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조교 때, 난 전화가 많이 걸려오는 애였다. 내 속에 잠재한 수다의 본능을 풀 길은 전화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시간은 많이 걸리면서 머리를 안쓰는, 예컨대 기생충 알을 고른다든지 하는 일을 할 때는 어김없이 전화를 하면서 일을 했다.


쥐 수십마리를 잡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고 전해준다. 평소 같으면 나중에 하라고 하겠지만 성별을 물었더니 여자란다. “그럼 받아야지!”

난 장갑을 벗고 전화기 쪽으로 달려갔다. 전화를 받았다.

“어머 너구나! 안받았으면 큰일날 뻔했네!”

열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래, 우리 언제 한번 봐야 되는데”

“그래그래, 한번 날 잡아서 소주 한잔 하자”


전화를 끊고 실험실로 갔더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쥐를 다 잡았을 뿐 아니라 테이블까지 깨끗하게 치워 놨다. 이런이런, 시간이 그새 30분이나 지난 거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런 일이 어디 한두번인가요”

“흑, 억울해요. 전화가 왔는데 어떡해요”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난 여전히, 전화로 수다떠는 걸 즐긴다.


2. 엄마

어제, 술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집에서 밥을 먹는데-재벌이라 집에서 먹는 게 외식보다 더 잘먹는다^^-밥을 다 먹을 때쯤 해서 집전화가 울린다. 집으로 오는 전화는 무조건 엄마 전화, 엄마는 수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나랑 할머니도 밥을 다 먹었다. 할머니가 그릇을 싱크대에 넣는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할머니는 설거지를 그다지 깨끗하게 하지 않으신다. 난 할머니 곁에 지켜섰다. 이런, 몇 번 닦지도 않고 개수대에 넣는다.

“아이 할머니, 이거 세제 써서 닦아야지요”

난 할머니 그릇을 빼앗아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열심히 닦는다.

“남자가 설거지 하는 법이 어디 있다냐?”

할머니는 계속 나를 내쫓으려고 하시고, 심지어 물까지 뿌리셨다. 그래도 꿋꿋이 그릇을 닦는데 할머니가 삐지신다.

“나 이러면 집에 가버린다!”

할수없이 설거지를 그만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할머니는 그동안 설거지를 끝내고 소파에 들어가 쉬신다.


전화를 받은지 30분만에 엄마가 나온다.

“아이 어머니! 내가 하려고 했는데 설거지를 다 해놓으시면 어떡해요!”

그런 엄마를 보니까 웃음이 나왔다.

“아니 엄마, 설거지 할 때 맞춰서 전화를 30분씩이나 하니, 당연히 할머니가 하시죠. 그거 몰랐어요”

우리 엄마의 대답, “전화가 왔지 내가 했냐?”

문제는 그런 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나와 라이벌인 엄마는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오는 걸로 유명한데, 집전화로 하고 있으면 휴대폰이 울리고, 휴대폰을 하고 있으면 집전화가 요란하게 울릴 정도다. 엄마는 때맞춰 그 전화들을 받고, 할머니는 그 동안 설거지를 하는 일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때마다 엄마는 “왜 설거지를 했냐”고 할머니를 닦달하고, 할머니의 설거지가 못미더워 설거지를 다시 하신다. 엄마나 아들이나 어쩌면 그렇게 전화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핑계는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은지.

“전화가 오는데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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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8-19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하하 너무 정겨운 글입니다. ^^
마태님은 여자분들 사이에서 진짜 인기만빵이실 거 같아요. 맞죠? :)

하이드 2005-08-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무슨 전화교환원이냐?' 고 하셨다던 어머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음하하하

울보 2005-08-1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때 이야기를 가만보고 있으면 아주 어리광 많은 막내 딸정도로 보여요,마태님,,
너무 재미있어요,

비로그인 2005-08-1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을 많이 하거나 포도를 많이 먹으면 목이 금방 아픕니다.
얼굴보고도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 전화로 수다떨기는...미션 임파서블이에요 ㅠ.ㅠ

물만두 2005-08-1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세실 2005-08-1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마태님은 이래서 아줌마들이랑 통한다니깐~~~

비연 2005-08-1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쿄쿄쿄~ 마태님은 나중에 결혼해도 재밌게 잘 지내실 거에요..^^
수다떠는 부부. 멋지쟎아요!

moonnight 2005-08-1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뚝뚝한 저와는 너무 다르신 마태님이십니다. ^^; 저는 전화가 걸려와도 한두마디 하고 나면 침묵이거든요. 반성해야겠어요. -_-;

마늘빵 2005-08-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화수다. ^^ 전 별로 즐기진 않지만 가끔 특별한 누군가와의 수다는 즐기죠. 참 자기전에 누워서하는 수다는 저도 좋아합니다.

야클 2005-08-1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분과도 오래 전화하시는지? ^^

마태우스 2005-08-2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죠!^^
아프락사스님/어제 저랑 전화하실 때 그렇게 안끊으려고 하신 걸 보니 제가 그 특별한 누구인가봅니다^^
문나이트님/원래 전화는 짧게 하는 게 좋은 거죠. 글구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저도 무뚝뚝해질 때가 있답니다
비연님/그게 아마 다를 걸요^^
속삭이신 분/정말 님께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거, 그렇게 하겠습니다
새벽별님/현미경을 보면서 주사기 바늘로 골라내죠. 매우 지루한 작업입니다...
세실님/후후, 아저씨 수다가 더 무섭답니다^^
물만두님/피, 제 댓글에는 언제나 흐흐흐 같은 것만 남겨주시는 것 같아요!
별사탕님/아아 제가 튼튼한 목을 갖고 태어난 게 복이군요!
울보님/헤헤헤,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하이드님/저희 어머니? 아님 하이드님 어머니??
검정개님/뭐...굳이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음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