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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군의 조건 - 한국군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강건작 지음 / 클라우드나인 / 2025년 3월
평점 :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서 교육과 군대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경험한 바 있고(직접 긴 기간을 그곳에서 지냈고, 자녀도 그러하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이나 성장보다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를 크게 입은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로 인해 지대한 관심과 애증을 갖는 곳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인은 이 두 곳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았음에도 딱히 진정한 관심은 없다. 이 곳들이 부조리가 사라지고 제 기능을 하도록 정치적 압박을 넣거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담론을 딱히 만들어 내질 않으며,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두 기관에 대한 사람들의 대부분의 언급은 사실 본인이 겪었던 것에 양념을 많이 섞은 뒷 담화에 가깝다.물론 세월이 지나 두 기관은 많이 민주화되었고 외형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내적인 부분에서도 그런지는 회의적이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다. 두 기관의 중요성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교육은 이번 글에서 차치하고 군만 생각해도 그렇다. 군은 국가, 사회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휴전 중인 북한을 제외하더라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라는 상당히 강력한 나라들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군의 강력함이 웬만한 나라보다 중시되는 이유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군은 그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가 많다. 책 '강군의 조건'에서는 그것을 군의 정치 개입 역사, 독자적인 전시 작전권이 없는 것, 일본 제국군의 그림자, 북한과의 대치상황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강군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다.
1.군의 정치개입 역사
한국의 역사에서 군사정권이 차지하는 기간은 무려 31년 9개월이다. 80년의 역사에서 40%정도에 달하는 비중이다. 군은 무엇보다도 군 전문성이 중요하다. 문제는 군사정권이 이 군 전문성을 크게 약화시킨 다는 점이다. 저자는 군사정권이 군 전문성을 약화시키는 이유를 9가지나 제시한다.
우선 군사정권은 군을 정치수단으로 활용하기에 군 내부에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정치파벌과 사조직이 형성된다. 이로 인해 군전문성과 상호신뢰가 사라진다. 둘째는 군이 전문성향상보다는 군사정권에 대한 충성도 경쟁을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진급도 실력자보다는 군사정권의 독재자에 충성하는 자가 한다. 셋째는 군사정권이 역설적이게도 군을 경계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누구보다 군의 위험성을 잘 알기에 군을 경계하게 되므로 발전이 어려워진다. 넷째는 군사예산과 자원을 국방력 강화가 아니라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국내치안유지와 정치탄업에 이용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는 군사전문성 향상을 위한 첨단무기개발, 장기적 군사인식, 훈련 프로그램이 뒷전이 된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는 군사력을 전투준비태세보다는 정권 홍보나 군대의 정치적 충성 과시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군병력과 자원이 국내 치안 유지에 집중되어 국방훈련과 전투훈련 시간이 줄어 든다는 점이다. 여덟 번째는 군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어 전문성이 줄어들고, 사명감과 도덕 기준이 약화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군사정권으로 인해 군의 국제적 신뢰도가 떨어져 다른 나라와의 군사적 협력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군에서 정치개입을 통해 군의 전문성 약화를 심화시킨 조직으로 방첩부대를 지적한다. 한국의 방첩사령부는 1948년 5월 군사정보 유출 방지를 목적으로 탄생했다. 이들은 1950년 육본 직할 특무부대가 되었는데 여수, 순천 사건에서 공산주의자 색출과 숙군작업을 했다. 4.19이후에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다시 육군방첩부대로 개명하였으나 5.16쿠데타 이후 다시 군사정권에 복무하며 군내 감시와 사찰 역할을 하게 된다.
방첩부대는 1968년 무장공비 습격사건으로 육군 보안 사령부로 개칭된다. 1977년 국군 보안 사령부로 확대개편되었고, 추후 사령관이 된 전두환이 그 권한을 이용해 12.12쿠데타를 일으킨다. 전두환 역시 보안사를 활용해 군을 감시 통제한다. 1990년 10월 보안사 근무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자료 폭로를 계기로 노태우는 1991년 민간인 사찰을 금지한다. 보안사를 기무사령부로 개칭한 것도 이 때다.
하지만 민간정부에서도 기무사의 군내사찰, 감시, 견제, 지휘관의 대통령 독대의 특권이 지속된다. 민간 정부에서도 기무사를 군의 견제에 이용하였고 그 결과 기무사령부의 정치편향화가 진행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대 기무사의 세월호 유가족 사찰, 계엄문건 작성의 문제로 2018년 이를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편한다. 사령관도 육군 대신 공군, 해군 출신으로 보직하고 대통령 직보 관행도 없앴다. 하지만 군내 동향보고와 인사자료 보고는 지속되었다. 윤석렬은 별 이유없이 안보지원 사령부를 다시 국군방첩사령부로 개편하고 정원을 크게 늘렸다. 사령관도 대통령과 밀접한 이를 임명했고, 역시나 12.3 내란에 방첩사령부는 깊게 연루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군의 역사에서 방첩부대는 권력의 옹위세력이며, 군을 잘 감시해 쿠데타를 막는데는 모두 실패했고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키는 핵심세력에 가까웠다. 이 같은 형태의 방첩부대는 권위주의 국가에만 존재한다. 다른 민주국가 역시 방첩부대는 존재하나 모두 정치 권력과 거리가 있는 순수 군사조직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의 경우 방첩사령부는 해체하고 군내 대공 수사는 군사경찰이 일반군사보안과 사이버보안은 국방부 정보과 관리관실과 각 군 본부의 정보작전 지원부, 사이버사령부에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군의 장성은 임기가 매우 짧고 임용의 형태가 이상하다. 이 역시 군의 쿠데타의 정치 개입으로 인한 흔적이다. 군의 모든 장교의 진급과 임용권은 대통령에 있다. 하지만 대령 이하는 국방부 장관에 위임하고, 위관급 이하는 각 군의 총장에 위임한다. 즉, 장군만 대통령이 직접 재가하는 구조다.
한국의 장성 수는 2024년 기준 370명이다. 장성은 매우 높은 권한과 책무를 가지는 만큼 군내의 가장 실력자가 보임 되는 것이 온당 하다. 하지만 장성의 보임은 놀랍게도 안배 개념으로 배치한다. 안배란 인사검증으로 군내에서의 실력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신 지역, 사관학교 출신, ROTC출신, 성별, 특정병과 출신인지를 고루 안배해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군의 세력 배분 균형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안배 개념은 역시 군사정부에서 유래했다. 안배를 통해 특정 세력이 뭉치는 것을 방지해 제2의 쿠데타를 막기 위함이다.
또한 한국의 장성은 임기가 매우 짧다. 장성의 임기는 정권의 입맛대로인데 얼마 전에 임명되었어도 대통령이 바뀐다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성의 임기가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일선 부대에 일관된 정책이 수립 될텐데 한국은 이것을 기대하기 매우 어렵다. 반면 미국은 대부분의 장성이 임기가 보장되며,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기를 좌지우지 못한다. 한국은 장성의 보직배정도 매우 갑작스럽다. 현 보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수 일전에 알려주는 것이 태반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장성들은 현재의 일조차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 한체 갑작스레 새로운 곳으로 가게된다. 이런 상황에서 군 전문성이란 매우 요원한 일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보직과 짧은 임기 역시 제2의 쿠데타를 막기 위한 군사정권의 흔적이다.
2. 전시 작전권
현재 한국군은 평시 작전권이 있으며 전지 작전권은 갖고 있지 않다. 한국군의 전작권이 넘어 간 것은 1950년으로 이승만이 UN에 이양했다. 그리고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었고, 1994년 평시작전권을 찾아왔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 말기 UN과 미국,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해버린다. 당시 북한은 이들의 전원 송환을 원했고, UN과 미국의 입장은 일단 북한이 포로를 설득하고 그래도 원하지 않으면 석방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방적인 이승만의 행태에 미국은 강한 불신을 갖게 된다. 미국은 교착상태인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는데 국방력에 자신이 없었던 이승만은 안전보장을 위해 북진 통일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원했다. 결국 정전 협정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약속 받았으나 이승만의 독단 행동으로 인한 안보 불안으로 작전권을 회수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를 작전권이 UN사령관에 있음에도 한국군이 불법적으로 군을 움직인 사건이었다. 당시 반란군은 UN사령관의 복귀명령도 거부한다. 이를 큰 문제로 비화할 수 있었지만 눈치빠른 박정희가 반공정권을 천명함으로 미국을 안심시켜 일단락된다. 의도치 않게 군사반란은 한국군의 일부가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북의 잦은 내침으로 공비토벌이 잦아지자 1971년 유엔군사/주한미군사 정책지침에 의거해 내국치안작전에 한해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갖게 된다. 공비토벌에는 현장의 빠른 대응이 필요한데 그것에 응한 것이다.
1970년대 미 대통령 닉슨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공산권과의 긴장을 완화한다. 주한 미군도 2만 가량이 감축되었는데 첨단 장비의 도입을 약속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북의 197년대 전력은 한국군의 2배 수준이었다. 한국의 박정희는 이런 여건을 타개하고자 핵개발에 착수한다. 미국은 이를 막고자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한다. 미군의 일부 철수와 한국군의 전력 증강, 새로운 연합 지휘구조의 결과물이었다. 연합사는 한국과 미국 인력을 1:1로 대응시키는 구조다. 다만 한국은 연합사 인력이 그곳에만 집중하는 반면 미국은 대부분이 주한미군사령부와 겸임상태다.
냉전이 종식되자 미국은 평시 작전권을 1994년 한국에 이양한다. 미국은 한국군이 오래도록 UN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에 종속 상태였기에 이들의 작전 능력이 함양되면 바로 전작권도 이양할 계획이었다. 2007년 연합사는 해체 예정이었고, 2012년엔 전작권 양도가 합의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이후 이명박 정권이 이를 연기했고, 박근혜 정권 역시 소극적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전작권 이양에 적극적이었으나 만시지탄이었다. 이젠 중국이 미국의 견제 새력으로 떠으로고 어느 새 신냉전 구도가 완성된 것이다. 미국이 다시 전작권 이양에 소극적이 되면서 한국의 전작권 회복은 군사력 5위라는 덩치와 걸맞지 않게 기약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전작권의 상실은 한국군의 체계를 매우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무려 4성 장군이 지휘하는 최고 수준의 사령부가 9개나 된다. 주한미군사령부 유엔군사령부,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공군본부, 지상작전사령부, 제2작전 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다. 이는 유사시에 각자의 입장이 모두 다르고 지휘체계가 달라 신속한 대응을 매우 어렵게 한다. 2022년 북한은 소형 무인기를 침투시켰다. 무인기의 비행고도가 매우 높아 육군헬기로는 대응이 어려웠다. 이에 공군기가 출동했는데 공군기가 타격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결국 육군의 방공무기가 대응에 가장 적절했는데 무슨 일인지 공군사령부가 미적대며 작전 권한을 육군에 잘 넘기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충분히 부여받은 북의 무인기는 2시간을 유유자적하며 북으로 복귀한다. 이것은 작은 예이지만 모보다 큰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이 매우 난감해진다.
전작권의 부재는 한국군의 군 전문성 약화의 원인이기도 하다. 적어도 평시작전권의 이양 이전 한국군도 그 초점이 항상 전쟁상황에 가 있었다. 하지만 평시작전권이 이양되지 역설적이게도 군 수뇌부들은 평시작전에 관심과 노력을 쏟기 시작한다. 그렇다보니 어느 덧 군 수뇌부는 평시경험인력으로만 가득해졌다. 때문에 지금의 한국군 수뇌부는 유사시 한반도 전쟁상황에 대한 기본 군사 작전과 수행에 관심이 매우 적다.
미군은 베트남 전의 패배 이후 공지전투 개념을 만든다. 이는 통합작전, 작전 종심 확대, 기동전, 동시전투다. 작전종심확대는 전쟁 개시 단계부터 적의 후방지역까지 작전 범위를 넓혀 적의 지휘, 통신체계를무력화하고 병참을 차단하는 것이다. 기동전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신속한 기동과 공격을 통해 적을 압도하는 것이고, 동시 전투는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동시에 전투를 수행해 적의 대응을 막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은 2010년부터 다영역작전개념이 도입되었다. 육군, 해군, 공군, 우주, 사이버공간을 아우르는 통합 작전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에 비해 한국군은 군의 전력 증가에 무엇을 언제, 누가는 있지만 왜와 어떻게가 부재하다. 미국의 위와 같은 전략은 왜와 어떻게에 해당하며 이를 위한 무기 개발과 도입을 한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의 무기개발과 도입을 따라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국군의 수뇌부는 어이 없게도 지상군 방어 개념이 일선형 방어다. 이는 전선을 일자로 유지하며 한치의 땅도 밀리지 않겠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한 곳이 무너지면 또 다시 여러 개의 종심 방어선에서 축차적으로 다시 일자형 방어를 복원하는 개념이다. 한국군은 한미연합훈련이나 모의 훈련에서 항상 이를 고집한다. 이는 한국전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고지전의 영향이자 일본 제국군의 만세돌격 전술의 영향이다. 일제국군은 이런 무모한 전술로 수 많은 장병을 죽음으로 몰았다. 한국군 역시 이 전술이 모의전에서 수십만의 장병을 희생시킴에도 이를 고집하고 있다. 북한의 기본 전술은 강한 화력으로 포를 일제 사격하여 방어부대를 약화시킨후 기동전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굳이 북의 일회성 포사격을 맞아주지 말고 일제 후퇴하여 상대의 화력을 낭비시킨 후 방어력을 온존하여 반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소중한 인력 희생도 막을 수 있다.
전작권이 부재하다보니 한국군은 경계 임무에 사활을 건다. 전 세계 군 중 경계 작전에 이렇게 큰 비중을 두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어쩌다 한 곳이라도 뚫리고 나면 언론과 정치권이 중대한 피해라도 당한 마냥 난리를 친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국경수비를 주로 경찰이나 국경수비대가 따로 편성되어 실행한다. 대개 정규군은 경계임무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군은 법적으로 민간인의 체포나 검문검색 권한이 없다. 침투하는 적은 대개 민간인으로 위장하는데 더욱 적합치 않다.
경계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경계 업무는 매우 지루한 것이기에 주기적 부대 교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숙식과 무기, 장비, 도로, 시설 유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군의 일선지휘관은 승진에 있어 실적보다는 흠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전방에 배치라도 되면 경계에 사활을 걸게 된다. 경계는 중요하나 그것이 전쟁 수행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도한 경계로의 집중은 군의 역량 약화요인이 되고 만다.
3. 일본제국군의 흔적
한국군은 초기 일본군 출신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독립군의 세력이 미약했고, 친일 청산이 되지 않았으며, 미국이 이를 용인했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한국군은 초기부터 전술이나 군대문화에서 일본제국군의 흔적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일본제국군은 1873년 징병령으로 창설된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초기 정부로 행정력이 부족해 징집능력이 크게 부족하여 전 국민의 3%정도가 징집되었다. 사무라이와 귀족출신, 도시의 고학력자는 제외되었고 그렇다보니 저학력의 시골농민이 주 대상이었다. 이들의 불만은 상당했는데 이를 억누르기 위해 황군개념을 도입한다. 군의 복무하고 충성하는 대상이 천황이 되는 것이었고 상관의 뜻은 곧 천황의 뜻이 되기에 복종을 강요하기에 적합했다. 그리고 초기에 군에서 제외되었던 사무라이들은 대거 군사학교에 입학해 군장교로 유입된다. 그래서 일본군에는 사무라이 정신도 침투하였는데 사무라이에게는 하급 사무라이와 일반백성의 생살여탈권이 있었고 이런 정신이 군대에 작용하게 되었다.
이런 양 요소는 전시에 부하들에 대한 즉결 처벌권으로 작동한다. 초기 한국군의 수뇌부는 이를 일본군에서 경험하고 내면화하여 한국 전에 적용한다. 그 결과 한국 전에서는 광범위한 즉결처분이 이뤄진다. 즉결 처분은 글자 그래도 부하를 군형법의 적용이나 재판 없이 상관이 임의로 총살해버리는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 국방부는 여러 전선에서 밀려 군의 질서가 흔들리자 즉결 처분권을 분대장 이상에게 허용한다. 그러다 부작용의 우려로 1951년 7월 이를 폐지했다 2주 만에 부활하였는데 이 때는 중대장 이상 급에 이를 허용했다. 즉결 처분권은 매우 임의적으로 이뤄졌다. 사적 보복도 만행했으며 독립군 출신대 일본 군 출신의 갈등 상황에서도 작용했다.
부하에 대한 이런 무조건적인 상명하복 문화는 전후에도 이어진다. 바로 구타와 가혹 행위다. 한국전 이후 군 내 사망자의 수는 소규모 국지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상당하다. 1954년 2998명 1955년 2660명, 1956년 2710명, 1957년 2009명이다. 매년 거의 연대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이런 행위는 군사정권 내내 이뤄지다 민주화가 이뤄진 1987년에 이르러서야 국방부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 근절 지침을 내리고 나서야 잦아든다. 군내 사망자는 1994년에도 무려 416명에 달했고 2015년에서야 93명으로 100명 이하로 내려간다.
4.한국군의 위기와 해결방안
한국군의 우선 절대적 병력 감소라는 위기를 맞고 있다. 70만에 달하던 한국 현역군은 현재 50만 수준이고 2040년대에는 20만 이하로 감축된다. 병력 수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해군과 공군에 비해 육군의 타격이 크다. 지상군은 결국 영토를 직접 수호하고 점령해야 하기에 그 역할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 만큼 인구감소가 크지 않고 군복무기간을 마음 껏 늘릴 수 있기에 2040년대에도 여전히 100만 병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군 감소에 대비책은 다음과 같다. 우선 모병제의 도입이다. 하지만 한국의 모병 공급은 연간 1만 정도로 추산되어 5년의 의무 복무를 도입해도 그 수가 5만에 불과하다. 다음은 군복무원의 확충이다. 현재 한국군은 전투병이 군 내의 많은 행정일을 하고 있다. 군복무원을 충분히 확충하여 전투병이 전투에 집중하게 한다면 그 자에로 병력증강효과가 있다. 세 번째는 민간 위탁의 확대이며 마지막은 인공지능, 드론, 로봇으로 병력자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곧 다가올 미래이나 언제 현실화할지 미지수다.
그리고 한국군의 100% 기동화다. 언급한 것처럼 한국군의 병력 열세는 시간 문제다. 한국군은 전투지역전단이라는 일자형 방어전술을 고집하는데 이는 여러 모로 부적절하다. 현대 한국은 산림이 복원되어 밀림화하였다. 때문에 개전과 동시에 산이 불바다가 되기에 적은 산림으로 침투하고 은거하는게 불가능하다. 결국 평지로 돌입해야 하는데 한국은 도로망이 촘촘히 발달하여 일자형으로 이를 완전히 방어하는게 매우 어렵다. 그리고 적들 역시 한국의 도시가 매우 촘촘히 발달하여 대규모 시가지이기에 진군자체가 어렵다. 또한 비무장지대가 거의 70년간 버려져 있어 땅이 스펀지화하여 대규모 기계화 부대의 진군자체가 힘들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투지역전단을 고집하기보다는 뒤로 물러 방어력을 온전히 한 후 빠른 기동부대 편성으로 적을 타격하는 것이 방어에 적합하다.
군사기초훈련도 12주로 늘려야 한다. 한국의 기초군사훈련은 5주 정도인데 1주는 대개 신체검사 및 보급으로 퉁치고 나머지 4주의 상당 수도 불필요한 정신교육으로 이뤄진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수준이다. 독일은 16주이며, 미국은 10주 훈련 후, 개별 병과훈련, 이스라엘은 6월에서 8월간 훈련을 한다. 한국도 한국전 당시에는 16주의 기초군사훈련을 했다. 당시 병력의 조달이 시급했음에도 이렇게 길게 훈련을 한 것은 그 자체가 병력의 생존률을 높였기 때문이다.
예비역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 한국의 예비군은 훈련이 매우 짧은데 저자는 이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본다. 군에서 제대로 된 훈련만 받았다면 이는 평생간다는 것이다. 대신 열악한 예비군 무기와 시설을 현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예비군 훈련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놀랍게도 소총은 베트남 전에서 쓰던 M16을 주거나 심지어 한국전때 주력 무기인 칼빈소총을 주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포병 같은 경우 자주포가 아닌 견인포를 사용한다. 이래서는 북한만도 못한 수준이다. 따라서 예비군의 전력화를 위해서는 무기와 시설의 개선이 필요하다.
장성에 대한 정책과 교육도 필요하다. 한국의 장성들은 장군으로 진급해도 전혀 교육을 새로 받지 않는다. 즉, 사관학교나 임관 과정에서의 교육이 전부이고 나머진 현장 경험 뿐인 셈이다. 미국은 장성이 되면 그에 걸맞는 작전관과 시야를 심어주기 위해 적지 않은 교육을 실행한다. 한국도 이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