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3월 7일(수)

마신 양: 소주 2병?


난 주로 계획된 술을 마신다. 갑자기 약속이 잡혀 마시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흥겹고 재미있었던 술자리는 대개 급조된 술자리였다 (내게 재미없는 술자리가 어디 있겠냐만).


눈이 와서 퇴근버스가 기어가던 어제, 알파가 나와 술을 한잔 하고 싶다며 연락을 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아무 얘기나 다 하게 만들고, 자주 만나진 않지만 늘 옆에 있는 듯한 친구, 알파는 그런 사람이다. 연락을 받고서야 올해 들어 그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정도.


버스가 기어간 덕분에 우리는 밤 10시 44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알파는 투명비닐로 벽을 만든 커다란 포차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안주를 하나씩 골랐다. 그는 조개탕을, 나는 계란말이를. 그는 정말 조개를 좋아했다. 그가 앉은 쪽 테이블엔 그가 먹어치운 조개 껍질이 산처럼 쌓였다.

“조개 정말 잘먹네요?”

이렇게 말하는 건 격려가 아니다. 나도 좀 먹자는 절규다. 그럼에도 그는 “뭘요” 하면서 계속 조개를 먹었다. 그래, 자기가 시킨 안주니까 뭐.


문제는 계란말이가 나왔을 때였다. 김치가 안에 든 두툼한 계란말이, 난 한개를 삼등분해가지고 아껴 가면서 먹었다. 그랬는데 그는 거의 한입에 계란말이 하나씩을 삼킨다. 원래 안주 가지고 뭐라고 안그러는데 한마디 했다.

“계란도 잘드시네!”

그제서야 그가 젓가락을 놓았다. 남은 계란말이 두 개 다 나더러 먹으란다. 먹었다. 그가 입을 연다.

“사실은 제가 저녁을 안먹었어요.”

가슴이 아팠다. 이 시각까지 밥을 안먹다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빈속에 마시는 소주는 얼마나 독할까. 세상의 안주발엔 다 이유가 있는 법, 난 구박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다시금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식사가 될만한 게 딱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거 어때요?”

그가 주저하기에 무시하고 시켜버렸다. 잠시 후 비빔 도시락이 나온다.

“이런 안주에 술 먹기는 처음이네요.”

그가 좋아하며 밥을 먹는다. 가만있었어야 되는데 못참고 또 구박을 했다.

“반찬만 그렇게 먹으면 어떡해요? 난 거의 맨밥 먹고 있는데. 누가 그렇게 먹으면 맛있는지 모르나.”

그가 슬픈 눈으로 날 봤다. 갑자기 미안해졌다. 후회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그랬을까. 같이 있으면 편하다고 그렇게 구박을 하다니. 우리 선조들 말이 떠오른다.

“친할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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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7-03-08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홍~~ 맞어 구박을 왜 해?
그나저나 계란말이 아....정겨운 단어입니다. '겸손'은 가고 없지만 그에 부응하는 '92학교'가 있습니다. 어흑...

다락방 2007-03-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도 계란말이 사주세요!!

해적오리 2007-03-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ㅎㅎㅎㅎㅎㅎㅎㅎ
근데 먹는거 갖고 구박하면 얼마나 서러운데요..

담에 만나면 계란말이 두 개라도 시켜드릴께요...

2007-03-08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7-03-0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링크되어 있는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군

야클 2007-03-0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엔 아끼고 아끼다가 조개 남겨서 치우는 아줌마가 가져갔다는 사실

야클 2007-03-0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도 반 넘게 남겼고, 심지어는 밥위에 있는 계란프라이도 다 안먹었는 사실

야클 2007-03-0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 불러 죽겠다면서 마지막에 또 시킨 김치전. 결국 거의 안 먹고 나왔다는 가슴아픈 얘기는 왜 빼셨죠?

야클 2007-03-08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계산도 내가 했는데. 너무해. 먹는다고 구박이나 하고. -_-+

야클 2007-03-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미녀들 만나시느라 바쁘신 분이 시간 내주신 것만해도 감사드립니다.^^

다락방 2007-03-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하나씩 드러나는 이 진실들이라니!!!!

해적오리 2007-03-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이다, 대박!!!!
야클님의 마지막 글... 절절하군요..

Mephistopheles 2007-03-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급조된 술자리를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마태님...^^

oldhand 2007-03-0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개탕 부분에서 알파가 야클 님인거 감 잡았습니다. ㅎㅎㅎ

짱꿀라 2007-03-0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님은 눈치가 빠르시다니까요. 금방 해결하시는 것 같은데 또 왜 구박하신데요. 그래도 마태님은 해결사시네요. 웃고 갑니다. 근데 돈 계산은 누가 야클님이 하셨나!!!!!

무스탕 2007-03-0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야... 야클님이랑 두분이서 긴 밤을 불태우신거야요?! 나두 조개탕 조아해요... 계란말이도 조아해요... 결정적으로 쐬주도 조아해요~ ^^

깐따삐야 2007-03-08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준 것도 아니면서 구박을 왜 하지...ㅋㅋ

마노아 2007-03-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쩜 좋아. 두분이 공동으로 시나리오 하나 쓰세요^^

chika 2007-03-09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194195

추억의 캡쳐 벤트나 해볼까, 하는 제게 들어오는 건 숫자뿐이군요.
낼 점심은 계란말이 반찬이나 해서 먹으까.......


ceylontea 2007-03-0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 = 야클님 이셨군요.. ㅋㅋ
그나저나 야클님 댓글이 정말 재미있네요.. ^^

미즈행복 2007-03-09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한 하루에 유머를 깃들게 해주셔서 감사!
근데 너무해요. 마태님. 평소 학생들에게도 매일 쏘시면서!!! -제가 야클님은 모르지만 그 심정은 알지요. 재벌 2세에게 사주고도 구박이라!-

진/우맘 2007-03-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아니, 둘이 먹으면서 조개탕에 계란말이에 도시락에 김치전까지?!!!!!!!!
구박은 구박대로 하면서 마태님이 더 많이 먹은거 아녜요?!

2007-03-09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1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처럼은 미녀와 함께..

마태우스 2007-03-1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오랜만입니다. 제가 야클님을 보내드린 지가 언제인데요^^
테츠님/동영상 감사합니다. 즐감했어요^^
속삭이신 분/아아 그렇군요 제 귀환에 기뻐하셨다니, 이제 제가 님의 귀환을 환영해드릴 차례군요!
진우맘님/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저 아시잖아요!
미즈행복님/원래 제가 사려고 했었어요 정말이어요 믿어주세요
실론티님/와 님과 댓글 주고받는 게 얼마만인가요^^ 반가방가
치카님/캡쳐의 시대는 갔습니다. 캡쳐의 달인이신 치카님, 이제 변하셔야 합니다
마노아님/쓴다고 하면서 술만 마시겠죠^^
깐따삐야님/흑 님은 야클님만 좋아해... 제가 계산하려 했는데 흑...
무스탕님/저랑 코드가 맞군요 언제 자리라도 한번...
산타님/야클님처럼 안주발 세우는 분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좀 당황했어요...^^
올드핸드님/아앗 그렇군요 원래 조개탕 좋아하시나봐요....?
속삭이신 ㅈ님/호호호 님 때문에 제가 넘어간 적도 여러번이라구요
메피님/기대하겠습니다 신비주의 컨셉 그만 버리시어요!
해적님/제말이 그말입니다^^
다락방님/야클님이 그래도 참아 주셨어요 좋은 분이어요.
야클님/죄송합니다 구박만 하고...그러고보니 파전 남겼었죠 아깝다...글구 계산 제가 하려 했는데 죄송해요...제맘 아시죠?
속삭이신 ㅊ님/괜찮습니다. 글구 님의 풍부한 감성은 매력이랍니다
해적님/님이 사주는 계란말이, 꼭 먹고 싶습니다!
다락방님/님과 함께 계란말이를! 2007년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세실님/님의미모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앞으로 야클님한테 잘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