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각본집 - 초판 종료
윤가은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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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신작 영화 『세계의 주인』을 꼭 보고 싶었다. 민음사 티비에 나와서 책을 추천해 주는 밝은 모습에 반하기도 했지만 그전 영화들이 기억에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개봉관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근처 영화관에서는 상영하지 않았다. 영화가 좋다는 평이 많아서 꼭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각본집이 나왔다는 소식. 볼 수 없다면 읽어보자. 


영화의 각본집을 사는 일은 처음. 영화를 보지 않고 각본집을 읽는 일도 처음. 『세계의 주인』 속 주인공 주인이를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고 행복한 일이다. 나중에 OTT로 나오면 다시 보러 갈게, 주인아. 각본집이라고 불리는 『세계의 주인』 책은 예쁘고 근사하다. 첫 표지에는 '세계의 주인'이 표지를 넘기면 '주인의 세계'라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세계의 주인'에는 주인이가 없지만 '주인의 세계'에는 주인이와 다른 주인이들이 있다. 영화에는 가벼운 반전이 있다고 해서 '무스포 챌린지'를 지향한다고 한다. 큰 스크린 안에서 주인이와 다른 주인이들을 볼 순 없지만 나만의 장소에서 주인이를 만나는 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숨을 고르기도 하고 숨을 멈추기도 했다. 


윤가은 감독의 에세이 『호호호』를 읽어서 그가 글을 쉽고 솔직하게 잘 쓴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각본마저도 평이하고 간결하게 그러나 여운은 오래 남게 쓸 줄이야. 역시 재능은 대단하고 노력은 훌륭하다. 영화를 봐서 가슴이 뛰었다면 각본집 『세계의 주인』도 읽었으면 좋겠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세계의 주인』만 읽었을 때에도 영화가 얼마나 좋을지 짐작이 간다. 


밝고 활발한 주인이가 세계의 주인이었다가 솔직하고 사랑이 많은 주인은 세계와 하나가 된다. 세계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면 비로소 할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다. 상처를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한다는 주입식 위로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주인이는 실천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오로지 내가 될 수 있다고도 말해준다. 


좋아하는 영화의 각본집을 사는 이유를 알겠다. 활자가 영화로 바뀌는 놀라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아닐까. 책 속에 주인이는 다정하고 당차고 잘 웃는다. 영화 속 주인이는 더 사랑스러울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없을뿐더러 나의 세계를 이룩할 수도 없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나로 살아가기. 불행한 나도 행복한 나도 모두 나이므로.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주인. 이상 『세계의 주인』을 읽은 독후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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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명세서 - 자아에 가격 매기기
김나연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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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용카드가 없다. 카카오뱅크와 농협 체크카드 두 장으로 살고 있다. 신용카드의 좋은 점은 알고 있다. 잘 쓰고 잘 갚으면 신용점수가 올라가고 무이자 할부를 요리조리 활용하면 큰 금액대의 물건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오늘의 나는 못 갚지만 다음 달의 나는 갚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싫어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다. 신용점수가 지금의 나와는 무슨 상황인데 하는 것과 큰 금액대의 물건은 어떻게 사든 부담이 된다. 할부는 빚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간 목록에 올라와 있는 김나연의 에세이 『가난의 명세서』는 표지부터 직관적이었다. 표지에는 저자의 카드 승인 내역이 누적금액까지 그대로 올라와 있다. 제목도 그러했다. 최근 나의 화두는 가난이기에 이러한 제목을 보고서 책을 사지 않으면 번뇌를 계속 앓을 것 같았다. 책의 표현대로 '가난할 때는 이 궁핍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지니 이걸 잃을 날이 곧 올 것만 같아서, 매일이 불안했다'는 정확히 그간의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는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에 버금가는 진리였다, 살아보니.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가난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란 의심이 들 정도로 매사에 자신감과 의욕이 없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고르는 일에서조차 망설이고 주저한다. 가성비와 가심비 사이에서 고민하는 동안 결국 사지 않기로 한다.(책은 예외다. 한두 번 정도 고민하고 구매한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의 비유에 긍정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소비.) 계속 생각한다. 그렇게 아껴서 죽을 때 가져갈래?


아니. 안 가져가는 게 아니라 못 가져가. 그러니 궁상 좀 그만 떨어. 마음의 소리는 가차없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대신 체크카드를 쓰면서 합리적인 소비를 해보려고 하지만 한 번씩 마음의 고삐가 풀릴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체크카드 안에 돈이 있을 때나 가능해서 요즘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김나연의 『가난의 명세서』를 읽는 동안 6개월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심각하게 비교할 수 있었다. 


저자 김나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다. 평범이란 가장 이루기 어려운 삶의 형태라는 점도 깨닫는다, 살면서. 평범은 도달할 수 없어서 김나연은 스스로를 평범의 범주 안에 넣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책은 두 가지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할부로 결제한 10월 카드 명세서와 일시불 명세서로. 각각의 지출 내역에 그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현실에 닿아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추리와 스릴러 소설도 아닌 가난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이토록 긴장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가난의 명세서』는 현실을 압도한다.


되지도 않는 희망과 낙관을 달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과 빈곤이 주는 사회 경제적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해서 읽는 사람마저 심각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가난의 명세서』는 오늘 여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들을 비춘다. 카드 영수증으로 말이다. 쿠팡에서 5만 원 이상 사면 무이자 할부가 되고 (그래서 저자는 꼭 5만 원을 채워서 산다.) 구매처마다 무이자 개월 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이런 거 또 나만 모르고 있었지.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잘해서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김나연은 최선과 열심을 다한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살만해지면 병이 든다. 아등바등해서 겨우 돈을 모았지만 그 돈은 가족의 병원비로 쓰이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할 때는 궁핍의 끝을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질 때는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잃을 게 많지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이것마저 잃을까 싶어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저자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2025년이 아직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올해 읽은 에세이 중 제일 좋았다, 『가난의 명세서』는. 저자의 다른 책은 종이책이 절판되어서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그 책도 후기가 좋아서 기대된다. 


가난한 자들이 행해야 할 수칙 같은 건 없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고 암울하게 생각하지만 죽을 때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면 갖고 싶은 북 커버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2025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올해 제일 잘한 소비는 다이소 북 커버이다. 자꾸 책을 넣어서 읽고 싶게 만든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 책 좀 읽는다는 뿌듯함과 만족을 오천 원으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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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킹 오레오 새소설 7
김홍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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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엔 총이었구나. 그러니까 저번엔. 김홍의 『스모킹 오레오』는 시기적으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그의 첫 책이었다. 소설집이 나오기 전이었으니 아직 그의 우주적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공식적 문서는 『스모킹 오레오』가 처음이었다. 책은 돌고 돌아서. 왜 그렇게 어지럽게 돈대니. 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순 없나. 가만히 있다고? 도는 건 지구랑 미친 사람들뿐이라고.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 


어쨌든. 비유적으로 책은 돌고 돌아서 2025년의 어느 가을에 『스모킹 오레오』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찾은 것. 오레오를 피운다니. 호기심이 잔뜩 일었고 이기호 소설가의 추천사는 호기심을 더더욱 증폭 시켰고 가을장마가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면서 『스모킹 오레오』를 읽었다. 


이번엔 총이었구나를 쓰지 않은 건 첫 소설을 한참 후에 읽었다는 것. 총이었고 마트였고 울음이었고 말뚝이었다. 점점 진화하는 것 같은데 연관성이 딱히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소설이 산이 아닌 우주로 가기 위해서는 별의별 소재들이 등장해야 하니. 총이었네를 받아들여야 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그러니 고급 인력들이 간추려 놓은 줄거리를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클릭해서 읽으면 된다. 열심히 리뷰를 써보지만 전문 인력들이 써 놓은 책 소개 글을 읽으면 자괴감이 든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유튜브 프리미엄은 유지 못 하더라도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라. 언제 어떻게 아프고 다칠지 모르니까. 


총이 있고 총이 편지를 보낸다. 총에게 자아를 심어 주고 총은 자신을 만들어서 발사하라고 말한다. 성공하면 비트코인을 주겠다고. 설계도면에 따라 총을 만들지만 이상하게도 총은 총격범을 파괴한다. 그러다가 잘못 발사된 총알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다치거나 죽게 만든다. 그중에 오수안. 


총을 맞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후로 미각을 상실했지만 평소 먹던 오레오는 달랐다. 오레오를 먹고 바르고 피운다. 그러면서 총과 하나가 된다.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는 의리적 수호심은 없지만 총을 맞고 난 이후로 변해버린 자신이 낯설다가도 받아들이고 만다. 서울 곳곳에서 총이 발사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오수안과 총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이 모인다. 


『스모킹 오레오』는 그 뭐냐 소설적 핍진성과 개연성을 버리면 재미있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설이다. 김홍의 초기작이어서 덜 황당하면서 그런대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왜 하필 오레오인지는 따지지 말자. 표현대로 과자답지 않은 오레오의 고전적이고 기품 있는 문양이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급스럽고 귀족적이게 만들지 않나. 


근본으로 따지면 하얀 크림의 오레오를 먹어야 하지만 초코 오레오가 훨씬 맛있다. 변종을 사랑한다. 다 끊을 순 있지만 과자만은 끊지 못하겠어요. 『스모킹 오레오』의 총의 상징성을 분석해야겠지만 귀찮다. 총이 있었고 자신이 총이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쏘는 건 싫은 그런 총인데 자신을 없앤다고 한들 다른 총의 등장을 막을 순 없는 허약한 총이라는 거. 


그러지 말고 오레오나 한 대 피우러 가자. 오레오가 싫다면 신상 와사비새우깡이라도. 이건 피울 때 조심해야 한다. 톡 쏘는 와사비의 향 때문에 사레 걸릴 수 있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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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김홍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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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가 심각해질 때 (소설 읽기가 심각해질 때가 있을까. 사는 게 더 심각하지. 그럼에도) 김홍의 소설을 한 편씩 찾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괜찮다. 읽을수록 황당한데 황당함이 납득이 되면서 괜찮아진다. 처음으로 읽은 소설은 『엉엉』이었고 두 번째는 『프라이스킹!!!』. 위원회 3부작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인생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의외로 순서가 있듯이) 순서에 맞게 읽었다. 


위원회 3부작의 순서는 『엉엉』, 『프라이스킹!!!』, 『말뚝들』이다. 고급 정보 하나. 


본체가 떠나고부터 엉엉 우는 이야기(『엉엉』), 무엇이든 팔지만 다 팔지는 않는 아이러니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이야기(『프라이스킹!!!』), 어느 날 죽은 자들의 형상화 말뚝들이 도심 곳곳에 출몰해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이야기(『말뚝들』)까지. 읽으면서 당황스럽지만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는 담백함 때문에 그럭저럭 소설의 개연성 따위 생각하지 않게 해준다. 


『여기서 울지 마세요』도 특별하다. 김홍은 울음 귀신에 단단히 씌었나 보다. 『엉엉』 울라고 하는 것 같다가 『여기서 울지 마세요』 정중하게 울음을 그칠 것을 강요한다. 대놓고 『말뚝들』을 보여주면서 울어버리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울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는 여덟 편의 이상하고 낯선 웃음을 가진 소설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다. 개 두 마리를 공원에 유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 「실화」에서부터 크리스 아저씨를 트럼펫 연주자로 기억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소설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를 지나 혁명을 꿈꾸며 나간 과장의 빈자리를 대신해 회사의 축제를 이끌어 가야 하는 「신년하례」의 황당함을 지나면 계속 황당한 유머 같은데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소설들이 계속 이어진다. 


좀 이상하고 낯설지만 소설이 납득이 가는 나 자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의심도 해보지만 나란 사람은 소설을 읽기 전에도 원래 이상했다는 걸 깨닫고 나면 김홍 소설이 심상치 않다고 느낄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에는 이입을 할 수 없는 병을 갖고 있는지라 (그러니까 개연성이 부족한) 이야기가 산으로 가거나 우주로 가거나 시공간을 넘나들면 소설을 탁하고 덮는데 김홍 소설은 산으로 우주로 시공간으로 자유자재로 배경을 바꾸는데도 그러려니 넘어가면서 재미까지 느끼게 된다. 


거짓말인데 너무 거짓말이니까 차라리 믿고 싶어지는 그런.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생각도 없었고 항상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에게 뺨도 맞고 배신도 당하고 나서는 그러면 정신을 차렸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정말 뭣 같네 하면서 우는 날로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가 실패도 좌절도 허무함도 원래 표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받아들이며 택배 상하차를 하고 택시 운전을 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읽다 보니 아침에 귀신처럼 누워만 있진 않게 되었다는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 


정말 나를 찾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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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말 장례식 문학동네 동시집 96
김성은 지음, 박세은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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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아니 여기 한 권의 시집이 있습니다. 아니 아니 여기 한 권의 동시집이 있습니다. 책은 동시집이 시집이 되기도 합니다. 제목이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못된 말 장례식』이라니요. 시인의 말에 나오는 내용처럼 서점에 간 아이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인 『못된 말 장례식』을 소중히 골라서 집으로 나옵니다. 첫 동시집을 낸 시인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정작 아이였을 때는 동시집을 읽은 기억이 없네요. 무얼 하며 놀았는지도요.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왜 동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 아이는 자랐습니다. 어엿한 어른이 된 건 아니고요. 좀 어설픈 어른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매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찾고 있기도 합니다. 예쁜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 같은 동시집 『못된 말 장례식』을 펼칩니다. 


편지지를 사본적이 오래되었네요. 지금도 구름, 하늘, 나무, 집, 소녀가 그려진 편지지가 있겠지요. 그 편지지를 사서 『못된 말 장례식』에 나오는 시를 옮겨 적으며 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시부터 읽어갑니다. '처음엔 꿈이었어'로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엔 무거워서 껌으로 만들었다가 잘못 삼켜 똥이 되었습니다. 꿈은 껌으로 그리고 똥으로 마지막에는 시로 나타납니다. 놀라운 시적 흐름입니다. 


아마도 아이가 가장 궁금했을 시 「말의 장례식」은 오랫동안 나의 말생활을 반성하게 합니다. 말은 말[馬]이 아닌 말[言]입니다. 들판을 뛰어가는 그 말이 아닌 우리가 매일 하는 말이 죽습니다. 다들 믿을 수 없고 안타까워하고 후회하죠. 특히 손의 혼잣말이 인상적입니다. '손은 나만 바쁘게 생겼네. 앞으론 다 글로 써야 할 거 아냐.'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말을 할 때 신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긴박한 상황에서는 말이 필요합니다. 손은 그걸 알고 있어 말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못된 말 장례식』에는 말에 관한 시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꼭 필요한 말을 남기는 「말 꼬치」. 배배 꼬인 나의 마음을 풀어주는 다정한 한 마리를 해주는 「꽈배기 그네」. 시는 말의 그네에 태우고 나를 또 다른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갑니다.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과 엄마의 꿈을 응원하고 싶은 시간으로요. 어른의 시간으로 넘어온 아이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고 선언합니다. 


가을이라고 하기엔 조금 덥지만 가을이 문 앞에 도착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비가 많이 왔고 하늘은 높아졌으니까요. 문을 열어 가을을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잘 왔어. 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이제부터 너의 시간이야. 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못된 말 장례식』을 건네줍니다. 책의 첫 장이 살랑하고 넘어갑니다. 가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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