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수필을 연재하는 동안 지인들이 삼막골과 관련된 얘기를 전해 왔다. 선배 작가 이도행 님은 우안 최영식 화백이 폐교에서 지낼 때 함께 기거하며 장편 집필을 했었다면서 그에 얽힌 재미난 갖가지 사연을 전해 왔다. 때가 되면 그 사연도 이런 연재수필 형식으로 담아낼 것이다.

친구 오석제는 정재식 씨 집에서 아래로 두 번째 집이 동창 김선종네 집인데, 그걸 몰랐냐?’고 했다. (산에 있는 집들이라 아파트처럼 아래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2. 지인 봉명산인이 산막골로 쓰는 게 옳다고 자료까지 찾아 얘기해 주었지만 사내(정재식)는 물론 나까지삼막골표기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보다는 ()’이 더 좋게 느껴지는 때문이 아닐까.

3. 한 시간 남짓 만나보고서 8회나 연재하며 쓰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어쨌든 수필 연재는 소설 연재보다 훨씬 수월하며, 연재 하는 동안 반응도 살펴가며 전개해 나가는 묘미가 있다. 이런 연재를 또 할 생각이다. 내 연재 수필 대상은 한두 분이 아니다. 나는 항상 픽션이 실제를 못 따라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연재 수필은 그런 생각의 바탕에서 쓰인다.

4. 연재하는 동안 정재식 씨가 SNS에 올리는 글·사진을 통해 삼막골 주민들의 정겨운 회식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통이 안 좋은 곳에 사는 불편함은 그만큼 도타운 정을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날을 맞아 주민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마을이 아직도 춘천에 남아 있다니 놀랍다.

5. 연재하는 동안, 항상 첫 번째로 좋아요를 표시해준 삼막골 사내 정재식씨한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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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봄날에 춘천에서1회 개나리 문화제가 열렸다. 행사의 일환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이 열렸고 뜻하지 않게 나는 시() 장원이라는 영예를 안았다.‘뜻하지 않게라는 표현을 쓴 건, 영문도 모르고 백일장에 참가한 때문이다.

당시 나는 춘천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급담임선생님이 수업은 걱정하지 말고 글짓기 대회에 다녀와라.”고 갑자기 외출(?)시킴으로써 얼결에 이뤄진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장원으로 뽑힌 내 시의 제목을 기억한다. ‘산길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국어사전까지 부상으로 받는 영광의 날, 며칠 후 아주 젊은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3학년 국어를 맡은 선생님이라 했다. 3학년이 8개 반이나 돼 국어 선생님 두 분이 4개 반씩 맡아 가르쳤는데 다른 반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네가 이번에 시에서 장원한 이병욱이냐?”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확인한 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시 공부를 하면 좋은 시인이 될 것 같구나. 내가 아는 시인이 한 분 있는데, 네 시 공부를 부탁해 놓을 테니까 앞으로 토요일 오후에는 학교에 남아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토요일 오후가 됐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깜빡 잊은 척하고 귀가해 버렸다.

 

아마 선생님이 우리 반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었다면 당장 그 다음 주 월요일 수업시간에 나를 보는 대로 야단을 쳤을 게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한테 국어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는데 어쩌면이런 맹랑한 녀석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자며 알아서 단념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사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호의를 외면한 건 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뒤에 따로 남아 하는 특별활동에 마음의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간 그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매일같이 학교에 남아 미술반 활동을 했던 고된 경험이 그것이다여하튼 그 바람에 선생님과 소중한 인연이 시작될 뻔했다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선생님이 전상국 선생님이라는 사실. 그 때 내가 말씀대로 토요일 오후에 따로 남아시 공부를 했더라면 일찍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며칠 전 나는 대한민국 소설가가 된 전상국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3학생이던 어느 봄날로부터 어언 반세기 넘게 세월이 흘렀다. 

 

각주: 소설가 전상국
주요수상
현대문학상(1977), 한국문학작가상(1979), 대한민국문학상(1980), 동인문학상(1980), 윤동주문학상(1988), 김유정문학상(1990), 한국문학상(1996), 후광문학상(2000) 등. 예술원 회원 (2019)
주요작품
《아베의 가족》《우상의 눈물》《우리들의 날개》《사이코 시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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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와 헤어질 시간이 됐다. 날이 저물기 때문에 헤어지려 한 게 아니다. 여전히 화창한 5월의 풍광이지만 귀갓길을 서두르게 된 건, 오랜만에 이뤄진 우리 부부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금속 공예가 정재식 씨가 산다는 삼막골부터 시작해서 오늘 근교를 다녀보자며 점심시간 다 되어 집을 나섰으니해 지기 전에 어디 다른 데도 한 군데 더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삼막골 오는 길에 그냥 지나친 추곡 약수를 들를 만했다. 우리 애들 어렸을 때 놀러갔던 추곡 약수. 이번 기회에 추억의 장소로써 찾아가볼 만했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내 말에 사내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오셨을 때는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며 술도 한 잔 하기 바랍니다.”

사내 집 어귀에 주차돼 있는 우리 차를 조심스레 뺐다.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갈 걸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 비좁고 꾸불꾸불한 벼랑길. 가다가 맞은편에서 다른 차가 나타나면 정말 큰일이다.

다행히 그런 일 없이 벼랑길을 통과했다.

삼막골을 빠져 나왔다.

추곡 약수에 들렀다. 20년 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반듯한 건물들에 포장된 도로에 주차장 시설까지. 하지만 평일이라 그런가, 인적이 없었다. 인적 없는 유원지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차를 돌려 부지런히 귀갓길에 올랐다.

차 안에서 아내가 말했다.

여보. 삼막골의 정재석 씨,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모습이야.”

맞아. 내 생각도 그래.”

당신 젊었을 때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러네.”

그렇다. 사내는 지나간 젊은 시절의 내 모습 같았다. 직장에 매이기 싫어서 한창 갈등 많았던 나. 강에 다니며 그 갈등을 겨우 가라앉혔던 것 같다. 그럴 때 흐르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던 와 삼막골 사내는 확실히 닮았다.

멀리 배후령 터널이 보였다. 오랜만에 내 과거의 어느 부분을 본 듯한 느낌 속에 터널을 향해 차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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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춘천에서 직선거리로 백 여리 떨어진 서울 지역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했다. 천둥에 벼락도 친단다. 그런데 아직 춘천은 흐린 하늘일 뿐이다.

아내와 춘심산촌 농장에 와서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흐린 하늘 아래 농장 풍경은 무거워 보이기만 한다. 눅눅한 습기 탓도 있고, 빛을 받지 못해 명도가 떨어진 탓도 있을 게다.

그 순간 내게 깨달음이 있었다.

인생이 춘심산촌 같구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는 동안, 밭의 작물과 주위의 숲이 보여주는 변화가 우리 인생의 변화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새싹이 나서 한창 자라나 울창한 모습이다가, 서서히 열매 맺고 하면서 어느 새 조락(凋落)의 길을 들어 마침내는 찬바람 맞으며 사라지는 춘심산촌의 풍경.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다는 말이 이런 것이겠다.

우리 부부 또한 대() 자연 속에 있었다. 대 자연 속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다. 무수한 선인들이 깨달은 바를 이렇게 흐린 하늘 아래 농장에서 뒤늦게 깨달았는지. 참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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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날,  춘심산촌에서  이도행 선배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푸른 하늘과 짙푸른 녹음  그리고 맑은 햇빛이 촬영현장에 함께했다.

 

 

이도행 소설가.
창작집 [봄내춘천, 옛사랑],[봄내춘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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