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첫눈오는 날엔 꼭 여자랑 만나서 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보니

 

생각나는 추억이 하나도 없다!

 

즉, 난 젊은 시절 첫눈이 올 때 여자랑 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남자랑만 있었다.

아니면 집에 있거나.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인데

‘거머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한테 붙잡혀 밤새 술을 마시다 도망나온 적이 있다.

시험을 앞둔 때라 한창 바빴는데

그날 마침 첫눈이 왔었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어떤 애가 갑자기 날 가리키며 “너---!”라고 해서 놀랐다.

보니까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가자!”는 말에 이끌려 술집에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술을 즐기던 녀석한테 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이러다 죽겠다 싶어 좀 비겁하지만 도망쳤다.

슬픈 추억이다.


그때만 해도 내가 첫눈에 의미를 둘 때였지만

나이 탓인지 지금은 첫눈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

저번에 첫눈이 왔을 때도

“아이, 내일 테니스 쳐야 하는데.”라고 푸념을 할 만큼

난 낭만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많은 연인들은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들을 할 것이다.

이번처럼 화끈하게 오면 모르겠지만

첫눈의 정의가 참 애매하다.

눈발이 좀 날리다 만 것을 과연 첫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지난 토요일에 눈이 내리기 전

서울에는 첫눈이 왔었다고 하니

이번 눈은 엄밀히 따지면 두번째다

아무튼 약속을 할 때

적설량 5미리 이상을 ‘눈’이라 한다는 규정을 만드는 게 좋을 듯싶다.

내가 별 걱정을 다한다.

요즘 애들은 휴대폰이 있어서

첫눈이 온다고 만나자는 말을 즉석에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집에 가야 전화통화가 가능했던 옛날에는

첫눈 오면 만나자는 주옥같은 약속이 효과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첫눈에 대해 흥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첫눈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맨날 그녀 얘기만 우려먹어서 미안하지만

내가 연애를 한창 하던 작년엔

첫눈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첫눈이 왔을 때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내게는 그녀와 사귀던 두달 반이 온통 첫눈 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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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2-0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첫눈오면 만나자고 하고 싸웠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ㅠ.ㅠ;;;

깍두기 2005-12-0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가슴이 아프군요^^

로드무비 2005-12-0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게는 그녀와 사귀던 두 달 반이 온통 첫눈 온 날이었다.
이렇게 여운이 길고 짠한 글 참 오랜만에 읽어요.^^

로드무비 2005-12-0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저예요!=3=3=3

ceylontea 2005-12-06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게는 그녀와 사귀던 두달 반이 온통 첫눈 온 날이었다.'

음.. 너무 낭만적인 글이어요...(이 말에 추천~~!!)

저는 토요일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지쳐서 깨어보니 눈발이 날리는 것을 봤답니다.. ^^

비로그인 2005-12-0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게는 그녀와 사귀던 두달 반이 온통 첫눈 온 날이었다.

진짜... 요 근래 읽은 글 중에 젤 낭만적인 글이네요
멋져요... +_+

싸이런스 2005-12-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낭만도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네요. 창의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마무리. 참 맘에 드네요!

하늘바람 2005-12-0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무척 설레여요 사귀는 두 달간이 온통 첫눈오는 날이라 두달 아 저도 다시 돌아가고 프군요

날개 2005-12-0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페이퍼란 말에 동감이어요..^^
근데, 두달 반 밖에 안되었던가요?

부리 2005-12-0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네....그렇습니다.
하늘바람님/호호호 제가 여심을 자극했나봐요^^
싸이런스님/부끄럽습니다. 전 왜 님이 칭찬하면 이렇게 좋은지 몰라...
고양이님/어머나 그렇게 낭만적인 댓글을....^^
실론티님/그래도 눈 오는 걸 보는 건 좋지요?? 사실은 저도 그리 싫진 않았어요. 눈 만지고 놀았답니다
로드무비님/그래봤자 님의 달고니 페이퍼보다 추천이 적다는...추천의 마술사님, 비법 좀 가르쳐 주세요
깍두기님/어머 제가 젤 좋아하는 님을 아프게 했군요..
만두님/어허, 왜 싸우고 그런담?? 그냥 사이좋게 지내시지 그랬어요?^^

울보 2005-12-0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달반동안의사랑이 너무 행복하셧나봐요,,
저도 첫눈의 기억은 별로 없어서ㅡㅡ

moonnight 2005-12-0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서 저도 가슴이 찌잉. 첫눈의 추억은 아니지만 전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가 내내 가슴에 남을 거 같아요. 함박눈이 내렸거든요. 눈맞으며 길을 걷는데 참 행복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술 한 잔 해서 더 그랬겠죠? ^^;

비로그인 2005-12-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마지막 대목 넘 좋아서 제 개인홈으로 퍼갈래요 ^^

마냐 2005-12-07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만주의자 마태님. 첫눈은 또 올검다...마지막 문장, 압권이어요. ^^

다락방 2005-12-0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날 그녀 얘기만 우려먹어서 미안하지만]
이런 이야기라면 전혀 질릴것 같지 않은걸요?
계속, 우려먹어주세요. 가슴이 저릿해질만큼.

마태우스 2005-12-0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미모의 다락방님, 그럼 본격적으로 한번 우려먹어 볼까요^^
마냐님/아이 부끄럽습니다. 다 마냐님 덕분이죠
고양이님/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문나이트님/술 먹고 맞는 눈은 더 아름다운 법이죠....
울보님/네...그랬어요.
부리님/제 대신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