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음, 서박사라....

 

 

 

마신 날: 1월 4일(수)

마신 양: 소주 한병 반, 맥주

 

<허삼관 매혈기>에서, 막 매혈을 한 방씨가 손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친다.

“여기 볶은 돼지 간 한접시하고, 황주 두 냥 가져오라구. 황주는 따뜻하게 데워서 말이야.”

그 장면을 눈여겨 본 허삼관은 나중에 매혈을 할 때마다 같은 주문을 되풀이한다.


작년 어느 날, 공덕동에서 만난 기자는 나를 허름한 밥집으로 인도했다. 탁자에 앉자마자 그는 소리쳤다.

“여기 하나, 하나 주세요. 소주도 주시구요.”

난 그가 도대체 뭘 시켰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제육볶음 한접시와 김치찌개 하나를 의미한 거였는데, 값도 싸지만 무엇보다 맛이 기가 막혔다. 반찬으로 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까지 가미된 환상적인 저녁 식사, 난 그래서 그와 소주 세병(네병이던가?)을 나누어 마셨고, 술로 인해 관대해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 버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가끔씩 그 집의 음식이 어른거렸다. 운동을 마친 늦은 저녁, 친구를 만나 먹은 냉면이 양에 안차서, 좋은 데가 있다면서 공덕 역으로 끌고 갔다. 그 집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들어가자마자 난 이집이 그집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난 오래된 단골처럼 외쳤다 (탁자는 안두드렸다).

“여기 하나하나 주세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와 달리 아주머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친구가 묻는다.

“주문이 접수는 된 거냐?”

난 고쳐서 말했다.

“저기요, 제육 하나랑 김치찌개 하나 주실래요. 소주도 하나 주시고요.”

여전히 아주머니는 시큰둥하다. 그제서야 난 뭔가를 깨달았다. 그때는 아홉시였다.

“아, 혹시 여기 금방 문 닫아요?”

“열시에 닫아요.”

“그 전에 갈께요.”란 말을 하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풀렸다.


9시 반쯤 소주 한병을 더 시켰을 때도 아주머니는 “시간이 없어서 안된다.”고 했다. 금방 마시겠다는 말을 한 뒤에야 겨우 한병을 더 줬다. 문 닫을 시간에 와서 죽치고 버티는 사람이 얄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좀 억울했다. 우리가 밥을 시킨 뒤에 단골로 보이는 두명이 왔는데, 그들이 탁자에 앉자마자 “하나하나 주세요.”라고 했을 때 아주머니는 흔쾌히 주문을 받고는 음식을 내왔다. 우리가 두병째의 소주를 시켰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 손님에게도 “왔어?” 이래가면서 밥을 내왔다. 그러니 억울하면 단골이 될 일이고, 단골이 되기 전까지는 단골이랑 동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날, 9시 50분에 나왔다.

 



 

* 그날 그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운동 후라 그런지 소주를 마셔서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난 4개월 반을 길러온 머리를 잘랐다. 그 다음날 신년회에 그 머리로 가면 안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 떄문에. 그러니까 이게 내가 인생에서 가장 머리가 길었던 날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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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1-0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지껏 술일기 중 최고예요.

chika 2006-01-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단골, 과 상관없이 두툼한 계란말이 먹고싶어 미치겄슴다... (아, 배도 고푸고~ ㅠ.ㅠ)

라주미힌 2006-01-0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입대하기 전날의 모습같네요..
ㅎㅎㅎ...

세실 2006-01-0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4개월동안 길렀다고요????? 음냐.....자유인~~~
마태님 그나저나 겸손의 오뎅탕은 안그리우신가요? 클리오님 떠나기 전에 한번 뭉쳐야 하는데....마태님만 믿어요~~~

싸이런스 2006-01-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서박사네요! 웬지 날림 냄새가 나는군요!

진주 2006-01-0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머리가..상당히..길었군요^^;
그 밥집의 아줌마는 무슨 편견이라도 갖고 계신 건 아닐까요? 술 마시는 시간과 머리카락의 길이는 비례한다....이런 뚱딴지같은 편견..?

마태우스 2006-01-0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아무래도 그런가봐요 호홋.
싸이런스님/그죠? 저도 그런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답니다.
세실님/오뎅탕 겁나게 그립습니다. 비 오는 날로 한번 잡아볼께요
라주미힌님/그렇죠?? 제가 20대 같다는 소리로 이해할께요^^
치카님/죄송합니다. 제가 언제 계란말이 대접할께요. 제주도 가서요.
하루님/제가 올해 받은 댓글 중 최고입니다.

하늘바람 2006-01-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우셔요. 그런데 그 밥집은 어디일까요? 제가 제작년까지만해도 공덕역으로 출퇴근했는데 왜 몰랐을까요? 식권을 가지고 밥을 먹어서 그럴까요? ^^ 궁금합니다

sweetrain 2006-01-0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두산모자군요!!!!!!!!!!!

kleinsusun 2006-01-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계란말이 디따 좋아하는데...토마토 케챂도 뿌려서....
신년을 맞아 술일기가 훨씬 재미있어졌어요.^^

클리오 2006-01-0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정말 머리도 길고 얼굴도 빨갛네요... ^^

모1 2006-01-0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마태우스님의 올해 술마시는 목표는 깨질 것인가~~~

moonnight 2006-01-0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그 아주머니 왜 그러신대요. 마태님 얼굴 보면 불친절하기가 쉽잖았을텐데요. ^^ 아,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생각나요. ;;

마태우스 2006-01-0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사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그날따라 좀 불쌍해 보였습니다. 김치찌개에 소주라, 멋진 조합이지요.
모1님/100번 중 벌써 다섯번을 써버렸어요. 첫주에!!
클리오님/저 치렁치렁한 머리를 자를 땐 서운하더이다.
검은비님/으흑, 제가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이셨나봐요...
수선님/어맛 그래요?? 칭찬받으니 좋습니다.
단비님/아, 저 모자 야구장 갔을 때 3천원 주고 산 건데요, 진짜 후져요. 모자로서의 기능을 잘 못한다는..
하늘바람님/6번 출구로 나가셔서 길 건너시면 됩니다. 겉보기엔 허름한 집이어요

Mephistopheles 2006-01-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서 범상치 않은 강렬한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마태우스 2006-01-0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그죠? 저도 오늘 아침 사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깎은 머리가 어느새 익숙해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