저거 뭐냐?

경희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 명품백이 필요한가봐.

.

.

.

-경희야, 가방 사. 백 개 사.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카드 할부로 긁어.

지우가 목련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가지기 어려운 건 저런 거야. 저 주먹만한 목련꽃을 살 수 있겠어? 사서 주머니에 넣고 한 달 두 달 간직할 수 있겠냐고.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박연준 「경희와 경희 아닌 것」中에서)


또 나는 열심히 하는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출근 시간 한 시간 전에 미리 가 있다. 가방에서 오늘의 간식과 도시락을 꺼내 정리하고 칡차 티백을 우려내서 물을 마신다. 경희 엄마처럼 말이다. 여름 바지를 주문하고 홍당무 얼굴을 진정해 줄 크림을 찾아다니면서 일을 한다. (옷은 꼭 매장에서 소재를 만져보고 사자. 바지 구매 실패해서 개우울.)


앞으로 내 미래 따위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보다 15초 쇼츠마저도 힘겹게 보여주는 휴대전화를 바꿀지 말지 고민하는 게 미래지향이고 건설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휴대폰 사. 백 개 사. 그게 뭐 별거라고. 그냥 카드 할부로 긁어.

그러려면 신용카드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될까. 카드 할부로 사는 것도 권력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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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 매일과 영원 7
김남숙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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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다 보니 매주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다른 요일에도 마셔볼까 시도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그러고서 일하러 가야 하니 술까지 마셔 버리면 이도 저도 안 되는 피곤한 하루를 보낼 상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금요일 밤은 관대하다. 내일이 토요일이라서. 오늘 밤만은 뇌 빼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셔도 된다는 여유로움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니 이번 주 금요일에도 술을 마시겠지. 생각했겠지만. 이번 주 금요일은 안 마실 예정이다. 예정이라서 마시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김남숙의 에세이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읽고 큰 아니 작은 그것도 아닌 중간 크기의 깨달음을 얻었다. 김남숙은 소설가인데 나는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고 에세이만 읽고. 언젠가는 소설도 읽겠지만 허름하게 누워서 읽은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이 내 마음을 쓰윽 만지고 갔다는 것.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읽은 독자들은 유추가 되겠지만 그는 술을 꽤 즐겨 하는 사람인 듯하다. 글의 시작부터 자신을 새해 인간이라고 밝히면서 여전히 술을 마신다고 했으니까. 중간에 가서도 끝에 다다라서도 술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잠을 잘 못 자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만 공허함을 이기지는 못하는. 소설가와 생활인의 자아가 충돌하면서 요즘의 나처럼 황동만(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울다가 잘 웃는 유쾌한 주인공)처럼 불안을 친구 삼아 사는 듯하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유추이자 추측. 


소설가가 되었지만 생활을 해야 하니 일을 다닌다. 치과에서 근무하기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방에는 책 한 권씩을 가지고 다닌다. 꼭 나 같네. 전부 읽지는 못하지만 가방에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놓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체 문자와 독촉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여기는 지옥이다. 가만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두 죽는다는 것. 그러니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애를 쓸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미지(드라마《미지의 서울》에 나오는 고졸에 서른, 백수이기도 한 주인공)의 할머니가 울고 있는 미지에게 해주는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알 수 없다는 말을 되뇐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숙취를 껴안고 일어나는 게 불안을 이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소설가의 하루로써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냥 그래도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부디 이런 오늘이 최선이었기를 바라는 것도. 술을 그만 마셔야 소설을 쓰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살짝 있지만 많이 먹고 많이 취해서 많이 괴로워봐야 그만해야지 깨닫는 거다. 평일에는 장시간의 노동 때문에 책을 읽기 힘들어 책을 사는 걸로 문학하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성공은 바라지도 않지. 애초에 그딴 게 나한테 올 리가 없으니까. 동만이의 말처럼 불안하지 않게 사는 거. 가만한 지옥에서의 유일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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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즈
무라야마 유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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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주인공 황동만은 20년째에 영화감독 준비 중이다. 대 여섯 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그 사이 자신이 속해 있는 8인회 멤버들은 감독 데뷔를 하거나 꽤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동만만 그러고 있다. 그러고 있다는 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는 뜻. 시나리오 작가도 감독도 되지 못한 채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소설 『프라이즈』의 주인공 아모 카인은 좀 다르다. 신인작품상 수상 이후 소설만 썼다 하면 초판 5만 부를 기본으로 찍는 인기 작가이다. 어느덧 그의 목표는 나오키상. 매번 작품 후보에 올랐지만 최종심에서 미끄러진다. 초판 5만 부를 찍는다는 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째 나오키상(작품의 대중성에 무게를 두는 상으로)만 받지 못하고 있다. 


황동만과 아모 카인은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드는 걸까. 


동만은 한 번뿐이어도 좋으니 감독 데뷔를 하는 것으로. 아모 카인은 나오키상을 받는 것으로. 허구의 두 인물이 내게 물어온다. 그렇다면 너는 너의 가치를 아느냐고. 가치를 증명하려 드는 것은 이미 나라는 존재를 한 번 인정했다는 뜻이다. 나는 나의 존재 가치조차 잘 모르겠다. 달력에 출판사 이름과 괄호 안에 편수를 적어 놓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지 오래인데. 문학동네(10). 이런 식으로. 


『프라이즈』의 인기 작가 아모 카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참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이런 생각이 내내 들었다. 인기 작가라고 거들먹거리고 나오키상 수상 발표 날에는 관계자들을 불러 놓고 긴장감을 조성하고 서점 사인회에서는 펜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까탈을 부리고. 소설이니까 이렇게 썼겠지 보다 이런 작가들이 있으니까 썼을 거야 사실에 기반한 것이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작가도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작품으로만 만나야지. 실망은 내 몫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해도 작품으로 갖게된 작가에 대한 호감을 무너뜨리고 싶진 않다. 『프라이즈』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 작가와 작품상, 출판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문학계라고 해도 나라만 다를 뿐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게끔 신랄하다. 출판계의 환상을 자근자근 밟아준다.


아모 카인 옆에 그를 흠모하는 편집자 오자와 히치로 역시 흥미로운 인간이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기본이고 너무 열심히 해서 주변에서 말릴 정도이다. 이런 점이 『프라이즈』의 후반부에 가서 흥미로운 지점으로 발휘된다. 책의 두께에 압도되었지만 읽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모 카인이 나오키상을 받을까 말까의 쫄깃한 긴장감 때문에. 


감독 데뷔를 하고 나오키상을 받으면 가치로워질까. 잘 모르겠다. 작가 데뷔도 하고 작품상을 받아 봐야 그건 알 것 같다. 무가치함의 끝에서(가치가 없어도 좋다는 뜻이겠지?)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무가치 함의 끝에는 빛나는 진실이 있으니 너의 무가치함을 끝까지 끌고 가라는 거 아닐까.) 동만의 말처럼 가치 없음에 의의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500원이라도 줍는 일로 기분을 바꾸며 살아가면 된다, 된다, 된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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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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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있는 곳에서 겨우 탈출하고 나서 인생 뭐 있어 하는 생각에 물욕이 터져 버렸다. 무언갈 살 때만 겨우 사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쿠폰을 주길래 하루에 한 권은 책을 샀다. 과자와 음료수, 커피도 사서 쟁여 놓았다.(지금은 전쟁 시기니까.) 그리하여 책꽂이에 책은 이중으로 꽂히고 옷장은 옷으로 빡빡하고 살은 토실토실 올랐다. 


그렇게 물건을 사서 쟁이는 사이 마음은 더욱 공허해지고 집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느 날 바닥에 묻은 얼룩을 닦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찌든 때로 바닥은 미끌 거렸고 몇 번을 닦아도 검은 얼룩이 계속 묻어 나왔다. 이마를 때렸다. 정신, 차리자. 잘못을 반성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다고) 바닥을 닦았다. 


서점 앱은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그동안 사둔 책을 키 순서대로(이상한 강박.) 꽂아 놓았다. 그중에 한 권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왜 이 책을 샀을까. 그날의 기분은 떠오르진 않았지만(아무래도 책 소개에 혹해서겠지. 이 책을 읽으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이곳에 책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읽어 나갔다. 


아베 아키코의 『카프네』를. 제목이 다소 생소한데 친절하게도 책의 뒷날개에 뜻을 적어 놓았다. (사소한 다정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 카프네는 '사랑하는 사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주는 행동은 뜻하는 포르투갈어. 소설 속 가사 대행 서비스 업체의 이름'이다. 그런 날 있다. 누군가 나의 집을 깨끗하게 치워주진 않을까. 집에 들어가기 전 기대하는 날이. 


어제와 오늘 아침의 내가 벌여 놓은 짓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엉뚱한 상상을 하는 날.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쓰레기와 머리카락과 바닥의 얼룩이 나를 반겨준다. 이제 그만 사야지. 필요한 게 아니라 필요를 만들어서 사는 거잖아. 나를 어르고 달래보지만 쇼핑 앱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멈출 수 없는 날들에 『카프네』가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남동생을 잃은 가오루코는 현재 제정신이 아니다. 사이가 좋았던 남동생이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여서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젊은 남동생은 유언장을 써 놓았다. 거기에는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일부의 유산을 전여친에게도 상속한다는 내용과 함께. 


누나 가오루코는 남동생의 유언을 들어주고 싶기에 언젠가 한 번 본 남동생의 전여친 세쓰나를 기다리고 있다. 유산의 일부를 받아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약속 시간에 늦은 세쓰나는 투박하고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동생의 유산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가오루코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세쓰나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가오루코의 집까지 그녀를 데려다준다. 


엉망진창인 가오루코의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대로 집도 치우지 않으면서 청소와 정리 영상을 열심히 본다. 보고 있으면 힘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카프네』는 가사 대행 서비스에서 일하는 세쓰나와 얼떨결에 그곳에서 자원봉사 일을 시작하게 된 가오루코의 변화를 보여준다. 오늘까지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쓰레기를 먼저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달라지는 내일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나도 할 수 있다. 너도 마찬가지야. 일어나 봐. 머리를 묶고 쓰레기봉투를 찾아.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담아. 힘이 들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고 다시 움직이자. 


가오루코와 세쓰나가 토요일마다 가정에 방문해 집을 치우고 음식을 하는 모습에서 기운을 얻는다. 사람은 먹고 잘 자는 것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토요일인 어제는 계속 잤지만 오늘은 일어나서 겨우내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사 놓은 책을 읽었다. 계속 읽어갈 예정이다



이렇게나 책이 많으니까. 우울해하지 말자!(권또또님의 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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