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3월 12일(월)
마신 양: 공부가주-->폭탄주
우리 학교에 온 뒤 나 자신을 알린 일은 연말에 있었던 교수모임-상조회라고 한다-때 사회를 본 거였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돈주고 부른 것보다 낫다”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상조회였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나도록 상조회 측에선 늘 모임이 열릴 때마다 내게 사회를 맡긴다. 이젠 아이디어도 고갈되고 비슷한 스타일에 사람들이 식상할 만도 한데, 후계자를 키운다든지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작년 연말, 상조회 측에선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서 고가의 상품권을 내게 선물했다. 그거 한방에 다시금 의욕이 솟았다.
“그래, 난 이제 프로야. 돈받고 한다고!”
평소엔 상조회 전날 하루를 할애해 준비를 했건만, 이번엔 무려 사흘 전부터, 아주 색다른 아이디어로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개그맨 죄민수의 유행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이렇게 된다.
“이거이거, 다들 죽는구만!”
이번 상조회 준비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었다. 문항 중 하나가 “술이 가장 셀 것 같은 교수는?”이었는데, 글쎄 내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2등을 차지한 거다(18표). 사실 난 열심히 마실 뿐, 주량이 많은 건 아닌데. 1등은 누구였을까? 감염내과(가칭)의 K 선생이 35표라는 많은 표를 얻으며 1등을 했다. 그는 말한다.
“저보다 더 술 세신 분이 많지만, 평소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어필한 것 같다.”
내가 알기에 그는 술의 화신이었다. 그는 매주 월요일마다 아래 사람들을 몽땅 데리고 술을 마시는데, 어찌나 폭탄주를 돌리는지 쓰러지는 애들이 둘셋은 꼭 있단다. 오죽하면 레지던트들이 “2주에 한번으로 모임을 줄여달라”고 탄원을 했을까 (물론 거부당했다). 이상하게도K 선생과 난 한번도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는데, 상조회가 끝난 뒤 2차에서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이름하여 1등과 2등의 조우.
그분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끝없이 폭탄주를 돌렸고, 수시로 “모두 일어나서 원샷!”을 외쳤다. 그날따라 내 컨디션은 최상이었지만, ‘이러다 죽겠구나’는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엄습했다. 반면 K 선생은 아무리 폭탄주를 마셔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희진 선생에 의하면 “폭탄주를 돌리는 건 서로간의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던데, K 선생은 이미 그런 경지를 초월한 듯 마치 신선과도 같은 풍모를 보여줬다. 학생들의 설문이 꼭 맞는 건 아니어서 “춤 잘추는 교수”에 내가 1등한 거나 “밥값을 안낼 것 같은 교수” 부문에서 내가 4등을 한 것, 그리고 주량에서 2등을 한 것 등은 수긍할 수 없지만, 이거 하나는 맞았다. 그분은 진정한 1등이었다. 그리고 그날, 난 집에 가지 못했고, 내 방에 있는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야 했다. 가위에 눌려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