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많은 분들께 상처를 줬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간에요. 의도했던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제가 생각이 짧아 상처를 줬던 경험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철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철이 없는 거야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글을 쓰다보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의도의 선함이 결과의 나쁨을 사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남에게 상처를 줬다면 자숙하는 게 도리일텐데, 그 뒤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즐겁게 글을 써온 것 같아 죄송하기만 합니다.

얼마전 제가 쓴 글이 Kel님에게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그뒤 Kel님은 예명을 '^^'로 바꾸시고 잠적하셨다가, 얼마 후 다시금 'Kel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완전히 돌아오신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 그분의 서재에 가본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놓은 서재를 Kel님이 몽땅 비워버렸으니까요. 하루에 수십개씩 업데이트를 한, 보물창고에 비유될 만한 서재인데 말입니다.

Kel님의 방명록에는 Kel님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많은 팬들의 글귀가 남겨져 있습니다. Kel님이 그렇게 된 게 순전히 제 탓인지라, 그분들의 원성이 들리는 듯하더군요. Kel님에게도 죄송하고, Kel님을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께도 죄송합니다. 아무리 죄송하다고 한들, Kel님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지워지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Kel님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나니 계속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히히덕거리는 글을 쓸 때도 맘이 그리 편치 않더군요. 이 시점에서 제가 "Kel님이 돌아올 때까지 절필하겠다"고 하는 건, Kel님에게 또다른 부담을 안겨 주는 것이 되겠지요. 사과의 글을 남겼으니, 전 예전처럼 즐겁게 글을 쓰겠습니다. 대신 Kel님께 잘못한 일은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제 글이 또 다른 분에게 칼날이 되지 않는가를 여러번 살피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Kel님이 하루빨리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Kel님!!!!!!!!

 

제 말 들려요? 빨리

 

돌아오세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우맘 2004-03-0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몰랐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군요... 방금 kel님의 서재에 다녀왔습니다.
-.- .... TT
저도 일조한 것 같은데...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할지...흑.

플라시보 2004-03-09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만약에 약간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그 예감이 적중하니 안타깝군요. 저도 kel님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에 한참 잘 놀던 인터넷 공간에서 제 글이란 글은 모조리 지웠습니다. 부디 많은 상처 받지 않으셨길... 그리고 마태우스님의 진심어린 사과가 kel님께 전달이 되어서 다시 예전처럼 글도 많이 쓰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마냐 2004-03-0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초기 시절..사람들을 사이버 세상에서 따뜻하게 네트워킹 해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죠...하지만 때로 상처를 주는 일이 많더라는 사실을 목격하기도 하구..당하기두 하구..저지르기도 하구..뭐, 그런거 같습니다. '사과'라는 것두 그리 쉽지 않죠. 서재 초보인 저는 사건의 전말을 모르지만...마태우스님의 진심이 닿아 kel 님의 상처가 하루 빨리 아물고 더 탄탄해지시기 바랍니다.

마태우스 2004-03-0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흐흐흑....저도 님같은 혜안이 있었다면.....흐흐흑.
마냐님/으흐흐흑....

_ 2004-03-0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모르고 있던 사이에 그런일이 있었군요. Kel님께서 어여 상처를 수습하시고 마태우스님의 본심은 절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란걸 알아 주셨으면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면 좋겠네요. 인터넷 공간이란게 확실히 잘 모르는 이도 가깝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오로지 텍스트로만 이루어지고 그 글을 쓰던 분위기, 어조, 기분 같은게 모두 소외되는 경향이 있어 서로간에 알지못하는 상처를 주기도 하나봐요. 실지로 얼굴을 마주보며 했다면 그냥 서로 웃고 넘을수 있던 말이 글로 표현되니 곱씹고 또 곱씹으며 결국 감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경우 절대 드물지 않고 알게모르게 일어나는 그런 일 그리고 그게 표면화 되어 버렸을 때, 참 안타까워요....

2004-03-09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우주 2004-03-0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kel님께 전달해주고 싶군요. 저도 kel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마태우스 2004-03-1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Kel님은 다시 돌아와 주셨다. Kel님, 감사합니다.
 

 

 

 

 

 

조교 선생들이랑 짜장면을 먹고 이를 쑤시는데 한명이 이런다. "선생님, 코피 나요!"
휴지로 코를 훔쳤더니 피가 묻어나온다. 이런, 진짜잖아! 코피를 닦으며 예전에 들었던 우스개 소리 생각을 했다.

어떤 애가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고 있었다. 잠시 후에 보니 연필로 후빈다. 나중에는 컴퍼스를 코에 넣는데, 코피가 줄줄 난다. 선생이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다가 연필로 후볐지요. 그런데 지우개가 들어가는 바람에 컴퍼스로 빼는데 코피가 난 거예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코피가 나서 양호실에 누워있게 되었다. 코를 막고 누워 있다가 이젠 됐겠지, 하고 솜을 빼니 다시 코피가 난다. 그러길 두차례 더 반복한 후, 난 놀라서 달려온 어머니와 함께 큰병원에 갔다. 그 뒤부터 난 한번도 코피가 나본 적이 없다. 아마도 코 속에 혈관이 많은 부분-유식한 말로 키셀바흐 어쩌고 하는 그곳-을 지져버렸나보다. 코피가 안나니 좋은 점도 있지만, 가끔은 아쉽다. 입시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3 때는 누군가 코피가 났다하면 바로 스타가 되었는데, 난 한번도 그러질 못했으니까. 조교 때 사흘간을 밤을 새며 일했을 때, 코피가 나면 열심히 일한 것을 교수님들이 알아주실 텐데 하면서 아쉬워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다시 코피가 나다니. 어릴 때 지진 혈관이 다시 자라기라도 했을까? 그건 아닐 거다. 양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이건 내가 너무 코를 심하게 후빈 탓이리라. 공공장소에서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수시로 코를 후비는 통에 코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겠지. 피를 봤으니 오늘은 술이라도 한잔 해야 하거늘, 내일 큰 시합이 있으니 얌전히 집에 가련다. 코피가 났으니, 평소보다 일찍 가도 떳떳하겠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우맘 2004-03-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피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으련만.... 코피, 자주 나면 귀찮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아쉬운 상황이 있잖아요. '나 요즘 되게 피곤해~'라고 시위하고 싶을 때.
마태우스님의 코피는 아무래도 잦은 음주 전쟁과 과도한 서재 업데이트가 원인으로 사료됩니다만.^^ 푹 쉬세요. 마태우스님이 아파서 글을 못 올리면, 사는 게 심심할 것 같은 분들이 꽤 많은걸요. 해당되는 분 손 드세요~ 우선 나부터. 저요!

가을산 2004-03-0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에 있다보면 아이들이 신기한 것들을 코나 귀에 넣어서 오는경우가 많아요.
콩알, 플라스틱 총알, 면봉 부러진 것, 단단한 과자, 지우개까지... ^^

비로그인 2004-03-0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저두 마태우스님이 쉬시면 심심해요~ ^^ 코를 많이 후빈탓이라고 하시지만, 얼마전까지 계속 달렸던 것이 무리였던게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전 살면서 코피가 한번도 안나서, 꼭 한번 나보고 싶었답니다. 피곤하고 힘들어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으니 원. ㅎㅎ

갈대 2004-03-0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태어나서 한번도 코피라는 녀석을 만나본 적이 없답니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툴툴 2004-03-1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년전 쯤 제 막내 아이의 입과 몸 전체에서 심한 악취를 풍겨져 나온 때가 있었죠.구창이 생겨 그렇나보다 생각하고 죽염으로 맨날 입안 소독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씻기고 또 씻기기를 수시로 반복하며 애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혼자 고뇌하고 그랬답니다.ㅋㅋ
나중엔 2미터정도의 거리에까지만 다가가도 냄새가 나더군요.아이 얼굴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훑듯이 맡아보는 것이 매일의 일과처럼 되어버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주범이 코라는 것을 알았죠.
얼른 이비인후과를 데려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단방에 알더군요.핀셋을 집어넣어 순식간에 뭔가를 꺼내더군요.
꼬깃꼬깃 접힌 1센치미터 길이정도의 썪은 종이.
안도와 함께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즈음에 아이가 코가 답답해 후비는 걸 자주 목격했는데 제 아이들은 워낙에 코구멍 후비기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는데 딴에는 답답해서 그런 게 자꾸 밀려들어가 결국엔 답답함도 느끼지 못할 편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게지요.
미련한 엄마때문에 아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죠?ㅋㅋ

알라딘에 올리시는 글과 보내주신 책 넘 재미있어요.^^

플라시보 2004-03-1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코피라면 둘째가도록 절대 안나는 인간중 하나입니다. 여태 코피 제대로 흘린건 딱 한번 고3때 였습니다. 공부도 안한 니가 대체 왜 코피를 흘리느냐는 의혹의 눈초리라도 받게 학교서 흘렸으면 좋겠지만 혼자 세수할때 흐르더이다. 제 동생은 툭하면 코피를 막 쏟곤 했는데 그게 어찌나 드라마틱하면서도 부럽던지...

ceylontea 2004-03-10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코피 절대 안나는 인간입니다... 입술 같은거 부르트는 일 절대 없습니다.. 너무 힘든데.. 어딘가 아파 보이고 힘들어 보여야 "나 힘들어!!"하고 어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힘들어 보이기는 커녕.. 씩씩해 뵈니 이게 왠일입니까..
전 코피나고 입술 부르트는 사람이 부러워욧!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온 뒤 예비군 훈련이란 걸 한다. 나처럼 대위로 군대를 갔던 사람은 무려 7년이나 훈련을 받아야 한다(올해로 난 4년차다). 예비군 훈련을 할 때마다 난 예비군이 방위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인지 의문이 든다. 만사가 귀찮고 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 게다가 몸도 예전같지 않아 군복 바지의 호크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도 꽤 된다. 훈련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하지 말던지 할 것이지, 총을 어깨에 짊어진, 예비군 특유의 폼으로 하루종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일이다.

다행히 난 학교에 있다는 이유로 학교 옆 훈련장에서 단 하루만 훈련을 받고 만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2박3일간의 동원훈련을 받는다. 하루도 지겨운데 2박3일이나? 내가 혜택을 받긴 해도, 이건 정말 말이 안된다. 솔직히 난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소중한 법인데, 학교 사람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지금의 제도는 '사농공상'이란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틈만 나면 '형평성'을 잃은 예비군 제도를 비난해 왔다. 그런데.

엊그제, 우편물을 하나 받았다. '지휘서신'이라고 쓰인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는 2004년도 국군의학연구소 미생물반 기생충검사장교 직책으로 지정되어, 유사시에는 현역 장병과 동고동락하며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귀하는...국가의 부름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04년도 예비군 동원훈련은 5월경에 2박 3일 일정으로 국군의학연구소(대전 유성구/자운대)에서..실시예정이오니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그러니까 편지의 요지는 내가 기생충검사장교가 되어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동원훈련을 받는다는 거다. 이, 이럴수가! 내가 그간 역설했던 형평성은 2박3일의 훈련을 받는 다른 사람들을 하루로 단축시키자는 거지, 하루만 받던 사람을 사흘로 늘리자는 게 아닌데. 아니 갑자기 웬 기생충검사람? 편지를 보낸 국군의학연구소장이 내가 쓴 책을 너무 열심히 읽은 나머지, 기생충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원칙이 어떻고 하던 평소의 태도는 내가 희생자가 된 지금, 어디론가 도망가고, 별 둘로 예편한 내 친척에게 어떻게 좀 빼달라고 빽을 써볼까 하는 생각뿐이다. 내가 동원에 들어간 사흘간, 나이많은 벤지는 뭘 먹을 것이며, 대변은 어떻게 싸란 말인가? 5월의 그 좋은 나날을 다른 예비군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니, 죽고픈 심정이다. 난 절규해 본다. 이, 이건 음모야! 얄리얄리얄리성 얄라리 얄라!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4-03-09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하!!

soulkitchen 2004-03-0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저한테도 요즘 평소같지 않은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했습니다. 음모였군요. 이런 치사스런 방법을 쓰다니. 곧 저희 저항군의 힘을 보여줄 때가 올 것입니다. 붙으시지요, 저희 차력당에!!

진/우맘 2004-03-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하는 2004년도 국군의학연구소 미생물반 기생충검사장교 직책으로 지정되어, 유사시에는 현역 장병과 동고동락하며...후략.
진정, 우리나라에 '국군의학연구소 미생물반 기생충검사장교'라는 직책이 있단 말입니까? 뻐...뻥이죠!
흐음...저 직함, 매우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이름만 근사했지 울 나라 군인 아저씨들 채변 봉투 걷는 자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

비로그인 2004-03-0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력당!차력당!차력당!!

마태우스 2004-03-0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모두들 즐거워하시네요. 그래도 유일하게 걱정해주시는 분이 진우맘님, 역시 좋은 친구시군요. 흐흑. 폭스바겐님, 나중에 찾아뵐께요!! 솔키님두요. 아니지, 솔키님은 날 걱정해주신 건지도....

가을산 2004-03-09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박3일 하는 대신에 기간을 줄여달라고 해보세요.(7년에서 5년으로)

마냐 2004-03-09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막중한 임무..라니. 한번도 그런 영광을 누려본 적 없어 잘 모르겠네요. 음모라뇨. ^^
 
한 여자의 전쟁
린바이 지음, 박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여성'이 들어가는 책은 대충 사버린다. 남자라는 한계는 있지만 내가 여성의 열악한 처지에 공감하고 있으며, 거창한 실천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책을 사는 게 여성의 권리신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한 여자의 전쟁>이란 책도 그래서 샀다. 그런데 이건 영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시시콜콜한 경험담을 늘어놓은 이 책을 난 시종 짜증스럽게 읽었다. 앞부분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뒷부분은 답답한 주인공 때문에 혀를 끌끌 차며 읽었다. 주인공 여자가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한번 살펴보자.

여대생인 주인공은 혼자 여행을 나서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진짜 이름과 나이, 직장까지 다 알려주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이 혼자 하는 여행이라는 걸 강조해서 말했다" 여성에게 위협적인 사회에서, 이쯤되면 좀 모자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 다음 장면.

[주인공: 당신과 한방을 쓸 수는 없어요!
늑대: 써야 돼!
주인공: 그럼 당신은 다른 데서 자요!
늑대: 그래, 그렇게 하지.
주인공: 맹세해요!]
이 맹세를 '맹세'로 여기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르겠다. 결국 주인공은 알고보니 유부남이었던 늑대에게 정조를 빼앗긴다. 그러면 정신을 차려야지, 그다음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그런다.
[나는...독신남성은 위험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여전히 사실대로 대답했다. 나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으며...아는 사람도 없다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늑대 눈의 사내는 할 일이 없어 시간이 아주 많으니 나와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순간 나는 늑대 눈의 사내가 나를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나는...생각했다. "이제 끝장이구나!"
그 '끝장'을  만든 건 여자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남자가 훨씬 더 나쁜 놈이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구세주가 나타나 여자는 위기를 탈출하는데, 그 후의 행적을 보라. "그날 밤 늑대 눈을 가진 남자가...사진을 보여준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의 방으로 갔다" 정말 짜증나지 않는가? 여기서 늑대눈의 남자는 여자에게 약을 탄 우유를 먹이는데, 또다시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다. 그 다음 장면.
"시를 읽던 젊은이는 나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혼자서 여기에 왔으며 예정지가 어디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정말이지 당하고 싶어 안달인 여자인 듯하다. 다행이 이 남자는 착한 사람이라 별일이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남자가 착할 것이라는 지푸라기만한 확률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일은 해야지 않겠는가.

나중에 주인공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데, 물론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여자가 애를 가졌다고 하자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술하면 아프겠지?" "정말 성가시게 됐군" 이런 말을 듣고도 여자는 남자를 포기하지 못하는데, 여자가 애를 지우러 병원에 간 날, 남자는 젊고 예쁜 다른 여자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고도 한동안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기다린다. 문학에 조예가 없어서인지, 난 이런 류의 사소설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짜증만 나는 작품에 '전쟁'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인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따위가 무슨 놈의 전쟁이란 말인가? 내가 기대한 내용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난 제목에 속았다. 어떤 이는 이 책의 작가를 "중국현대문학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하지만, 이 작가-린바이-의 책은 앞으로 읽지 않으련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4-03-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로 인해 마이리뷰 90고지에 오르게 되겠습니다. 짝짝짝! 리뷰가 개편되어도 열편당 상품권은 변함이 없겠지요? 100고지에 오르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습니다. 지금 100번째 리뷰를 쓸 책을 자신으로 해달라며, 책들이 암투를 벌이고 있네요. 음... 과연 뭘 선택할지,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 원칙을 슬쩍 말한다면, 뭔가 그로테스크하면서 샤프한 책을 고를 예정이죠^^

2004-03-09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03-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별을 두개나 주셨으니 후하시네요. ^^
그리고, 리뷰에 댓글을 달면 댓글도 리뷰 보기에 뜨나요?

마태우스 2004-03-0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정말 짜증났다니깐요... 그런 소설을 격찬한 사람들은 또 뭔지...
가을산님/제가 좀 후합니다^^ 그리고...댓글을 달면 리뷰 보기엔 뜨지 않는군요.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와 시선 1
연세대미디어아트연구소 엮음 / 삼인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지난번 <친구>에 관해 연대 미디어아트연구소가 엮은 책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두권을 더 샀다. <공동경비구역>도 그중 하나로, 수백만의 흥행기록을 세운 이 영화를 나 또한 재미있게 봤었다. "최근의 문제작들을 중심으로 비평적.학문적 담론을 형성해 연구를 활성화하고자 한다"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대체로 글이 좀 산만한데다 <간첩 리철진>과 <쉬리>까지 아우르는 바람에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아쉬운 점이었다. 그렇긴 해도 별 생각없이 봤던 영화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 수확이긴 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조사관인 소피(이영애)가 중립국의 일원임을 빌미로 "한국인의 일-남북통일-은 한국인만으로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조바심나는 주장"을 영화가 하고 있다고 하며,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만의 폐쇄적인 결합이 수립"됨을 지적하기도 한다. "마초이즘의 아주 새로운 버젼"이라나? 생각해보면 여성을 배제한, 남성만의 영화는 많지만, 남성을 배제한 영화는 지극히 드물다. 그건 남자가 없으면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한 나도 마초 기질이 다분한가보다.

다른 저자는 쵸코파이의 예를 들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시장 북한에 남한상품을 수출하겠다는...남한의 숨겨진 욕망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한다. 쵸코파이 부분이 인상적이었긴 하다. 그렇다고 북한에 상품을 팔겠다는 욕망을 작동시킨다느니 하는 건 좀 비약이 아닐까? 쵸코파이 부분을 찍으면서 감독이 그런 상상까지 했는지 의문이다. 감독이 "그런 거 아냐!"라고 말하면 어쩌려고?

또다른 저자는 "(이 영화가) 민족주의를 미국 주도하에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침공에 처한 한국 사회의 처방전이자 가장 요구되는 이데올로기로 불러"온단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영화의 장면들이 주인공들간에 벌어지는 동성애의 알레고리라는 주장도 수긍이 간다. 어느 분의 말처럼,  남자간의 우정 어쩌고 하는 것도 사실 동성애의 숨겨진 욕망이 아니겠는가. "여자는 이수혁(이병헌)의 남성 히스테리를 길들일 수 없다.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38선 이북에 있는데, 그들이 다시 만나는 일은...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수혁은 그래서 자살했단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동성애의 본능이 어느 정도는 잠재해 있다. 그러니 동성애자를 괴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한 병사의 인간적인 면을 그렸다는 이유로 탄압을 하던 게 불과 십여년 전인데, 남북 병사가 서로 어울려 논다는 영화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우리 사회는 진보했다. "분단을 상업화했다"고 이 영화를 비난하는 저자도 있지만, 난 우리 사회가 분단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처럼 예비역 장병들이 영화사로 난입하는 곳이 아닌, 서로의 시각차를 인정해 주는 그런 사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