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소설이다. 딱딱한 마음을 건드린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스티븐 킹은 최고다. 놀랄만한 창작욕으로 소설을 써 내고 수준 또한 대단하다. 독자로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스티븐 킹을 읽으면 최고로 느낄 수 있다. 『고도에서』를 읽고 나서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소설을 써 낼 수 있다니 진부한 주제인데도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존경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죽음.


이 한 단어를 써 놓고 스쳐가는 많은 생각 때문에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죽는다. 심지어 나도 죽는다. 애써 생각하지 않은 척하지만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 죽어가는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온통 의문투성이다. 죽음 앞에서는. 얼마 전에는 건강 검진도 받았는데 이상 없음으로 되어 있는 우편물을 받아들고서야 살짝 안심했다. 아직은 괜찮다 이러면서.


『고도에서』는 스콧 캐리가 은퇴한 의사 밥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곧바로 이야기로 돌진하는 스티븐 킹의 시작답다. 스콧은 195센티의 거구의 남성으로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체중이 감소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밥에게 상의하러 간다. 체형에는 변화가 없다. 오랫동안 환자를 봐온 밥은 스콧의 몸을 보고 그가 109킬로그램일 것이라 추측한다. 틀렸다. 스콧은 96킬로그램이었다. 심지어 그의 옷에는 6킬로의 동전까지도 있었다. 그가 옷을 벗고 동전을 두고 몸무게를 재도 96킬로그램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스콧은 오랜 고민 끝에 말이 새어나가지 않을 상대로 밥을 찾아가 상의를 한 것이다. 밥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스콧은 매일 몸무게가 0.5킬로그램씩 빠진다고 했다. 정확하고 꾸준하게. 집으로 돌아가 홈페이지 제작에 열을 올리는 중에도 줄어드는 몸무게의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스콧은 이웃 부부가 신경 쓰인다. '숙녀분들'인데 동성 결혼을 한 이웃이었다. 캐슬록에 채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보수적인 분위기 탓에 식당은 곧 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


스콧은 자신의 몸무게가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도 이웃을 위해 일을 꾸민다. 그 일은 기적이고 위로가 된다.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길목에서 담담할 수 있을까. 나 아닌 누군가의 내일을 걱정할 수 있을까. 『고도에서』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일이 고통과 슬픔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가뿐해지는 것. 가뿐한 몸으로 하늘로 날아 올라가 남아 있는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 우리를 위해 폭죽을 터뜨려 주는 것. 스티븐 킹이 말하는 죽음에는 경이가 숨어 있다. 하늘 위에서 우리가 밥을 먹는지 책을 읽는지 잠은 잘 자는지 지켜보는 일로 죽은 자들은 사랑을 보내고 있음을 잊지 않기로 한다. 소멸, 상실, 소실이 아니라 가벼운 몸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죽음의 정의를 다시 내린다, 『고도에서』는. 스콧이 하늘로 날아가는 걸 보면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도 하늘 위에 있구나 안심했다. 길을 걷다 내 몸 위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 그리운 그이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중이구나 기적의 순간을 만끽한다. 대단한 스티븐 킹. 영원히 소설을 써 주세요. 어디서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무슨 글이든 매일 써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핑계로 가득한 무덤 때문이다. 피곤해서. 우울해서. 즐거워서. 시간이 없어서. 같은 되지도 않은 핑계로 내일의 나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 외의 활동은 지치지 않고 한다. 공부 자극을 받으려고 공부 브이로그를 보고. 그럴 시간에 문제집을 펴서 공부를 하는 게 나은데. 책상 정리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하면서 볼펜, 연필 줄을 맞춰 놓는다. 아니 그러지 말고 문제집을 펴서 밑줄을 그으라니까.


그동안 시집 읽기를 게을리했다는 생각에 시집을 잔뜩 주문해 놓고. 책이 오면 가지런히 꽂아 놓기만 한다. 정말 한심 두심 세심. 그리하여 오늘도 무언 갈해보겠다는 의욕뽕을 맞기 위해 책을 읽었다. 제발 그냥 시작하라니까. 일단 마음가짐이 중요하니까, 책을 읽는 거야. 마루야마 겐지의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는 한심한 나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문학에 대한 마음가짐. 문학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겠다는 허영과 허세의 일침을 가한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작가가 되겠다고 부리는 수작질에 따끔한 충고를 해준다. 좋아하는 작가처럼 쓸 거야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작품을 쓰려고 해야지 무슨 무슨 스타일을 따라 하겠다는 이상한 잡념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소설을 쓰겠다는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선배 소설가로서 모든 필살기를 알려준다.


한 작품을 썼다고 해서 바로 신인상에 투고하지 말라. 편집자의 요구대로 맞춰줄 필요는 없다. 편집자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직원일 뿐이다. 소설가들과의 교류에서 빠져라.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집필하라. 선인세를 먼저 요구하지 말라. 어느 장소에서든지 쓸 수 있게 노트를 구비하라. 하루에 두 시간씩 책상에 앉아 쓰라. 일단 쓰고 볼 것. 소설은 쓰지 않고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법. 소설을 쓸 도구란 연필과 공책이면 충분하다.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에서는 이렇듯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소설을 대하는 자세와 방법을 일러준다. 하루에 두 끼를 먹되 산책과 운동은 필수. 생활을 간소화하고 유명세로 문학을 대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문학은 사양길에 해당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한두 편의 작품으로 소설가 행세를 하며 어떡하든 얼굴을 알려 작품성이 아닌 다른 부수적인 것으로 자신을 알리려는 작가들이 허다한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첫 소설로 데뷔를 하고 그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한 편을 써서 작가가 되고 유명해졌다. 그 후로 더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고생을 했다. 소설 쓰는 일 외에는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판이 어떤 우스운 꼴로 돌아가는지 잘 아는 자로서 소설에 재능이 있고 직장을 포기하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후배 문인이 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에서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썼다.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매일 쓰는 일. 잠을 많이 자라는 말에 위로와 공감을 얻었다.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는 소설을 쓸 때 필요한 일 중 그것만 하고 있어서. 고독의 바다로 뛰어들 수 있어야 고독한 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말. 책을 읽는 행위는 오로지 혼자만이 가능한 일이라서 책을 읽겠다고 펼친 고독한 독자는 좋은 작품을 읽을 권리가 있다. 그들을 위한 사명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


비싼 만년필을 사용할 필요도, 이름 박힌 특제 원고지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구에 집착하며 이 세계로 들어온 이는 고작해야 삼류 소설가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문학의 본질과 핵심을 파고들지 못하는 탓에 겉이 나마 치장하려는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中에서)


장바구니에 담아둔 필통과 볼펜을 비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은, 미니멀리즘 테이크아웃 16
은모든 지음, 아방(신혜원)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요즘 맨날 하는 짓이 뭐냐면 누워서 정리, 미니멀리즘, 집 꾸미기 유튜브 보는 거다. 와.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많았어? 놀라는 건 덤. 정리도 대단한데 그걸 영상으로 촬영하고 편집하고 올린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신성해서 나를 넓고도 광활한 세계로 데리고 간다. 원형 테이블에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밥을 먹는 영상을 보다가 원형 테이블, 필요할 것 같은데 미니멀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얀 침구에 하얀색 벽, 깔끔하게 정리된 집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공주님이 그려진 분홍 색 캔디 베개를 물끄러미 보다가. 버려야 하나. 생각에 잠기고. 괜히 영상을 봤네 후회하고. 정리를 한답시고 보고 있는데 물욕이 자꾸 생긴다. 한심. 은모든의 소설 『꿈은, 미니멀리즘』에는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얘기해 줄게.」 완주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안 쓰는 것 열 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 마음에 꼭 드는 것 하나를 가지고 쓰자. 그거 따라 하다가 샴푸 통 하나까지 깔끔한 거로 다 새로 사고 있지? 무지에서 50만 원쯤 긁었지? 아님 이케아?」

「나도 얘기해 줄게. 그럴까 봐 천천히 진행 중이야. 이번 주에 옷 정리할 거야.」

(은모든, 『꿈은, 미니멀리즘』中에서)


주인공 심소명은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집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얀 벽지로 감싸인 방 한 편에 원목 스툴 하나가 놓여' 있는 사진.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는 소명. 먼저 저녁 시간을 먹방으로 탕진하게 하는 텔레비전을 과감하게 없앴다. 텔레비전이 놓인 벽에는 추억이 묻어 있는 영화제 포스터를 붙였다. 정열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스무 살 시절에 자봉으로 일했던 영화제의 추억이 담긴.


훌륭한 정리 선지자의 말대로 다른 포스터는 사진으로 남기고 버렸다. 잘하고 있다, 심소명. 그 후로 2단 행거를 해체하고 입지 않는 옷을 버렸다. 이제 책과 화장품. 친구 완주가 임용고시 공부 시절 빵을 사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소명은 화장품을 사며 회사 생활을 버텼다. 자신을 저기요,라고 부르는 동료의 행동에 충격을 먹고 열나게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꿈은, 미니멀리즘』은 집 정리를 통해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불안과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려는 건강한 시도를 보여준다. 꿈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한 채 소비를 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세태를 명랑하게 꼬집는다. 소명은 물건을 비우면서 꿈의 크기를 조정한다. 친구 채경과의 비교를 멈추고. 무료 드림을 통해 알게 된 동네 아는 동생이 된 동우가 준 씨앗을 키우며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다.


책을 많이 가지면 작가로 가는 하이패스를 얻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으로 책을 모았다. 비가 오는 일주일 내내 몇 권의 책들을 다시 추렸다. 욕심과 욕망, 욕구의 화신인 나여. 반성하라. 꿈을 크게 가져라, 어른들은 말했지. 대신 꿔줄 것도 아닌데 잘도 무책임한 말을 했겠다. 소명은 집을 정리하고 정리뽕 맞게 해준 원목 스툴 하나만 놓여 있는 그 집의 풍경을 다시 바라본다.


정리를 했는데도 그 집의 분위기를 낼 수 없었다.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의 집은 동향이라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짧았다. 햇빛이 문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쬐어 주는 게 햇빛인 줄 알았는데. 햇빛은 잘못이 없다. 잘못은 창과 향을 선택할 수 없는 나의 통장이 문제. 『꿈은, 미니멀리즘』은 그럼에도 우울하게 끝을 내지 않는다. 우리 집에 햇빛이 들어올 수 있다면 직접 내가 햇빛을 찾아간다.


꿈을 작게 가져도 된다. 그때그때 다르게 꿈의 크기를 조정해서 살아가도 문제없다고. 집을 한 번 정리해보면 꿈의 크기에 집착했던 과거를 햇빛에 널어 말리며 살균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특별관리대상자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한 실종이 일어나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사람들이 죽어간다. 유명 인사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는다. 실종과 죽음에 언론은 침묵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나 1000명이 넘게 죽었다. 그 후 3년. 심판과 처단을 전문적으로 한다는 해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오단은 해적에 가입하기 위해 접선한다. 주원규의 장편소설 『특별관리대상자』의 세계관이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정도로 가독성이 높다. 직접 소설 속으로 들어가 인물과 함께 공간을 누비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특별관리대상자』의 서사는 기시감이 드는 소재로 가득하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인과 관계를 밝히기보다 죽었다는 결과에 수긍하게 된 세상. 주원규는 사회를 이루는 질서라는 메커니즘에 허구적 상상력을 들이댄다.


좀 그럴듯하게. 『특별관리대상자』의 세계는 지금 여기다. 서울 도심 안에 마련된 사설 감옥, 미래 아파트. 주인공 오단은 해적에 가입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한다. 백화점 명품관을 폭파한다. 참으로 까다로운 가입 절차. 두목 해이수. 의사 출신 미우기. 회사 간부였던 남군. 탈옥자 장철수. 가출팸에서 빠져나온 리군. 해적단은 오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한다.


오단은 해이수의 암묵적 동의하에 해적단으로 들어가 참상의 실체를 목격한다. 사회 안정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자부하는 컴퍼니에서 벌어지는 비밀의 실체에 다가간다. '시스템 불온지수'를 개발한 컴퍼니는 인공지능으로 사회를 불안정으로 몰아가는 '특별관리대상자'를 선정한다. 사회 안정화라는 목표 아래 인공지능이 뽑아낸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처형한다.


해이수는 컴퍼니의 중간 관리자 강 실장이 '특별관리대상자'의 서류를 가지고 오면 납치와 심판, 처형까지 실행한다. 오단은 왜 그토록 해적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지 그의 목표는 무엇인지 소설의 끝에 가서야 드러난다. 반전의 실마리는 곳곳에 있고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별관리대상자』는 안정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탐구한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사회를 위해 회사가 필요하진 않은가. 인간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과연 컴퍼니의 설계는 누가 했는가. 몰아치듯 읽어가다 보면 마주하는 진실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소설의 세계라서 다행히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욕망의 끝은 없으며 침묵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현실의 움직임 때문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별관리대상자』는 외친다. 오단이 결국에 마주할 진실. 리군의 마지막 행동의 의미. 빠른 전개와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다. 자신이 심판자가 되게 하라. 그렇게 못하니까 소설가가 이야기로 이런 심판도 있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세상에는 나쁜 놈 천지인데 그걸 현실에선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대리만족을 느끼라는 건데 무섭긴 하다. 내가 그 대상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맨날 누워 있으니까. 인공지능 미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아무튼, 메모』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을 적어본다. 네 마음 내 마음 같은 글이었으므로.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 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론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만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어두움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만 아는 것들-거의 이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 실수했다는 것, 후회스럽다는 것, 말만 앞선다는 것, 유치하다는 것, 속이 좁다는 것. 수시로 자기 비하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 칭찬에 중독되었다는 것, 중요해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 무조건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 돈을 심하게 밝힌다는 것, 남과 비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 비판을 감당 못한다는 것,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것,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다는 것


한 번 읽은 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中에서)


공책을 사서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연필과 샤프, 볼펜까지. 그걸 사면 대단한 글을 써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언갈 쓸 수 있겠다는 활력을 돈으로 사는 기분이 들었다. 첫 장에는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잃어 버려도 그걸 보고 누군가 찾아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꼼꼼한 사람이 아니고 꼼꼼한 척할 뿐이라서 끝까지 공책을 채우진 못한다. 쓰려는 자가 아닌 쓰는 자가 작가라고 하던데. 나는 매일 쓰려고만 하는 한심한 사람이 될 뿐.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의 첫 시작을 읽고 가슴이 두근대서 곧장 잠으로 빠져 버렸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에 나왔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성악가의 공연을 본 아이의 심정을 감히 상상할 수 없어 꿈까지 꾼 것일까.


꿈을 꾸고 메모를 해 놨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썼을 텐데. 그냥 공연을 본 아이가 웃었다는 내용만 기억이 난다. 정혜윤의 안타까움처럼 '메모해둘걸' 하는 마음. 『아무튼, 메모』는 많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읽고 기억나는 문장을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쓸 수 없는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나대는 작가의 작품들. 카프카, 보르헤스, 리처드 플래너건, 호치노 미시오, 이탈로 칼비노의 글과 정혜윤 자신의 기억과 메모.


책을 읽는 건 열심히 한다. 책의 밑줄을 긋고 문장을 옮기는 일까지는 아직. 어쩌면 나는 책을 읽는 시간과 문장에서 파생되는 과거의 기억과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꿈의 포기가 아닌 꿈의 추구를 『아무튼, 메모』는 말한다. 꿈을 포기하는 건 쉽고 유혹적이다. 이런 현실에서 꿈의 추구가 가능해?라고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꿈을 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죽은 자들의 언어를 빌려 응원한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를 좋아하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존재하기가 아닌 살아가기로. 나쁜 일은 시 같은 것으로 바꾸며. 아무튼, 쓰는 시간 안에서. 공책을 펼쳐 꿈을 그리는 순간을 즐기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