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젠 정말 바쁜 날이었다. 월드컵을 봐야 하는데 도와줘야 할 애가 둘이나 생겼으니 말이다. 어제 스케줄은 이랬다.
-밤 11시 20분 귀가
-12시부터 잉글랜드-에콰도르 관전; 전반전 보면서 러닝머신 7킬로 뜀. 베컴 프리킥 말고는 볼 거 없는 답답한 경기.
-2시부터 여자골프 장정 선수 응원
[내가 TV를 켤 때는 알파라는 미국 선수가 선두, 장정은 2위였다. 난 알파에게 강력 레이져빔을 쏴댔다. 알파가 친 공은 불가사의하게 휘어 숲으로 들어갔고, 짧은 퍼트도 번번이 홀컵을 비껴갔다. 마지막 홀에 가기도 전에 알파는 이미 우승권에서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놈을 집어넣으면 다른 놈이 올라오는, 두더지 게임의 속성을 갖는 게 바로 골프, 알파를 경계하는 사이 베타와 감마가 어느 새 치고 올라왔다. 겨우 감마를 끌어내렸지만, 베타는 이미 공동선두로 경기를 마친 상태, 더 이상의 훼방은 불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장정이 잘하는 것. 내가 쏜 빔이 통했는지 장정이 17번 홀에서 친 두 번째 공은 거짓말처럼 홀컵 옆에 붙었다. 버디. 우승이었다. 연장전에 대비해 퍼팅 연습을 하던 베타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4시부터 네덜란드-포루투칼전 관람; 노란딱지 16장, 빨간딱지 네 장이 난무한, 축구를 빙자한 격투기.
-4시부터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김병현 선발경기 관람; 김병현의 공은 참 좋았다. 행여 주자를 내보내면 내가 빔을 쏴줬다. 7이닝 무실점의 호투는 그와 나의 합작품이었다. 축구가 끝나고 김병현도 마운드에서 내려온 6시 15분, 난 그제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한시간도 채 못되는 짧은 잠을.
에필로그
나를 아끼는 미녀가 말했다.
“잠 좀 자지 왜 그랬어?”
난 클라크 씨의 말을 그에게 들려줬다.
“초능력자의 삶은 한 개인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24년 전, 세계 초능력협회에서는 이 말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그 말의 준수 여부를 엄격히 감시한다. 초능력을 여자 후리는 데 사용한 인도 사람이 추방된 건 그 한 예다. 협회 회원으로 일정액의 회비를 내고 있는 나 역시 그 규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순간의 안일을 위해 잠을 자는 건, 엄밀히 말해 규정 위반이다. 돈 있는 사람이 밥을 사듯이, 힘 있는 이가 힘을 쓴다. 내 초능력도 그렇게 쓰여져야지 않겠는가?
* 초능력협회 회원 수는 358명이고, 클라크처럼 크립톤 행성에서 온 사람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협회 본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으며, 해마다 2월이면 거기서 총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엔 나를 포함해 9명의 회원이 있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 즉 기상예보가 틀린다든지,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대개 그 사람들의 소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