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그 친구가 내게 하고픈 이야기는 다른 거였지만,
어떻게 이야기가 자녀교육 쪽으로 바뀌어 버렸다.
게다가 주제는 내 특기인 편애,
세 딸을 키우는 친구는 알아서 다 잘하고 외모도 뛰어난 첫째와 셋째와 달리
둘째 딸이 엇나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의 장광설이 시작됐다.
난 그에게 “네가 네 기준을 딸한테 적용시키니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던 것.
사실 나처럼 강아지 두 마리만 키우는 사람이
자녀교육에 대해 말한다는 건 좀 어이가 없는 얘기다.
그러니까 내 교육관은 현실에서의 경험은 전혀 없는,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며,
말로만 따지면 페스탈로찌가 되지 못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한 말은 모두가 얼마 전 읽었던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빚진 거였다.
그 책에서 김두식은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내심은 공부 잘하길 바랐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하는 것 때문에
우리 딸이 교수부모 밑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이야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던, 그래서 SKY 중 하나를 갔던 그 친구 역시
공부라는 자신의 기준을 둘째에게 적용시켰다.
그 증거가 다음 말이었다.
“전문대라도 갔으면 좋겠어.”
나이가 듦에 따라 깨달은 게 있다면 매사에 관대해진다는 것,
난 여전히 자신의 기준에 사로잡힌 그 친구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난 나처럼 말로만 하는 건 쉽고,
너처럼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건 이론만큼 쉽지 않다고 얘기했다.
김두식은 말했다.
“제 관점이 바뀌자 딸과의 관계도 변했습니다.
딸과의 관계가 변하자 딸도 변했습니다.
저는 이제 정말로 ‘딸이 공부를 안하거나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정말로 변했는지 아닌지는 네 딸이 제일 잘 안다고.
부모의 역할은 선생이 아니라 자식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거라고.
그러면서 내가 권한 건,
딸만 몰래 불러내서 술을 권하는 거였다.
그 나이 또래에서 우쭐할 수 있는 건,
술을 마셔봤느냐가 아니겠는가?
2차로 간 맥주집에서 친구는 둘째만 따로 불러냈고,
그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로 한시간을 보냈다.
날 어려워해서 그런지 그 딸은 사이다와 섞은 맥주를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보낸 한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남은 나날 동안 그 딸이 즐겁게 지낼 수 있느냐는 순전히 친구의 몫인데,
어찌되었건 내가 그 친구를 감동시킬만큼 멋진 교육관을 설파한 비결은
전부 다 김두식 때문이다.
고맙다, 두식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