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를 마무리해가는 서글픈 시점에서 지난 십년을 되돌아보면, 내게 있어서 삼십대의 삶은 참 아름다웠다. 슬퍼서 죽고싶은 상황이 왜 없었겠냐만은,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누리는 행복이 더 소중한 것일게다. 그 행복의 한 부분은 바로 술, 남들이 평생 마실 술을 지난 십년간 마셨음에도 내가 쌩쌩할 수 있는 이유는 서른 전까지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던 덕분이다. “술만 안마셨다면”으로 시작되는 온갖 가정들이 있다. 디카가 생겼을 거다, CD 플레이어가 있을거다, 디지털 TV도 살 수 있었다, 심지어 집도 한 채 더 있었을 거다 등등. 하지만 그런 것들을 위해 술을 안마셨다면, 내 삼십대가 과연 행복했을까?


내가 술을 마시는 원칙 중의 하나는 ‘신뢰’다. 술을 마시기로 약속을 하면 전시, 사변에 준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약속을 지킨다. 나도 인간인지라 막상 술을 마시러 나가려면 만사 귀찮고 싫을 때가 여러 번이다. 날씨가 겁나게 춥다든지, 몸이 피곤하다든지, 아니면 지갑에 돈이 별로 없다든지, 술을 안마실 핑계는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 추우면 옷을 두껍게 입으면 되고, 피곤할 때 소주 한잔은 좋은 회복제이며, 돈 대신 카드도 있다. 가장 어려울 때는 몸살이 났을 때. 일년에 두 번 정도는 꼭 몸살을 앓는데, 그게 술약속과 겹칠 때가 있다 (왜냐면 술약속은 평균 이틀에 한번 있는데 몸살은 이틀 정도 가기 때문에). 너무 심하면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지만, 웬만하면 가려고 노력한다. 내 가방 속에 타이레놀 ER이 항상 들어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몸살이 도져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던 토요일(12/17), 어머니는 “몸도 아픈데 어떻게 술을 마시냐.”고 날 말리셨다. 그때 내가 했던 말, “저에게는 아직도 열두알의 타이레놀이 남아 있습니다.” 난 타이레놀 두알을 먹고 술자리에 갔고, 엄청 마셨고, 나 혼자만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날 술자리가 워낙 재미있었기에 후회는 없다.


속이 너무 안좋을 때는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먹고 술을 마셨고, 16일간 연속으로 술을 마신 적도 있다. 97년 303번, 98년 305번의 쾌거는 웬만한 사람은 이루지 못할 쾌거였다. 하지만 이제 열흘만 있으면 나의 삼십대는 끝이 난다. 한 살 더 먹는다고 크게 달라질 거야 없지만, 몸을 전혀 아끼지 않는 지금같은 생활방식은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 생각은 이미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다. 술마시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작년 178회, 올해는 현재까지 158회, 남은 술자리를 세어보니 올해는 168회 정도 마실 것 같다-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경우도 크게 줄었다(올해 한 열번 정도 필름이 끊긴 것 같다. 7% 정도?). 내년에는 더 줄이고, 그 다음해에는 좀 더 줄일 것이다. 술을 줄이는 대신 난 그간 못했던 문화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다. 윔블던 경기를 보러 영국에 간다든지, 미국 가서 야구 경기를 보거나, 노르웨이에 가서 뭉크 미술관을 본다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2006, 달라진 저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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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5-12-1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

라주미힌 2005-12-19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캔그리피 주니어가 생각나네요 ... 연속 출장 기록 ㅎㅎㅎ
'간'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 보입니다..

chika 2005-12-1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억~ 윔블던 보러 영국에, 야구보러 미국에, 뭉크작품보러 노르웨이에..가는 것이 문화생활이라고 한 얘기밖에 안보여요!! - 전 내년에 방에서 테니스의 왕자를 넘겨보기만을 기대하고 있을랍니다~ ㅎㅎㅎ

야클 2005-12-1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6년에도 변함없는 마태우스님을 기대하며,또 별로 안 바뀔거라는데 거금 만원을 겁니다. ㅋㅋㅋ

kleinsusun 2005-1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비장하군요.
몸살이 나셨는데도, 타이레놀까지...그것도 2알이나 드시고는 술을 마셨군요.
지금은 몸살 다 지나갔어요?^^
이제 2주 남았네요. 39세의 마지막 2주 아주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플라시보 2005-12-19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구십 몇년도에 비하면 술 마시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군요. 300번은 정말이지 환상의 숫잡니다.^^ 저는 술 줄이라는 말은 안할께요. 다만 건강하게 마시세요. 아프지 마시구요.^^

클리오 2005-12-1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직도 타이레놀 열두알이라.. 이순신 장군 못지 않으시군요.. ㅋㅋ 어머님께 진짜 그렇게 말씀드린건 아니시죠... ^^

꾸움 2005-12-1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충분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암요~ 달라지셔야죠. ㅎㅎㅎ...

Phantomlady 2005-12-1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비슷한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ㅎㅎ
부디 마태우스님은 꼭 성공하시길..

하루(春) 2005-12-1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벌써 새해의 결심을 저렇게 원대하게 내놓으시다니... 심히 우려되지만, 그래도 응원해 드릴게요.

sooninara 2005-12-20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윔블던 경기를 보러 영국에 간다든지, 미국 가서 야구 경기를 보거나, 노르웨이에 가서 뭉크 미술관을 본다든지. ->대신에

그냥 대학로에서 떡삼겹 먹고 홍대앞에선 떡볶이 먹으면 안될까요?

모1 2005-12-20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는 하지만서도 술과 너무 친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요. 약까지 상비할 정도면....

모1 2005-12-20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즐거운 30대셨군요. 이젠 40대? 40대에는 어떤 즐거움이 있을실지..

타지마할 2005-12-20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반갑습니다.

마태우스 2005-12-2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이만님/혹시 누구신지요? 왠지 제가 아는 분 같은데...
모1님/40대도 뭐, 지금처럼 살 건데요 몸관리도 좀 하면서 살겠단 거죠^^
수니님/윔블던 간다고 떡볶이 못먹겠습니까^^
하루님/꼭 응원해 주셔야 해요! 아직도 저에 대해 불신하시나봐요^^ 전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스노우드롭님/제가 그렇게 술먹자고 졸라도 응하지 않는 님은 바위섬!
꾸움님/절 믿어주시는 분은 님밖에 없습니다...^^
클리오님/예리하시군요. 실제 대화는 이랬습니다.
엄마: 아픈데 어딜 나가?
나: 타이레놀 먹어서 괜찮아!
플라시보님/건강은 저보다 님이 더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여간 저는 계속 진화하고 있답니다^^
수선님/여전히 피부가 좋으신 님이 부럽습니다... 저도 한 피부 했는데..
야클님/만원 드리지요^^ 예리하신 야클님. 사람이 한살 더먹었다고 변하겠어요^^
치카님/내년에 저걸 다 한다는 게 아니라, 40대 때 한다는 얘기죠...^^
새벽별님/횟수가 많다고주선은 아니구요 마셔도 안마신 듯 의젓한 야클님이 진정한 주선이지요....글구 타이레놀의 공을 잊으면 안되죠^^
라주미힌님/앗 켄 그리피 주니어가 연속출장?? 그 선수는 부상 때문에 제대로 뛴 시즌이 없는데... 혹시 칼 립켄 주니어 아니어요???^^
라일라님/오 님은 정말 멋이 무엇인지를 아는 좋은 분입니다^^

maverick 2005-12-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아직도 열두알의 타이레놀이 남아 있습니다
-> 저 이거보고 회사에서 웃다가 미친놈 될뻔 했습니다 - -;;

타지마할 2005-12-20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고 하면 저만 마태님을 알고 있겠지요. 유명하시쟎아요.. 마태님에 대한 정보 하나 알았았네요. 고등학교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다. 저는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평범한 아주 평범한 독자입니다. 마태님의 서재에 와 보니 넘 재미있어 인사를 드린 것 뿐입니다. 아무튼 아주 반갑습니다.

2005-12-2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5-12-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됩니다, 2006년의 마태우스님이...^^ 홧팅!

마태우스 2005-12-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호호 기대해도 좋습니다. 불끈! 이제 술 많이 마시는 마태는 올해로 마감입니다
속삭이신 분/그렇게 깜찍하게 말하면 제가 어찌 거절하겠어요
프라이맨님/으음, 제2 외국어가 독일어라는 걸 아신단 말이죠. 그렇다면 혹시 고교 후배?? 아니면 선배? 혹은 동창?? 답이 무엇이든간에 잘 지내도록 해요
매버릭님/제 글에 다른 분이 웃었다는 말처럼 절 즐겁게 하는 말은 없답니다. 음하하하핫. 오랜만에 낭보 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