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분들이 내게 유머가 있다고 해주셨다. 그분들 말씀대로 내가 유머가 있다고 치자. 어릴 적부터 내게 유머감각이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내 유머는 다 노력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노력으로 되는 건 한계가 있는 법, 조폭으로 비유하면 난 동네에서만 노는 양아치에 불과하다. 진짜 웃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의도에 있다. TV에서 하나도 안웃기는 사람들도 직접 만나면 웃겨 죽는다. 모 페스티벌에서 MC를 보던 무명 아나운서를 보면서 프로의 세계가 저런 거구나 싶었다. 유머도 없는 내가 그들을 평가한다는 건 그래서 말이 안될지 모르지만, 꼭 타이거 우즈보다 골프를 잘쳐야 골프 해설을 하는 건 아니다. 개그의 역사와 평가를 해본다. 내 나름의 기준에 의해서.
1. 초창기-안생긴 외모의 시대
초창기 개그맨들은 외모에서 한점을 따고 들어갔다. 웃기게 생겨서 웃긴 건지, 웃기니까 웃기게 생겨 보이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기동, 배삼룡, 서영춘, 판다를 닮은 남성남 등 개성있는 얼굴들을 가진 사람들이 그 당시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다. 그 하이라이트는 못생긴 걸 아예 전면에 내세운 이주일 씨, 그는 숫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노래까지 불렀다.
2. 주병진
외모만으로 웃기는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건 ‘개그계의 신사’ 주병진. 유머 능력에 있어서는 단연 최강이라 할만한 그는 잘생긴 사람이 웃기면 더 웃긴다는 통설을 입증해 줬다. 자기는 별로 안웃으면서 능청스럽게 사람을 웃기던 그는 제임스 딘 사업이 잘되면서 점차 사업가로 변신했고, 불미스러운 사건과 더불어 완전히 TV에서 사라졌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설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주병진 생각이 난다. 유머지수 9.9
3. 심형래
심형래는 바보연기의 창시자라 할만하다. 사실 개그맨들이 바보 흉내를 낸 건 그 전에도 있었지만, 심형래만큼 노골적인 바보는 처음이었다. “영구없다!”는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는 영화제작자로 변신, 몇 번의 성공과 한번의 실패를 소중한 경험으로 간직한 채 또다시 영화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유머지수 9.1
4. 이경규
난 이경규의 유머 능력을 그리 높게 보진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능력에 비해 명성이 과대포장된 경우다. 그를 국내 최고의 개그맨으로 만들어준 몰래카메라는 이경규가 아니었다면 재미가 훨씬 덜했겠지만, 그건 그 혼자의 능력으로 된 건 분명 아니다. 기획력의 승리라고나 할까? 데뷔 초기 이경규는 큰 눈을 좌우로 돌리는 걸로 웃음을 유발했었고, 그래서인지 난 이경규의 눈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유머지수 8.5
5. 이휘재
잘생긴 개그맨의 계보를 잇는 이휘재는 외모 뿐 아니라 몸매도 훌륭해, “롱다리”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면서 인기 정상에 선다. 하지만 이휘재는 웃기는 능력은 많이 떨어지며,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인생극장>은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만큼의 시청률을 기록했을 것이다. 유머지수 6.5
6. 김국진
혀짧은 소리가 매력적인 김국진은 절묘한 표정 연기가 특기다. 그의 연기력은 <테마게임>을 히트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유머 감각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듯 싶다. 김국진 때문에 배아프게 웃은 기억이 하나도 없으며, 애드립 같은 것도 대단하지 않다. 프로골프에 정신이 팔려 우리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유머지수 7.5
7. 이윤석.서경석
연세대 출신의 이윤석과 서울대를 나온 서경석은 개그맨 중 학벌을 무기로 삼은 최초의 개그맨이다. “부신피질 호르몬이 뇌의 전두엽을 강타하고 거기서 나온 임펄스가 나의 심장에 난 털을 건드려...”같은 유머로 인기를 모았지만, 그딴 걸 자꾸 하면 질리기 마련, 그 뒤부터는 개그맨으로서의 자질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다. 이윤석은 ‘대단한 도전’에서 국민약골로 등장, 개그맨 시절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있다. 유머지수 이윤석 6.8, 서경석 7.7
8. 박준형
엽기를 개그에 접목시킨 최초의 개그맨. 그전 개그맨들도 웃기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하던 사람들이지만, 박준형처럼 이빨로 무를 갈아먹은 경우는 여태까지 없었다. 몰락해 가던 개그콘서트의 인기를 혼자서 떠받치던 그였지만, 유머감각은 부족한데 무만 갈아먹는 걸로는 시청자를 잡아둘 수가 없는 법이다. 유머지수는 7.3
9. 신동엽
“토끼가 말을 하다가 당나귀를 때렸어! 왜? 독수리가 시켰거든!” 이런 식의 정신없는 개그로 화려하게 등장한 신동엽은 장난기 어린 표정에 걸맞게 사람들을 웃겼다. 내가 보기에 신동엽은 당대 최고의 개그맨으로, 애드립은 물론이고 유머의 내공이 현역 개그맨들 중 1위다. 신동엽-김원희의 ‘헤이헤이헤이’는 정말이지 관객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그 일등공신이 신동엽이다. 김원희가 빠진 ‘헤이헤이’는 가능해도 신동엽이 없는 ‘헤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신동엽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그의 유머는 그만큼 훌륭했다. 유머내공 9.9
10. 배칠수
김대중이 자전거를 판 부시에게 따지고 때리기까지 하는 동영상은 900만번 이상의 펌질을 당했고, 그 성대모사를 한 배칠수는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 그후 그는 ‘코미디하우스’의 3자토론, 최양락이 진행하던 ‘재밌는 라디오’에 나와 여러 사람의 흉내를 냈다. 성대모사는 유머의 종목 중 빠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건 기술이지 유머는 아니다. 배칠수가 성대모사가 아닌 유머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유머지수 5.2
11. 남희석
그렇게 대단한 재능은 없어 보였다. 저런 사람이 왜 개그맨일까 싶었는데 MC로 가더니 진행을 제법 잘한다. 그는 천상 MC였다. 유머지수 5.8
12. 탁재훈
난 이사람을 존경한다. 무슨 가수가 이렇게 웃길 수가 있을까? 개그맨은 아니지만 여느 개그맨보다 웃기고, 토크만 따진다면 따라갈 자가 없다.
“외계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질문에 탁재훈은 주저없이 손가락을 내민다(ET에서처럼). “일단 이렇게 하겠죠”
그는 애드립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아티스트다. 자기는 안웃으면서 어쩜 그렇게 멋진 말들을 해대는지. 유머지수 9.7
13. 김용만
순간적인 재치가 있긴 하지만, 개그맨이라고 보기엔 그다지 웃기지 않다. 브레인 서바이벌의 MC는 그에게 딱 맞는 배역인 듯하다 (전에 쇼프로 MC를 보는데 어찌나 못보던지! 그러니까 그는 웃음이 있는 프로의 MC에 어울린다). 유머지수 6.0
14. 강호동
일반인보다야 낫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버틸 실력은 못되는 듯하다. 얼굴이 큰 걸 가지고 많이 우려먹던데,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다. 유머지수 4.9
15. 김제동
유머가 뭔지 알고 하는 개그맨으로 보인다. 자기 이름을 내건 토크쇼도 능히 진행할 만한 인재로, 개그도 뛰어나지만 풍부한 어휘력도 만만치 않아 ‘어록’이 인터넷에 나돌 정도였다. 유머지수 9.3
16. 유재석
토크박스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유머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개그맨은 아무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라고나 할까. 지극히 평범한 재능을 가진 개그맨인데 계속 버티는 걸 보면 신기하다. 유머지수 5.1
17. 이경실
여성 개그맨 중엔 당대 최고다. 표정부터 시작해 웃음소리와 말투 등 모든 게 다 웃음 덩어리. 전 남편과의 사이에 있던 상처를 잘 극복하고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유머지수 8.5
19. 김늘메
“나만 봐!”로 떴던 김늘메는 귀염성에 호소하는 개그를 한다. 옛날로 따지자면 밥풀떼기로 날렸던 김정식의 아류? 이런 사람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딱 하나만. 유머지수 6.5
20. 유민상
폭소클럽에서 X-파일을 진행하고 있다. 뚱뚱한 몸매를 내세운 연기 대신 ‘마른인간 연구’라는 기상천외한 프로를 만들어 냈다.
“햇반을 왜 한숟갈씩 포장했을까? 아침에 40개씩 뜯어먹으려면 바쁠텐데”
폭소클럽 방청객들이 진심으로 웃는 건 이 코너밖에 없을 듯. 빛나는 아이디어를 능청맞은 표정으로 소화해내는 재주꾼이다. 이 프로가 종영되고 나면 어떤 개그를 들고 나올지가 진짜 궁금하다. 유머지수 8.3
21. 윤택
그만이 할 수 있는 개그를 한다. 눈을 반쯤 감고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는 게 트레이드 마크. 요즘 난 윤택 얼굴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런 개그맨은 대개 롱런한다. 유머지수 8.1
22. 김형인
“그런 거야?”가 뜨긴 했지만 웃기는 자질이 그다지 뛰어나 보이진 않는다. 그가 나온 다른 프로에서 제대로 웃긴 적이 없을 정도. 유머지수 5.4
23. 화상고 팀
웃기는 능력만 놓고 본다면 ‘웃찾사’ 중 단연 최고다. 주축인 김기욱이 황당한 부상으로 쉬게 되었는데도 고릴라 인형을 갖다놓고 8주를 떼울 정도로 임기응변에 능하다. 남들은 아이디어 고갈을 우려하지만, 자신들은 대학로 극장에서 1년 이상 공연을 했다면서 자신만만한 상태. 뭉뚱그려서 유머지수 8.7
24. 컬투
팀을 짠다고 다 시너지 효과가 나는 건 아니다. 서경석과 김진수의 결합이 해프닝으로 끝난 것처럼. 하지만 이 둘은 개그개에서 가장 웃기는 팀이다. ‘그때 그때 달라요’ 같은 프로는 여느 개그맨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유머지수 8.9
25. 리마리오
느끼함을 무기로 쓴 유머로 빛을 봤지만, 반짝 스타로 그칠 듯. 기본적으로 웃기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며, 잘생긴 개그맨은 이제 차고 넘친다. 유머지수 5.2
결론:
최고로 웃긴 개그맨은 신동엽, 아쉬운 개그맨은 주병진, 가수 안해줘서 고마운 사람은 탁재훈.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