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는 늘 이렇게 말한다.
“내 국시는 말야, 자유야. 자유.”
내가 반문했다.
“넌 국가가 아니잖아?”
그는 씩 웃는다. “그러면 좀 멋있어 보이잖아.”
자유를 숭상하기로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나, 그렇다면 나와 그는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까? 비슷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의 삶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는 될까? 그게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자유는 내가 원하는 자유와 많이 틀리니까.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는 새벽 6시 반에 나갈 정도로 열심히 바깥일을 하며, 그러면서도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그럼 부인은? 애를 본다. 하지만 그마저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친구에게 전화해서 “왜 빨리 와서 애를 보지 않느냐?”고 닦달한다. 그의 장인 역시 대단한 분으로, 사위를 전혀 백년손님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일을 시키고, 언젠가 일요일날 테니스를 치고 가는데 전화를 걸어 “너 이자식, 왜 아직까지 안와?”라고 호통을 친 적도 있다. 그가 시키는 일 중에는 자기 아들-그러니까 처남-을 위해 만들어 준 편의점을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친구는 이 모든 걸 군말없이 해내는데, 같이 술을 먹을 때 장모가 전화를 걸어 “아직도 안들어오면 어떡하냐?”고 야단을 치는 걸 보면 좀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난 정말 자유롭게 잘 살고 있어!”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는 복종의 다른 표현이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는 아내와 처가 식구들에게 복종하면서 그걸 자신의 자유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례 1. 어느 날 집에 간 친구, 아내가 자기 책을 몽땅 버린 걸 발견했다. 당연히 화를 냈고, 몇십분 동안 삐져서 말을 안했단다. 그러다 친구는 홀연히 깨달았다. 책을 버리지 않는 한 집은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걸. 그 이후 그는 책 버리기의 전도사가 되었고, 내게도 이렇게 말한다. “너 갖고 있는 책, 다시 볼 것도 아닌데 왜 갖고 있냐?”
사례2. 내 친구는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서 일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그는 공직에 나갈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아내는 자기애가 아들인 걸 알고 나서부터, 그 힘든 군대를 보내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원정출산을 하자는 아내와 그래선 안된다는 친구, 물어볼 것도 없이 승리는 아내의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친구는 깨닫는다.
“아, 아내가 옳았구나. 내가 내 자식을 너무 내 주관대로 키우려 했구나.”
그걸 깨닫고 나서 친구는 더욱 더 아내를 존경하게 되었단다.
딱 한번, 그가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갑자기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석달 후 어머니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 그는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고, 아내에게 조용히 얘기했단다.
“우리, 헤어지자.”
아내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당연하지 않는가. 아무리 세상을 몰라도 그렇게 복종적인 남편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른 남편이라면 매일 아침 열시까지 자고, 집안일을 안하는 게 가능할까? 아내의 대답을 들은 친구는 또다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떠올렸다고 한다.
“결혼도 하나의 계약이며, 계약 당사자 중 하나라도 반대를 한다면 그 계약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그 뒤 아들이 생겼다. 그는 아들에게도 무한한 자유를 부여할 생각으로, 공부를 하기 싫으면 안시킬 것이고, 미국에 가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보내줄 생각이란다. 문제는 그게 자기 뜻이 아니라 아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읊은 거라는 것.
그는 오늘도 말한다. “나의 자유는, 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