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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에서 보던 친구가 한 여자와 같이 날 찾았다. 다다음주에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내민다. 남자는 K대에서 기생충학으로 박사를 받았고, 포닥(박사 후 연수과정)으로 일하고 있다. 여자는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 박사 과정에 있다. 미생물학교실은 기생충학교실 바로 옆에 있으니 지리적인 요건도 결혼에 중요한 요인이었던 셈이다.
둘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특히 여자 쪽이 그랬다. 그 이유를 난 알 것 같았다. 실험실에는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 연구원에 대한 처우가 그리 후한 게 아닌 탓이다. 그래서 남자는, 심지어 나처럼 외모가 처지는 사람이라 해도, 그 희소성 때문에 주가가 폭등한다. 근데 그 남자는 얼굴도 잘 생겼다. 여자의 말이다.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데요. 다른 여자애들 단속하느라 아주 힘들었어요.”
내가 물었다.
“지금 기분은 어떤가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요.”
여자의 얼굴은 정말 행복감으로 넘쳐 보였다. 남자 역시 “부족한 게 채워져 완벽해진 것 같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전염성이 있게 마련이라, 이런 커플을 보면 덩달아 즐거워진다. 시간이 얼추 맞아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차 안에서 여자는 연방 남자 자랑에 여념이 없다. 한마디 한마디에 사랑이 넘친다. 천안의 명물인 호두과자를 안겨줬다. 그 작은 선물에 무척이나 고마워하는 표정이다.
그들을 보내고 오면서 생각을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함으로써 이제 그 비루함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삶이란 건 정말 비루한 과정일지 모른다. 맛있는 음식의 뒤안길에는 재료를 사고 조리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등의 노동이 존재한다. 부부의 안식처인 스위트 홈은 어느 정도의 수입과 가사노동이 결합되어야 유지된다. 방긋방긋 웃는 아이의 천사같은 미소 뒤에는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며, 잠을 설쳐가며 애를 돌봐야 하는 노동이 있다. 그러니 부부의 행복은 좋아하는 남녀가 결혼한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둘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물론 난 그 둘이 지금 느끼는 행복이 죽을 때까지 갔으면 좋겠다. 배려가 많은 남자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이슬만 먹어서 가능한 것은 아닌 법, 당장 걸리는 것이 남자의 취직 문제일 것이다. 남자가 포닥을 한 건 벌써 3년째, 적은 나이도 아니니 이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연구소가 아니면 대학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 쪽 전공이 그다지 자리가 많은 건 아니다. 그와 동갑인 의대 출신도 3년을 기다리다 올해 겨우 발령이 났는지라 그의 머릿속은 아마도 복잡할 것이다. 애라도 생기면 여자 쪽에서 박사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그래서 난 여자들한테 박사 받기 전에는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저런 문제가 걸리고, 여기저기 부딪히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비루함을 견디어 내는 게 바로 인생이 아닐까.
결혼을 앞둔 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란 인간이 너무 비관적인 탓이겠지. 걱정 그만해라. 니가 그딴 걱정 안해도 걔네들은 잘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