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당신 집에 가신단다. 우리집에 계시면서 겪은 서러움 탓인데, 특히 얼마 전에 일어난 빨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실 별 건 아니다. 세탁기 옆에 쌓아둔 빨래를 할머니가 세탁기에 넣고 빨아버린 것. 그때 우연히 집에 있던 내게 세탁기 사용법을 물어 보시기에 못하게 하려는 마음에 “제가 그걸 어찌 알겠어요.”라고 대답했었는데, 어떻게 사용법을 알아 빨래를 해놓으셨다. 뒤늦게 온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제 옷은 손빨래를 해야 하는데, 세탁기 넣으면 어떡해요?”

다음날이면 파출부 아주머니가 온다는 것도 그렇고, 나이든 할머니가 걸레까지 빤 것도 딸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인데, 엄마 옷까지 버려놨으니 화가 날만하다. 그전에도 몇 번이나 빨래를 하기에 몇 번이나 하지 마시라고 주의를 줬는데, 기어이 일을 치신 거다.


할머니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가만 있으면 뭐한다냐?”를 기본 모토로 삼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밥만 드시라는 건 죽으란 소리나 진배없고, 생각해서 빨래를 했건만 욕만 바가지로 먹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는가. 방문을 잠그고 칩거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셨나본데, 며칠 뒤 내게 한 말이 “나 집에 가련다.”였다.


나랑 엄마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활동성과 취미가 없다는 거다.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해 내가 몇시에 오건 무조건 밥을 차리려고 하고, 별반 도움이 안되는데도 집안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신다. 고집은 얼마나 세신지, 내가 밥을 먹었다고 수십번을 말해도 잠깐만 방심하면 어느새 밥을 차리고 계시다. 그때가 밤 12시건 새벽이건 상관없이. 오늘 역시 밤 11시에 들어왔건만, 할머니는 내 밥을 차린다고 부산을 떠시다 엄마의 제지를 받고는 삐지셨다. 무취미 역시 문제다. 일주에 한번은 할머니와 공원이라도 가려고 노력하지만, 일주 내내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 나머지 시간에,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할머니는 TV에도 전혀 취미가 없으시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일본 잡지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주간이 아닌 월간이다. 새롭게 가꾼 화분을 망가뜨리는 등 집안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은 일 말고는 취미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할머니는 이제 혼자서 사실 능력이 없기에, 집에 가신다는 호언이 실현될 전망은 거의 없다. 호시탐탐 아파트나 노리고, 할머니만 보면 돈을 내놓으라고 악을 쓰는 아들 집에 가 있을 수도 없다. 그렇긴 해도 행여 할머니가 욱 하는 마음에 가출이라도 할까봐 걱정이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누나나 여동생처럼 평소 할머니 모시는 것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할머니 좀 잘 모시지 그게 뭐야?”

옆에서 쭉 봐왔기에 할머니와 더불어 사는 것의 고충을 아는 나는 이해를 하지만, 직접 모시지 않는 제 3자는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어 어머니를 비난할 것이다. 할머니 역시 가끔씩 싫은 소리를 하는 어머니에게 악감정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일은 비교적 흔히 볼 수 있어,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는 시어머니가 시누들에게 며느리의 욕을 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된다.


아버님이 몇 년 째 병원에 계실 때의 이야기다. 매형을 따라 2년간 미국에서 살다온 누나는 귀국 기념으로 아버님을 문병한 자리에서 엄마를 붙잡고 대뜸 이런 소리를 했다.

“엄마는 너무 아빠 모시는 걸 소홀히 하는 거 아냐? 미국에는 저 병에 쓰는 좋은 약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저렇게 방치를 해?”

물론 누나는 그 많은 좋은 약 중 한가지도 사오지 않았다. 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건 무지하게 쉽다. 하지만 몸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어머니나 나이드신 분을 모시는 수많은 분들게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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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7-0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하지는 않으면서 한번씩 와서 입바른 소리 하기는 쉽죠. 근데 참 주변에 보면 그런사람이 많아요. 자신이 책임질 거 아니면 절대로 하면 안되는데 말이죠.

마노아 2006-07-0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건 무지하게 쉽다. 하지만 몸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저도 깊이 공감하는 말이에요.

비자림 2006-07-03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2학년때까지 함께 살았던 증조할머니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거의 100을 바라보는 연세셨지만 세수하고 난 후 꼭 냄새 좋은 크림을 바르셨고, 거울을 보시는 것도 좋아했어요. 자신을 가꾸고 소일거리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그런 건 참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할머니를 나이 드시고 모셔야만 하는 대상, 할머니로밖에 안 보는 경향이 있지요....
마태우스님, 안녕히 주무세요. ^^

중퇴전문 2006-07-03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의미에서의 장수란, 단순히 개인이 오래 살 수 있는 신체적 능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습죠. 고령화가 이미 깊숙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인 세대에 대한 '일자리' 와 '문화' 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와 실천이 더이상 늦어지면 안 되겠죠. 이기적인 관점에서라도, 우리 모두는 언젠간 늙으니까요. 수명의 증가와 산업적 인간으로서의 폐기 시한이 갈수록 반비례 곡선을 그리는 지금 상황 같으면.. 전례 없이 기나긴 노년을 집단적으로 맞이하게 될 가까운 미래가 더욱 걱정될 법한데 말이죠.

2006-07-03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03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7-0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께서 반려동물을 키우실 수 있도록 해봄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새나, 토끼, 거북이 같은 작고 정적인 동물들 말이지요.

건우와 연우 2006-07-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잘못했어요...
사실은 저도 말로만 정의의 사도였던적이 많은것 같아요. 에잇, 이제는 말은 줄이고 행동은 늘려봐야지!!

인터라겐 2006-07-0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시할아버지 할머니 서울로 모셔 오려고 했는데 평생을 시골에서 살던 분들이 서울살이 하라는건 일찍 가라는 얘기라고 하셔서 민망했답니다.. 모두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되나봐요.. 그래도 마태님이 계시니 할머닌 행복하신거죠..

비로그인 2006-07-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오래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내가 활동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기력이 저절로 다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엄마 아빠는 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라는 이중잣대를 저절로 들이대고 있습니다.

모1 2006-07-0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좋은 약이길래..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네요. 며칠전 신문인지 하여튼 고령인구 섹션이 신문에 나오던데..복지관이나 동사무소에 나이드신분들을 위한 강좌같은 것이 있다네요. 할머님 일본어 잘하실테니까..봉사차원에서 일본어 가르치시는것 하시는 것은 어떠세요?

세실 2006-07-0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 모시면서 많은 고생 하셨어요. 동생은 가끔 "엄마 할머니한테 소리좀 지르지 마" 하는데 전 동생을 나무랬죠. 모시고 사는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구.....
그나저나 노후를 위한 취미생활을 개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벌써 노후를 생각하다니..흑..

瑚璉 2006-07-0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건 무지하게 쉽다. 하지만 몸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어머니나 나이드신 분을 모시는 수많은 분들게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 추천입니다.

플로라 2006-07-03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간 할아버지 병수발과 병원비, 온갖 뒤치닥거리를 다했던 엄마와 아빠께 언제나 고모들이 불평만 늘어놓고 잔소리만 해댄 기억... 가족이 때로는 굴레였다고 오에 겐자부로가 그랬다는데...암튼 가족의 문제는 언제나 어려워요...

마태우스 2006-07-0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로라님/저희 고모도 그러셨지요. 집을 팔아서라도 니가 모셔야지 않겠느냐,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너도 죽으라고... 고모는 언제나 어려워요...
호비님/추천 감사합니다. 님의 추천을 발판으로 30위 안에 들어볼까요^^
세실님/그래요 모시고 사는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야죠... 님은 아직 노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아직 젊어요!
모1님/십년만 젊었어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어 아르바이트라... 누가 할머니한테 배우려고 하겠어요...
주드님/저도 그런데.... 정말 제가 노쇠한 건 상상만 해도 무서워요..
인터라겐님/와아 오랜만이어요. 그간 어케 지내셨어요.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이 계셔서 제가 열심히 글 쓴다는 거 아닙니까^^
건우와 연우님/울지 마세요. 우리 다 마찬가지죠 뭐.......저도 그런데요...
고양이님/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엄마도 그렇고 할머니도 저 때문에 동물에 학을 떼셨답니다..
속삭이신 분/잉글랜드는 못하니까 상관없지만 브라질이 진 건 충격입니다. 관심이 팍 사라지더이다.
속삭이신 ㅍ님/제사 때 뭐라고 하는 사람들, 정말 나쁜 사람들이어요. 음식 만드는 데는 손하나 까닥 안하면서 배내라 감내라... 저희 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중퇴전문님/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미래가 어찌될지 두려워집니다... 저도 노인이 되고야 말텐데...
비자림님/덕분에 잘 잤....사실은 서재응 야구 보면서 빔 쏘느라 잠을 설쳤다는... ^^ 다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군요
마노아님/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태우스의 상징이 말이니, 정의를 실현하긴 쉽겠지요^^
별님/공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님의 공감은 저의 기쁨이지요..^^
바람돌이님/경우가 다르지만 할머니가 저한테 어서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하는 것도, 할머니가 책임지시지 못할 거니 하지말아야 한다고 제가 늘 우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