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순간부터 우린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새로 취임한 학장이 불러서 가봤더니

난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고, 하나 골라서 가지란다.

털달린 동물만 좋아할 뿐 식물엔 그다지 취미가 없어서

“안가져가면 안될까요?”라고 물었더니 “주는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가져가라!”고 한다.

놀라서 냉큼 집어온 게 가장 조그맣고 볼품없는 난이었다.


굶는 동물만 보면 먹을 걸 주는 나는

희한하게도 식물에겐 냉담해

내가 여기 발령받은 기념으로 받은 난마저 이미 말라죽게 한 경험이 있다.

그 난이 죽으면 난 학교에서 잘린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건만

나의 게으름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 난도 오래 못가겠지 싶었다.

일주일에 한번씩,을 표방하면서

매우 불규칙적으로 물을 줬다.

가끔씩 말라죽는 줄기가 생기면 과감히 뽑았다.

하지만 이 난은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했고

뽑은 줄기 숫자만큼 새로운 줄기를 자라게 했다.

그 난은 그렇게 내 방의 가족이 되었고

이따금씩 예뻐 보일 때도 있었다.

그것과 관계없이 줄기는 가끔 시들었고

난 그때마다 과감히 줄기를 뽑아냈다.


내가 아는 미녀가 올해 초 내 연구실을 방문했다가 창틀에 올려진 난을 발견했다.

“분갈이 좀 해야겠다.”

그녀가 대뜸 한 말이다.

그녀에게 잘보이려고 춘분 때 하겠다고 했다가 좀 친해지니까 만사 귀찮아져서

추분 때 한다고 둘러댄 뒤 추분마저 그냥 지나쳤다.

그 뒤 생각이 바뀌어 “분갈이는 웬 분갈이? 그냥 수명껏 살다 가면 되는거지!”라는,

귀차니즘의 절정기에 달한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하긴, 나같은 인간이 일주에 한번씩 물 주는 것만 해도 어디냐?


그러던 내가 낙엽이 다 떨어진 11월 말에 개과천선을 해버렸다.

출근을 하다가 병원 앞에 있는 꽃집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옮겨 적었고

1분간, 진지하게 분갈이에 대한 상담을 했다.

“화분 가져오시면 저희가 무료로 해드릴께요.”

‘무료’라는 말에 고무된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화분을 맡겼다.

내가 들고간 난을 본 주인 아주머니,

“너무 줄기 수가 적어서 볼품이 없을 것 같네요. 제가 알아서 예쁘게 해드릴께요.”

난이 없어진 내 방이 쓸쓸하게 느껴진 걸 보니 조금은 정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어젯밤,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난 맡겼던 난을 다시 찾아왔다.

듬성듬성 나 있던 난의 줄기는 세배, 아니 다섯배 정도로 증가되었고

하얗고 볼품없던 화분은 검은색의 멋진 화분으로 변했다.

난을 맞을 준비를 전혀 안하고 있다가 그 난이 도착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자리를 만들었다.

창틀에 잔뜩 놓여져 있던 워크숍 관련 책들을 캐비넷에 넣으니

화분이 올라갈 자리가 생겼다.

창문에 줄기 끝이 닿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마땅히 올려놓을 곳이 거기밖에 없으니 할 수 없다.

난이 볼품있게 변하니 내 시선도 변했다.

예전엔 저게 왜 안죽나,며 째려봤다면

오늘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난을 바라본다.


그 난을 보고 있자니

지저분,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내 연구실에 그나마 볼만한 거라곤

벽에 붙은 이효리 사진이 아니라 그 난 뿐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연구실에 비하면 난이 너무 과분하단 소리.

결심을 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연구실 청소를 좀 하자고.

쓸데없는 건 다 버리고 최소한 어지럽진 않도록 정리를 하고 살자고.

그래봤자 며칠 못가겠지만

그래도 당장은, 난에게 부끄럽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난아, 그동안 미워했던 거 미안해.

앞으로 잘 지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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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24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니...줄기 숫자가 열배는 더 늘어난 것 같군요^^

2006-11-24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또유스또 2006-11-2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꽃집이 어딥니까..
제 머리를 부탁하면 저리 10배 늘어 날까요?
전 2배도 감지덕지 할텐데...
전화번호를 알려 주셔요 흑...
그리고 마태님은 뭐든 이쁜 걸 좋아하시는 군요 -,.- 음....

moonnight 2006-11-2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에 붙은 이효리 사진.. ^^; 방에 푸른식물이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지죠. 전 얼마전에 말라죽어버린 화분 버렸어요. 흑. ㅠㅠ; 연구실에 난을 다시 맞게 되신 거 축하드려요. ^^

Mephistopheles 2006-11-2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을 부추로 보는 저는 대체 뭐란 말입니까?

무스탕 2006-11-2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집에 난순이들이 젤로 오래된것이 7년정도 됐네요.
잘 키워주지도 이뻐해 주지도 않는데 저리도 오래 살아주는거 보면 혹시 난이 아니고 잡초??
그래도 꽃피는거 보면 난이 맞나봅니다 ^^;
새 옷 입고 새로 자리잡은 난순이랑 잘 지내세요~

다락방 2006-11-2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잘 지내세요, 마태우스님. 난하고 사이좋게 말이죠 :)

아영엄마 2006-11-24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난하고 잘 지내지 못했어요. 미안해 난아~ 크흑...

클리오 2006-11-2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난 줄기가 늘어난건 그동안 증식한건가요, 아님 화원의 서비스인건가요, 아님 기적인가요? ^^;

해적오리 2006-11-2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문에 줄기 끝이 닿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감동적이네요. 사무실 제 자리 뒤에 있는 말라가는 난이 생각나면서 뜨끔하고 있습니다. 마태님은 참 마음이 따뜻하신 분 같아요....


비로그인 2006-11-2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고 비슷한 점이 있으시네요...! ^^

제가 선물받는 화분은 족족 죽여서 내버리게 되는 화려한 이력이 있어서
화분이나 꽃선물을 받으면 그 왕부담-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죠.
저도 자신을 식물성 이라기 보다는 동물성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평가하거든요.
나중엔 화분 돌보는 걸 포기해 버렸는데요.

마지막으로 받은 화분 2개가 있어요.
카랑코에 랑 산슬베리아.
사진 찍어서 올려드리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탐스럽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몰랐던 관심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많은 변화를 준답니다.
저도 화분이 잘자라서 스스로 대견해 하는 참이었어요.

난화분이 더 잘 자라길 바랍니다 ^^

세실 2006-11-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저 연두빛은 꽃대가 올라오는 건가요? 자세히 보니 3개는 보이는데..
이쁘게 잘 가꾸세용~~ 아님 충청권 이벤트할때 저에게 쏘시던가요~ 히.

모1 2006-11-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꼭 잘 지내시길....저 지난번에 알로에 화분 썩혀서 죽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물을 너무 많이 줬었나...봐요. 며칠에 한번씩 줬는데..흑흑...

비로그인 2006-11-2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난 바라보는 마음이 이쁩니다.

비로그인 2006-11-24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멋져요! 앞으로는 더 훌륭한 난이 되도록 해주세요~ ㅎㅎ

기인 2006-11-2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구실 난 꽤나 죽여봤습니다 ㅜㅠ
난 때문에 연구실까지 바뀐다니~ 정말 훌륭한 난이네요~ ㅎ

마태우스 2006-11-2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님도 혹시 무관심으로 죽이셨나요?^^
크리미슈슈님/난이 멋지다는 건가요 제가멋지다는 건가요?
한자님/오타입니다. '마태우스님의 날 바라보는 마음이 이쁩니다'죠
모1님/물은 적당히, 아셨죠?^^
세실님/그 연두빛 말이죠 그게 향기를 나게 한데요. 어차피 냄새는 못맡지만...
고양이님/으음, 님도 식물을 잘 죽이시나봐요. 역시 동물에 강한 사람은 식물에 약점이 있다는....
해적님/오늘을 계기로 물 좀 주시길&^&
클리오님/2만2천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꽃집아주머니가......
아영엄마님/그거야 님이 난초시니까....^^
다락방님/님과 더 사이좋게 지낼래요^^
무스탕님/와와 7년.... 설문조사 결과가 있는데요 휴대폰 7년 쓰는 것보다 난 7년 키우는 게 더 어렵다더라구요. 물론 뻥이지만...^^
메피님/난은 원래 부추를 개량한 거죠. 그러니 님은 난의 기원을 보시는 겁니다
달밤님/제게 간만에 댓글달아주신 거, 축하드립니다^^
유스또님/에 또 제가 이쁜 걸 좋아하죠. 호호호. 빔 모으고 있는 중...
속삭이신 분/2만2천원! 글구...지금은 좀 덜 우울한가요?? 글구...척하면 다 알죠.

페일레스 2006-11-2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글이 생각나는군요. 마태님도 점점 집착에 빠지는 겁니까? 흐흐. 농담입니다. 예쁘게 잘 키우셨으면 좋겠습니다. ^^

혜덕화 2006-11-2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이 너무 예쁘네요. 저 난에 꽃이 피면 그 자태와 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꼭 꽃을 한 번 피워보시기 바랍니다. - 정성을 들인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더군요. 저도 가끔씩 생각날 때 물 주고 천대했던 난이 꽃을 피우니 얼마나 난에게 미안하고 고맙든지.......님의 귀차니즘 정도면 꽃을 기대해도 좋을 듯^-^

마태우스 2006-11-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어 난에도 꽃이 핍니까? 몰랐습니다. 꼭 꽃을 피우도록 할께요. 꽃 피면 사진 찍어 올리겠습니다
페일레스님/전 욕심이 별로 없는 편이라서 난 하나쯤엔 욕심 가져도 될 것 같아요^^ 책은 안읽었어도 제가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이랍니다^^

비로그인 2006-11-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마태우스님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