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사람들이 걷는 걸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이 어떻게 다 다른 옷을 입고 있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몇벌의 옷을 돌려가며 입는데, 같은 옷을 입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리고 그가 날 보기 전이라면, 잽싸게 숨어 버린다. 딱이 그를 배려했다기보다, 그 사람과 마주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내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기 힘든 이유도 그 사람들이 내가 보기 전에 숨어 버려서 그런 것일까?
누나가 미국에 갔다 오면서 나와 남동생에게 같은 옷을 두개씩 사줬다. 그래서 남동생은 이따금씩 나랑 똑같은 윗도리를 입는데, 모임에서 동생이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오면 얄밉다.
“나 만날 땐 이 옷 입지 말랬지!”라고 서로 말하곤 한다.
같은 옷 말고도 누군가의 기억에 있는 옷도 입기가 꺼려진다. 내가 좋아하던 써클 누나는 처음 봤을 때 표범 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누나의 사자머리와 더불어서 강렬한 인상을 줬다. 나중에 그 누나와 친해지게 된 뒤 이 얘기를 했다.
“누나 그 표범옷에 반해서 좋아하게 되었어요”
누나 왈, “내가 그 옷을 다시 입나봐라!”
그 누나는 진짜로 표범옷을 입지 않았다 (사실 난 표범이나 호랑이 무늬 옷을 겁나게 좋아한다. 내가 입기는 싫어도 남이 입은 걸 보면 열광한다. ‘어흥’ 해봐, 라고 장난도 치구)
옷에 별로 신경을 안쓰는 것 같지만-사실 별로 안쓴다-여자를 만날 때는 옷에 신경이 쓰인다. 최소한 전에 입었던 옷은 입지 말자는 생각에서. ‘전에 뭐입었더라?’라고 곰곰이 생각하곤 하는데, 재수없게 그게 그옷일 때도 있다. 그럴 때 그냥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그때 그옷이네?”라고 콕 찍어서 말해주는 여자도 있다.
전에 0.1% 안에 드는 미녀를 만났을 때, 우연히 입은 노란색 와이셔츠를 보고 그 미녀가 칭찬을 해준다. “옷이 참 예뻐요”
평소 줄무늬 옷에 밀려 천대받던 그 옷은 미녀의 말 한마디에 비단옷으로 승화되었다. 그 뒤부터 난 그 옷을 입은 적이 없다. 그 옷은 왠지 특별한 날 입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그 미녀가 불러줄 때 그 옷을 또 입고나갈 수는 없다. 그 옷을 또 입으면 왠지 그녀 말에 지나치게 순종하는 것 같기도 하고-즉 사심을 들켜버리고-옷이 그것밖에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른 때도 못입고, 그녀 만날 때도 못입고. 천상 그 옷은 옷걸이에 걸려있을 운명인가보다.
저녁에 부담없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손에 잡히는대로 고른 게 연두색 티셔츠, 무조건 큰 옷을 좋아하는지라 내가 입기엔 좀 크다. 그래서 옷을 빼서 입으면 원피스를 입은 느낌을 주는데, 이 옷의 가장 큰 단점은 그게 아니라, 입으면 덥다는 것이다. 시원한 곳만 골라서 놀아야겠다. 옷은 ‘날개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