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본문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잡고 일할 때 타는 게 바로 8시 퇴근버스, 그 전에 떠나는 버스와 달리 차가 안밀려 오히려 시간을 버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버스의 맹점은 해가 진 뒤라 책을 볼 수 없다는 것. 물론 실내등이라는 게 있지만, 아저씨가 여간해선 실내등을 켜주지 않는다.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게 낙인 나는 할 수 없이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서 책을 읽곤 했다. 휴대폰 빛이라봤자 얼마나 밝겠는가. 그나마 30초마다 불빛이 꺼지니 수시로 버튼을 눌러줘야 하는데, 아무 버튼이나 누른다고 했는데도 난데없이 통화가 되어 난감한 적도 있다.


그런 아쉬움을 안고 살다보니 지하철에서 조그만 전등을 판다는 외로운 벤처사업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전등은 크기에 비해 겁나게 밝아 보였고, 책 읽기에 딱이었다. 2천원인가를 주고 구입을 했다. 그리고 오늘이 전등을 산 뒤 처음으로 8시 버스를 타는 날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웠다. 난 오늘 쓰고 간 메이져리그 모자의 챙에 전등을 끼웠고, 불이 꺼진 깜깜한 버스 안에서 유유히 책을 읽었다. 금방 고장나면 어쩌나는 걱정은, 아직은 기우였다. 전에 나처럼 버스에서 책을 읽는 취미를 가진 선생과 실내등에 대한 불평을 공유한 적이 있었다. 이제 실내등에 대한 불만은 오로지 그 선생만의 것, 같이 양재역에 내린 뒤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전등의 성공에서 보듯, 지하철에서 파는 것도 잘만 선택한다면 쏠쏠한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샀던 천원짜리 장갑만 해도 내가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데 얼마나 힘이 되었는가. 재작년 것이 투박한 검정 장갑이었다면, 작년엔 하얀 물방울 무늬를 입히는 등 미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좌우 구분이 없으니 세짝 정도 사놓고 쓰면 하나두개 잃어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선풍기 커버, 이것도 몇 개 사놓으니 여름이 물러갈 때마다 아주 유용하다. 엊그제는 돗자리를 3천원인가에 팔던데, 고수부지에 갈 때 쓰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차 트렁크에 2개가 들어 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다면 두 개 정도 샀을 거다.


물론 실패한 경우도 있다. 거기서 산 컬러볼펜과 형광펜은 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닳아 버렸고, 20개에 천원을 받은 면도기는 수염과 더불어 내 살까지 베는 예리함을 보여 버려지고 말았다. 우산은 금방 고장났고, 칫솔은 알고보니 구두솔이었다. 만득이 인형은 사자마자 얼마 안가서 터졌으며, 돌려서 색깔을 맞추는 큐빅은 돌리는 게 워낙 뻑뻑해 놀이기구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지하철 외판원들에게 희망을 갖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싸니까 사야지,라는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내게 필요한지 아닌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거다. 근데, 필요하다고 해서 샀는데 불량품이면? 이것 보시오. 필요하면 돈을 더 주고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지 왜 지하철에서 산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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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6-0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전등 있어요. 전 작년에 샀는데 공연할 때 드럼악보 걸치는 보면대에 끼우려고 구입했죠. 불 다 꺼지면 악보가 안보이거든요. ^^ 오늘 근데 그거 천원에 팔던데요 어떤 아저씨. -_-

바람돌이 2006-06-0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에 전등을 끼운 마태님 너무 어울릴 것 같아요. ^^
아 글고보니 저도 예전에 지하철에서 샀던 것 중 가장 인상적인것이 있어요. 그날은 저에겐 너무너무 중요한 시험날이었어요. 아침 일찍 시험장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는데 글세 본드를 팔지 뭐예요. 딱 붙으라고....필요는 별로 없었지만 기분좋아서 그 본드 사고 시험은 붙었답니다. ^^

히피드림~ 2006-06-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터넷이나 홈쇼핑에서 싼 물건 봤을때 그냥 '충동적'으로 막 사고 싶을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럴때마다 저 물건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지, 그리고 사고나면 얼마나 자주 쓸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의외로 정말로 필요한 물건은 많지 않더군요. 마태우스님 말씀에 동감해요.^^

세실 2006-06-0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마태님 같은 분때문에 아직도 외로운 벤처사업가가 많은가 봐요~
오늘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슬그머니 옆에 오더니 "사모님 00 하나 사세요" 하더라구요. 그 00가 안들려 굉장히 궁금했지만 물어볼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어요. 2천원이라고 하던데 살껄 그랬나? 뭔줄 알아야 사지.....

가시장미 2006-06-08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칫솔은 알고보니 구두솔이었다.-> 정말정말? 으흐흐흐 나도 지하철에서 오이자르는 기계 사서 오이맛사지 할 때마다 사용했는데 얇게 잘 잘려서 되게 좋았어요! ㅋㅋ 근데 모자에 전등끼우고 책을 본다? 정말정말 특이한 사람으로 보이겠다..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느끼지 않았는지 궁금하네! 광부의 후예인줄 알았을꺼야. ㅋㅋ 참! 우리 반말하기로 했었는데.. 그거 아직도 유효한거지? 캬~ [ 버르장머리 없는 장미_-_)~ ]

비로그인 2006-06-08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하철을 탈 때면 늘상 국민 클래식 베스트 100 그런 것만 팔고 있던데, 생각보다 다양한 물품들이 판매되는군요! 필요한 물건을 더 싸게 구입하면 정말 기분좋을 것 같아요.

조선인 2006-06-0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에서 샀던 것 중 제일 아쉬운 게 스트레스 해소용 달걀과 토마토 장난감이었어요. 정말 유용했는데, 왜 또 안 파나 몰라. -.-;;

짱구아빠 2006-06-0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한림공원인가요??...저도 내일 제주도 간답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거시기 합니다만... 저는 지하철에서 파는 상품을 일체 사지 않는데요,우선 물건에 하자가 있을 때 a/s를 받는 게 쉽지 않을 듯하여서요....

paviana 2006-06-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비슷한 전등 전철에서 샀어요.천원짜리로......글구 전 명함꽂이도 하나 사서 잘 쓰고 있고, 큐빅도 샀었는데 역시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어요.ㅎㅎ 저도 꽤 많이 샀지요? 항상 그 오이 써는 칼을 보면 갈등했는데, 장미양이 잘 된다고 하니 담에 보면 사봐야지.~~

하늘바람 2006-06-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 전등 2천원주고 샀는데 집에 오니 안되더라는 아주 슬프고 속상한 이야기

Mephistopheles 2006-06-0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의 외로운 벤쳐사업가 노마진을 많이 애용하시는군요..^^

플레져 2006-06-0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꼭 외로운 벤처사업가들에게 순간접착제를 사고 싶은데,
매번 올드팝송, 만득이, 칫솔 파는 분들만 만나요.
한번은 절묘하게 만났는데... 너무 멀리 계셔서 부를 수가 없었어요.
손들까 말까 망설이던 와중에 이미 다른 칸으로...ㅠㅠ

박예진 2006-06-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마태우스님의 인생은 너어어무 즐거워 보여요!

비로그인 2006-06-0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핫핫 너무 재밌어요 쿄쿄쿄 ( 세실님얘기도 압권입니다 ㅋㅋ)
만득이 사시는 마태님 상상되서 ㅎㅎㅎ

마태우스 2006-06-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서린님/더 열심히 하겠습니다...글구 만득이는 절대 사지 마시어요^^
박예진님/님이 제 나이쯤 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사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플레져님/순간접착제 그거, 안쓰고 오래 두면 굳어버리던데...가까운 철물점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메피님/아무래도 그렇지요 호호 제가 워낙 알뜰해서요
하늘바람님/제 일처럼 슬퍼요. 미녀를 속이다니 나쁜 사업가네요
파비님/아 맞다 명함꽂이도 잘 쓰고 있어요. 지하철은 정말 5일장 같아요^^
짱구아빠님/아 예리하시네요. 에이에스가 안되긴 하지만, 한달 이상만 쓴다면 본전은 뽑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조선인님/님도 좋은 추억이 몇개 있군요!! 혹시 요요는 어떤가요?
주드님/의외로 보석이 많답니다. 무조건 안좋다는 편견은 버려야 하죠^^ 근데 대일밴드 같은 건 절대 사지 마시어요!
장미님/광부같다...호호. 그렇네 정말! 그래도 책 잘 보고 갔으니 좋아.
세실님/그사람이 사모님을 몰라봐서 팔 기회를 놓쳤군요. 글구 사모님보단 아가씨가 더 올바른 호칭이라 생각됩니다
펑크님/아아 제가 존경하는 펑크님,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바람돌이님/보, 본드.... 제 생각엔 그냥 님 실력으로 붙은 거 같은데요...-.0-
아프님/아 제가 바가지 썼군요. 천원이라...으음.... 재벌2세인 게 티가 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