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내가 라면을 잘 끓인다고 했더니 난리가 났다.

무슨 소리야? 니가 내 라면을 안 먹어봐서 그래라는 말부터

내 라면은 음식이 아니라 예술이다는 과장까지,

모인 친구들 전부가 자기 라면이 최고라고 주장을 했다.

아마도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요리가 라면과 계란후라이밖에 없는 탓에

그거라도 자랑하고픈 마음이 그 사단이 난 원인이었으리라.

 

아무튼 나도 라면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난 뒤엔 아내한테 라면권-라면을 끓일 수 있는 권리-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른 이들이 그렇듯 나도 라면을 국물맛 때문에 먹으며,

라면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는 게 라면을 먹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아내는 라면 국물에는 나트륨이 들어 있고, 그 나트륨이 몸에 해롭다고 믿기에

조리 과정에서 라면국물을 3/4 가량 버린, 그런 라면을 내게 갖다 주기 위해

라면권을 내주지 않는 거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다보니 으레 라면은 아내가 끓이는 걸로 정해졌고,

밥을 말아먹기에 부족한 라면국물도 적응이 됐다.

 

사실 라면은 어떻게 끓이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라면을 쓰느냐도 맛에 중요한데,

개인적으론 삼양라면--> 안성탕면--> 신라면 --> 진라면 의 변천사를 거쳤다.

그런데 아내는 진라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남자라면이 맛있다고 거듭 주장을 했다.

먹어보니 맛이 제법 괜찮아서 그냥 남자라면을 먹고 있지만,

가끔은 진라면 매운맛이 그립다 (요즘도 나오나 모르겠다).

 

전에도 이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어머니와 둘이 살 때는 라면을 먹기가 참 힘들었다.

라면을 먹으려치면 어머니가 한사코 뜯어 말려서였다.

언젠가는 냄비에 물을 끓여 라면을 막 넣으려는 찰나 어머니가 집에 오셨고,

오시자마자 내가 손에 라면을 들고 있는 걸 보더니 바로 빼앗아 싱크대에 버리셨다.

온화하기 그지없던 어머니도 라면 앞에선 투사로 돌변하는 모양.

그리고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라면이 얼마나 해로우며, 라면 대신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는지.

행여 쓰레기통에서 어머니가 안계실 때 잽싸게 끓여먹은 라면봉지가 발견되면

어머니는 슬픔에 찬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시며 앞으로는 밖에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한탄하셨다.

결혼을 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라면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오늘 아침에는 왜 그렇게 라면이 먹고 싶었는지

출근 전에 남자라면을 끓여서 후다닥 먹고 나갔는데,

아까도 갑자기 라면이 댕겨서 라면과 더불어 공기밥을 말아먹었다.

젓가락으로 라면을 후루룩 넘기는데, 너무 맛있어서 살아있는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라면을 먹는 이 광경을 어머니가 보셨다면

당장 보따리를 싸서 천안으로 내려오셨겠지만 말이다.

 

라면을 먹어서 좋은 점은 부부간의 금술이 좋아진다는 점이다.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가장 맛있는 라면은 남이 먹는 라면이고,

내가 먹고 있으면 아내가 젓가락을 들고 와서 한 젓가락 빼앗아 먹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부부가 뭔지 알 것 같다.

부부란 자기 라면을 빼앗아 먹어도 화가 안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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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라면 매운맛 ㅎㅎ 방금 하나 끓여 둘이 나눠 먹었어요. 마태님도 자주는 드시지말고요^^

마태우스 2012-12-04 00:57   좋아요 0 | URL
어머나 꽈배기군요 라면으로 통하는 12월 3일이었네요. 저도 일주에 한번이죠 뭐.

Mephistopheles 2012-12-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합니다. 제가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고 치자고요. 근데 마태님이 나타나 한 젓가락만! 하면서 뺴앗어 먹었다고 치자고요. 근데 전 화가 안날꺼 같아요. 그럼 우린 부분가요?

마태우스 2012-12-04 00:56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진 않습니다. 전 님과 달리...님이 라면을 빼앗아먹으심 화날 것 같아요^^ 호호호. 그래서 우리가 부부가 아닌 거죠!

차좋아 2012-12-04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가 라면을 끓여주느냐 안끓여주느냐,
혹는 어떻게 끓여주느냐를 보면 애정도도 확인할수 있어요 ㅋㅋ

마태우스 2012-12-04 09:52   좋아요 0 | URL
아, 또 그런 좋은 기준이 있었군요! 아내는 제게 라면을 정성들여 끓여주니, 애정도가 9.9인 거군요^^

다락방 2012-12-04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희 아빠는 라면 끓였는데 엄마가 한 젓가락 드시면 불같이 화를 내세요. ㅠㅠ

마태우스 2012-12-04 09:52   좋아요 0 | URL
그런 마음아픈 사연이.... 어머니보다 라면을 더 좋아하는 아버지,로 정리되는군요

심장원 2012-12-04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읽어 보니 어머니에 견주면 사모님은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
ㅋㅋ
전 라면을 잘 끊여 먹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대찌개나 김치찌개 먹을 때는 꼭 라면 사리를 추가하지요.
몸에 좋지도 않다는데 끊을 수가 없네요.

마태우스 2012-12-04 09:54   좋아요 0 | URL
어맛 또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먹고싶은 걸 먹게해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꼭 그런 건 아니군요 하하. 가끔은,이란 단어를 추가할게요)
찌개엔 당근 라면사리가 들어가야죠. 사실 안좋은 건 라면국물이지 사리가 아니란 말도있으니깐요

테레사 2012-12-0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전 라면 먹다 뺏어 먹어도 화 안나는 사람이 없어요ㅠㅠ...부럽습니당...

마태우스 2012-12-04 12:17   좋아요 0 | URL
그죠? 이건 테레사님만 알고 계셔야 하는데요 사실 아내가 빼앗아 먹어도 화나죠! 근데 아내가 이 글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결론을 그렇게...하하하하하핫.^^ [비밀글]

감은빛 2012-12-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면이 나쁘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저는 한때 사리면만 사와서
간장과 갖은 양념을 이용하여 국물을 만들어 끓여 먹곤 했어요.
조미료 맛만 포기하면 어느 정도 먹을만 하다 싶긴 했어요.

저는 마파두부밥이나 오뎅탕을 잘 만들어요.
(웬 자랑질!!?? ^^)

마태우스 2012-12-04 12:18   좋아요 0 | URL
설거지 하신다는 글을 님 페이퍼에서 보고 감동했는데
요리까지 잘하시는군요.
이 시대의 진정한 표상이십니다

moonnight 2012-12-0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는 건 역시 몸에 안 좋은 거 같아요. 라면 너무 맛있어요. ㅠ_ㅠ
라면을 뺏어먹어도 화나지 않는 게 부부였군요!!! 라면 하나에도 아내분의 사랑을 떠올리는 마태우스님 모습이 참 행복해보여요. ^^

마태우스 2012-12-04 12:19   좋아요 0 | URL
그, 그게 말입니다. 윗 테레사님에게 단 비밀댓글을 참조해 주세요^^ [비밀글]

비로그인 2012-12-04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만의 라면시간을 방해하는 이가 배우자라면 왠지 더 화가 나요~핫하하
그것도 라면 끓이기 전, 먹을 것인지 미리 물어볼 때는 꼭 안먹어~하는 사람이라면 더 분노가~~ㅎㅎㅎㅎ

마태우스 2012-12-09 15:54   좋아요 0 | URL
전 아내 거 안뺏어먹습니다. 뺏어먹는 라면이 훨씬 더 맛있긴 하지만, 한두젓가락 가지곤 양이 안차서 새로 끓여먹는답니다. ^^

페크pek0501 2012-12-0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의 비밀글은 멋진데요. 하하~~ 비밀글이되,비밀글이 아닌 글...
라면 하나 가지고 이렇게 추천 수 높은 글을 뽑아내시다니...
역쉬 마태우스 님은 재주꾼! 우후후!

마태우스 2012-12-09 15:54   좋아요 0 | URL
글 수준은 낮지만 라면에 대한 향수가 다들 있는지라, 호홋

민세민석아빠 2012-12-0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면 서유기 저 만화도 보셨군요... 보긴 했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네요...ㅋ

마태우스 2012-12-09 15:55   좋아요 0 | URL
저 책들 저 안봤습니다. 다만 올려놓기만 했죠

saint236 2012-12-0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면! 예전에 참 지겹게 먹었었는데요. 한때 라면 칼국수 수제비는 절대로 먹지않겠다는 맹세도 했었습니다. 훌륭하게 한끼를 때워주던 그 음식이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먹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나트륨을 줄여야 한다고 하네요. 제 아내도 마찬가지의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예전에 밥대신 줄기차게 먹었던 그 라면의 맛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밥대신 줄기차게 라면을 먹고 있을 사람들이 생각이 나고요. 제게 있어서 라면은 매콤, 달콤, 시큼, 쌉싸름 등등 모든 맛이 들어 있는 음식입니다.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분식점을 가면 그 많은 음식 중에서 습관적으로 라면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마태우스 2012-12-09 15:56   좋아요 0 | URL
고속터미널 경부선 신한은행 옆에 일성식당인가, 그런 곳이 있어요. 거기 근처 갈 때마다 늘 거기서 라면을 먹어요. 라면이 완전 예술이거든요. 김밥도 맛있구요. 거기서 먹으면 라면도 고급음식이구나 싶을걸요

saint236 2012-12-11 14:18   좋아요 0 | URL
한번 가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