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교 때, 아무도 안쓰는 방이 하나 있었다. 나이 드신 교수님이 창고로 쓰는 그 방에는 수많은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무슨 전집들이 박스에 쌓여진 채로. 그 중에는 NHK에서 만든 동물들 비디오같이 구미가 당길만한 게 많았고, 책들 또한 그랬다. 그게 방의 절반 이상을 메울 정도였으니 가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건 다 은사님이 사신 거였다. 은사님의 친구 분 중 사업이 망한 뒤 책장사로 나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오실 때마다 은사님은 커다란 박스에 든 전집을 사주셨다. 댁으로 가져가면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마누라 알면 나 죽어!”
그곳이 다른 교수 방이 된 지금, 그 많던 책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한가지 아는 건 내가 탐내던 동물 테이프는 다른 교수님이 가져갔다는 것).
그 교수님을 보면서 왜 거절을 못하실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나라고 다를 게 없다. 조교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책장사 아저씨, 나만 보면 책을 판다. 은사님이 사신 것과는 달리 연구에 관한 책이고, 도움이 되는 것도 여럿 있다. 하지만 딱 봐서 내가 절대 안읽을 것 같은 책도 마음이 약해 거절하지 못한다. 노크 소리에 이어 그가 들어올 때마다 그래서 난 “아, 화장실이라도 가있을 걸!”이라는 탄식을 속으로 한다. “요즘 바쁘시죠?”로 말을 꺼낸 그는 들고있는 책 중 하나를 권한다.
“이 책 이거, xx 대학교 xxx 교수님한테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더라구요. 교수님도 필요하실 거예요”
“저...안사면 안될까요”
“이게 얼마나 좋은 책인데 그래요. 당장 돈 없으면 나중에 보내주시면 돼요. 8만원밖에 안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다. 내 책장에는 그가 판 해적판 책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물론 새로나온 면역학 책은 있으면 뿌듯하지만, 억지로 떠맡은 면역학 저널 모음집은 아직 한페이지도 안본 채 먼지만 쌓이고 있다. xxx 책도, xxxx 책도 한번도 안본 건 마찬가지다. 그를 두 번 만날 때마다 한번꼴로 책을 샀는데, 그가 “천안은 멀어서 자주 못내려온다”고 하니 올 때 잠깐 피하면 될 터, 하지만 문이 유리문이 아니라 누가 노크하는지 모르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저께는 다행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술을 무지하게 마셔 지각을 한 날이었는데, 일단 방에다 가방을 갖다놓고-가방 들고 돌아다니면 남들이 나 지각한 거 다 아니까-생화학교실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대쪽 엘리베이터로 열나게 뛰어간 뒤 방문을 열고 가방을 던졌다. 계단을 향해 달려가다가 복도 모퉁이에서 그와 딱 마주쳤다.
“아이고 교수님! 안그래도 기생충학 책 좋은 거 나와서 갖다드리려고 하는 중이어요”
판본이 다른 기생충학 책이 여럿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살 필요가 없었다. “갖다드리는 교수님들마다 좋아하시더라구요”라고 해도 말이다.
“저, 안사면 안될까요?”
그가 이런다. “아니 이 책 정도는 사셔야지요!”
그는 결국 계좌번호가 적힌 책을 내 방에 놓고 사라졌다. 9만5천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