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섯권을 말아먹고 은둔하던 시절, 한 남자가 연락을 했다.
W라는 거대출판사에 다니던 그는 내 책이 늘 망하는 이유를 기획력의 부재에서 찾았다.
“제가 보기엔 가능성이 있어요. 저랑 멋진 책 한번 만들어 봅시다.”
W라니, 영세출판사만 기웃거리던 내게 W는 꿈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난 좌절감이 너무 깊어, 새로운 글을 쓸 수 없었다.
난 번번이 약속을 어겼고, 화가 난 그는 내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갑자기 그가 연락을 해왔다.
그땐 내가 ‘베란다쇼’란 프로에 나오면서 인지도를 올릴 때인데,
그가 내게 연락한 게 그 인지도 때문인지, 아니면 <기생충열전>이라는
처음으로 팔리는 책을 썼기 때문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는 W출판사를 나와서 독립한 상태였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 책을 한번 내봅시다. 제가 보기엔 가능성이 있어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글쓰기 책이냐 싶었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그의 앞에 앉았을 때 난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고,
시키는대로 해서 그때 진 빚을 갚고자 했다.
게다가 그는 안본 사이 나같은 사람을 다루는 법을 터득한 듯했다.
시간이 없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난 매주 일정 분량의 원고를 보냈는데,
그러면서 늘 회의에 잠겼다.
“이런 게 과연 책으로 읽힐 가치가 있을까?”
막상 만들어진 교정본을 보자마자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책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저자인 내가 재미있다고 느꼈다면, 그건 내가 자뻑을 많이 하거나 편집을 잘한 덕분이다.
늘 내게 가혹한 내가 자뻑일 리는 없으니 답은 당근 후자일 터,
그는 내가 보낸 원고를 완전히 재배열했고, 많은 수정을 거쳐
내 글을 읽힐 만한 글로 재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서민적 글쓰기>는 수많은 글쓰기 책들 중 그래도 괜찮게 팔린 책이 됐다.
이게 다 좋은 사장 겸 편집자를 만난 덕분이다.
출간계약서에 하도 사인을 많이 한 탓에 쓸 책이 잔뜩 밀려있는 와중인데,
그가 다시금 연락을 했다.
“내년이 대선인데, 정치 관련 책을 쓰면 어떨까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대통령 까는 글 말고는 정치글을 써본 적이 없지만,
과거와 달리 이젠 그가 말하면 믿게 된다.
다른 스케쥴 때문에 글작업은 계속 미뤄졌지만,
그때 말한 것처럼 그는 나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정된 날짜보다 겨우 석달 늦은 3월 초, 마지막 원고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전에 같이 작업한 적이 있기에 마음은 편했다.
“내가 쓰면, 그가 멋진 글로 바꿔주겠지.”
교정본을 읽으면서 난 그 기대가 또 들어맞는 걸 확인했다.
그 동안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다.
평상시 같으면 12월이 대선이니 4월에 나와도 별 상관이 없지만,
대선이 5월 9일에 치러지게 된 것이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지라
대선이 끝나고 나면 정치관련 책이 잘 안읽힐 것은 불보듯 뻔하다.
탄핵이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4월 24일에 나온 책이 불과 18일 동안 얼마나 팔릴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보다 훨씬 이 책에 정성을 기울여온 그분은
내가 싫어하는 걸 잘 알면서도 이런 부탁을 한다.
“선생님 블로그에 책 홍보 좀 해주면 안될까요?”
그게 내가 지금 여기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