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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2월
평점 :
직업에 대한 이야기로 각 직종이 다르듯 각 장이 주는 느낌도 달라서 하나로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낯설게 보기’, 또는 “멀리서 본 일의 아름다움이과 그 속에 숨은 슬픔”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자극적이거나 큰 감동을 주진 않으나 항상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보통의 글답게 일상적으로 보이는, 언제나 반복되는 ‘업무’, 또는 ‘일’에서 새로움을 찾거나 그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책을 시작하는 ‘물류’는 일상에서 접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손길이 닿았을지 그리고 그 업적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업무이고, 그 일의 결과물이 상하지 않은 채소나 통조림처럼 당연한 듯 보이는 일에도 한 사람이 다 이해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업적과 성취가 담겨 있음을 생각하는 건 새롭다. 특히 중세 성당의 건축적 가치에 떨어지지 않는 듯 그려지는 창고의 구조나 싱싱한 딸기와 같은 창고의 성취는 삭막해 보이는 일터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어지는 단원에서도 일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은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84쪽)
그러나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은 5천명의 삶과 6개 제조 현장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되어 각각의 업무가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없게 된 순간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지적한 저자의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특히 제조업의 대부분은 욕구의 가장 바닥을 충족시킬 테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일에 대한 관점을 바꿔볼 것을 제안하는데
108 산업 현장의 모든 일들은 원시시대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사냥과 다르지 않은 ‘생존 수단’ 임을 이야기하고 (108쪽) 이어서 비 이상적인 문명이라도 이상적인 목표를 이룰 수단이 되거나 이상을 실현할 재원마련의 수단이 된다고 위로를 던진다. (113쪽)
그러나 그 이상의 실현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니면 이상의 실현에 필요한 사람 백만 명 정도 인데 내가 천만 번째 사람이라면 여전히 슬플 것 같아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직업 상담을 살피는 4장은 책의 주제 자체를 다루는 직업이어서인지 좀 더 직접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예를들어
‘소명’이라는 이 묘하고 불행한 용어는 중세에 기독교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소명이란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라는 명령과 갑자기 마주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먼스에 따르면 이런 개념의 세속화된 변형이 현대까지 살아남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 삶의 의미가 이미 만들어진 결정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그러면 우리에게서 혼란, 질투, 후회의 느낌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125쪽
라면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거나
시먼스는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메슬로가 ‘동기와 성격’에서 한 말을 좋아하여..(중략)..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125쪽)
이렇게 직업 선택의 현실적인 면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직업 상담의 열악한 환경과 그 한계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에...(중략)...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143쪽)
어차피 직업생활에는 아니, 삶에서 어떤 거창한 것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위대해지고자 하는 노력들은 부질없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아직 출판사를 구하지 못한 직업상담사 시먼스의 책처럼 말이다.
그도 아니라면 다음 장인 ‘로캣 과학’에서 우주까지도 인간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위대함을 이루었으나 너무 평범해져서 과학이 이룬 ‘더 이상 위대하지 않은 위대함’을 과학자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과학으로 기계장치의 축복을 받았으나 겸손하지 못한 세계관으로 인한 불안에 잠겨 살아야 하거나. 둘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림
아마 이 책의 의도는 ‘이미 보아왔던 것을 눈여겨보도록 하기 위한 것’(210쪽)인지 모른다.
아니면 “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것처럼 제대로 보기”위한 것이거나.
그런데 비록 화가는 변변치 못한 배관공 정도의 수입을 올리더라도 그 결과가 어떤 사람에게 미칠 작고 의미 있는 변화를 상상할 수 있겠지만 일반화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이를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인 측면을 보는 듯하다. (215쪽) 라 말하는 저자는 조금 엇나가지 않았을까?
그 그림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재화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많이 찾을 수 있는 거라 이 비교 또한 어쩌면 기득권 문제, 부르주아 문제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계
사무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곧 로비의 이상한 은 조각품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곳이 첫날 얼마나 낯설어 보였는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자유의 끝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의심과 집념과 변덕스러운 욕망의 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268p)
평범한 사무직의 일상. 꿈과 현실의 괴리와 그럼에도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뉴스 신문의 사건들로 다시금 느끼게 되는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에 대한 안도감에 대한 만족은 다시 말하면 기쁘지 않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게 일의 진짜 슬픔이리라.
사무실에서 하루가 시작되면 풀잎에 막처럼 덮인 이슬이 증발하듯이 노스텔지어가 말라버린다. 이제 인생은 신비하거나, 슬프거나, 감동적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우울하지 않다. (여기는) 현실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무대다.269쪽
이 문장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지금까지 직종들이 사무직과 거리가 있었다면 회계 파트는 거의 모든 사무직이라 일반화 해도 될 것 같다.
274
(그들은)감사업무에 불멸을 위한 기회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감사업무 말고도 대부분 직장인들은 불멸을 위한 기회를 포기하고 직장을 갖게 되었으니 역설적으로 꿈을 포기하고 직업을 얻는다. 여기서 한가지 차가운 사실이 강조된다.
현대 세계의 사무실은 중세 기독교 왕국의 수도원과 같다. 겉으로는 정숙해보이지만 비길 데 없이 강한 욕망을 자극할 만한 잠재력을 갖춘 무대인 것이다.
이 두 시스템이 파계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벌을 주는 것은 그 각각이 각 사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즉 옛날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고, 지금은 돈이다. (297쪽)
지금 사무실뿐 아니라 대부분 일터의 목표는 어떤 숭고한 목표에서 '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속에서 숭고한 일을 하고자,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퇴근 후의 일탈을 생각하지만 대부분 잠과 피곤에, 와인에 의해 좌절된다.
그리고 드디어 여러 이야기를 지나 항공산업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과 직업에 대해 다룬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특별한 드라마 없이, 방연모를 쓴 소방관이나 활주로의 거품 없이, 집단 사고라는 위안과 아나운서의 동정어린 논평 없이, 분해라는 무미건조하고 느린 과정을 통하여 죽어갈 가능성이 늘 더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364쪽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367쪽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371족
진정한 일의 가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여러 문학작품이 여기에 반대하는 작품들을 남겨왔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라면, 일을 취미로 할 수 있는(부자들?) 이 아니라면 직업 자체에 한정할 때 딱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더 큰 일을 이루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소박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지만 경멸하고 싶기도 하고 자랑스러우나 징그러움과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는 우리 직장을 의미있게 바라보기 위한 가치라면 더 찾아야 기쁠 수 있겠지. 아직은 슬픔이 더 크다.